창세기 35:23-36:8 얽힌 갈등의 종결과 평화를 위한 거리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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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밧단아람에서 얻은 열두 아들의 명단이 네 어머니의 출신에 따라 기록되며(35:23-26), 야곱은 마침내 헤브론에서 아버지 이삭과 재회합니다. 이삭은 180세의 나이로 평화롭게 숨을 거두고, 앙숙이었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이 함께 그를 장사 지냅니다(35:27-29). 이어서 에서의 족보가 소개되며 이방 아내들과 그들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이 기록되고(36:1-5), 에서는 소유의 풍성함을 이유로 스스로 가나안을 떠나 세일 산으로 이주하여 정착합니다(3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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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문화적으로 고대 유목 사회에서 가축의 증가는 곧 목초지와 식수의 부족을 의미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소유가 많아 갈라섰던 창세기 13장처럼, 에서와 야곱의 분리 역시 제한된 자원이 빚어낸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또한 고대 사회에서 앙숙이었던 형제가 아버지의 장례를 함께 치르는 것은 과거의 원한을 청산했다는 가장 강력한 화해의 선언이었습니다.
# 신학·정경적으로 이 본문은 족장 시대의 한 세대(이삭)가 저물고 새로운 세대(야곱의 열두 아들)가 언약의 전면에 등장하는 영적 세대교체의 장입니다. 창세기 36장에 삽입된 에서의 톨레도트(족보)는 창세기를 구성하는 10개의 족보 가운데 하나로, 언약의 계보(야곱)와 세상의 계보(에돔)가 분기하는 구속사적 전환점입니다.
# 송민원 박사의 수평적 읽기 관점에서 보면, 본문은 야곱의 열두 아들이 네 여인의 피 튀기는 질투와 대리모 출산이라는 타락한 인간 욕망의 산물임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상처투성이의 역기능 가정을 이스라엘 열두 지파라는 구원의 도구로 삼으십니다.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했던 분노를 내려놓고 가나안을 양보하며 세일로 떠나는 모습은, 무리한 융합보다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건강한 경계 짓기가 때로 평화를 지키는 지혜임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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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6절 일그러진 가정에서 태동한 언약의 열두 기둥
하나님은 흠결 많고 찢어진 가정의 역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한복판에서 당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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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름을 어머니들에 따라 구분하여 기록합니다. 레아의 아들 여섯, 라헬의 아들 둘, 빌하의 아들 둘, 실바의 아들 둘입니다. 이 짧은 명단은 이스라엘이라는 거대한 국가가 형성되는 언약의 기초입니다. 히브리어로 '아들들'을 뜻하는 복수형 '바님(בָּנִים)'이 이 단락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단순한 족보 기록이 아니라 한 가문에서 한 민족으로 확장되는 신적 섭리의 선언임을 암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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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명단의 이면을 수평적으로 들여다보면, 이곳은 결코 낭만적인 은혜의 동산이 아닙니다. 야곱의 편애로 인해 남편의 사랑을 구걸하던 레아의 한, 언니를 질투하여 여종들까지 대리모로 동원했던 라헬의 탐욕, 인격이 철저히 소외된 채 출산 도구로 전락했던 두 여종 빌하와 실바의 눈물이 얽히고설킨 역기능 가정의 결정체입니다. 더구나 장남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과 패륜을 저질렀고(35:22),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에서 잔혹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34장). 도덕적으로도, 영적으로도 파산 직전의 가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위대한 반전은 인간의 어떠함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죄악과 경쟁, 수평적 폭력을 결코 긍정하지 않으시지만, 그 일그러진 진흙탕 같은 현실을 우회하지도 않으십니다. 히브리어 '톨레도트(תּוֹלְדוֹת)', 곧 '족보' 혹은 '후손들'이라는 단어는 창세기 전체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계획이 이어져 내려가는 통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 흠결 많은 열두 명을 기어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로 세워 가십니다. 인간의 타락한 욕망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결코 무너뜨릴 수 없다는 압도적인 은혜의 선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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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5월 5일, 어린이날을 맞아 우리는 자녀들을 바라볼 때 어떤 시선을 가지고 있는지 잠시 묵상합니다. 야곱의 가정처럼 편애와 경쟁이 가정의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벽한 가정 환경이 아니라 은혜의 도구로 세워진 부모와 공동체를 통해 다음 세대를 빚어 가십니다. 우리 아이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흘러가는 통로입니다. 우리 공동체와 가정 안에도 야곱의 집처럼 시기와 보이지 않는 상처들이 도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삶과 내 가정이 이렇게 망가졌는데 과연 하나님이 나를 쓰실 수 있겠느냐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연약함과 실패라는 재료를 가지고도 가장 영광스러운 언약의 기둥을 깎아내시는 탁월한 토기장이이십니다. 내 한계를 뛰어넘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권적 은혜를 신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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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29절 이삭의 죽음과 두 형제의 화해의 장례식
하나님은 평생 이어지던 형제의 원한과 경쟁도 죽음이라는 궁극적 한계 앞에서 화해의 눈물로 녹여내시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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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기럇아르바 곧 헤브론의 마므레로 돌아와 아버지 이삭에게 이릅니다. 이삭은 180세를 일기로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여 조상들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는 문장으로 단락이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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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본문에서 이삭의 죽음을 묘사하는 표현 '가와(גָּוַע)', 곧 '숨을 거두다'는 단순한 사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평화롭게 삶을 마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아브라함의 죽음을 묘사할 때도 동일하게 사용됩니다(25:8). 이삭의 생은 파란만장한 자녀들의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 아래 충만하게 채워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단락에서 가장 가슴을 치는 대목은 바로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는 마지막 문장입니다. 창세기 27장에서 에서는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27:41)고 분노하며 피의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즉, 아버지의 장례식은 원래 동생을 살륙하는 디데이로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두 사람이 아버지의 무덤 앞에 나란히 서 있습니다. 복수의 칼날이 화해의 눈물로 변한 것입니다. 얍복강의 씨름 이후 에서와 야곱이 극적으로 화해했던 창세기 33장의 포옹이 이 장례식 장면에서 완성됩니다. 세월이 흐르고 하나님의 은혜가 두 사람의 영혼을 깎아낸 지금, 그들이 평생 붙들었던 치열한 경쟁과 자존심, 상처가 180년이라는 시간과 죽음 앞에서는 얼마나 작고 덧없는 것인지가 무덤가에서 선명히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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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영원할 것 같은 분노와 원한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죽기 전에는, 혹은 내가 죽기 전에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이를 가는 단절이 우리 삶에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삭의 무덤가에 나란히 선 에서와 야곱을 보십시오. 죽음이라는 궁극적 한계 앞에 서면, 우리가 평생 바쳐 싸웠던 이익과 자존심이 한낱 흙먼지에 불과함을 알게 됩니다. 무덤 앞에서 후회하기 전에 오늘 십자가의 은혜로 먼저 용서의 손을 내미십시오. 우리 안에 남은 묵은 원한의 사슬을 끊어내고, 그리스도의 평안으로 형제를 부둥켜안는 화해의 복을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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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1-5 언약 밖에 선 자를 향한 긍휼
하나님은 언약의 테두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일반 은총의 복을 풍성하게 부어 주시는 만유의 창조주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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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곧 에돔의 족보(톨레도트)가 소개됩니다. 에서는 가나안 여인들인 아다, 오홀리바마,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여 엘리바스, 르우엘, 여우스, 얄람, 고라 등의 아들들을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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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를 구성하는 10개의 톨레도트 가운데 하나인 에서의 족보는, 저자가 구속사의 직계인 야곱의 이야기(37장)로 넘어가기 직전에 의도적으로 삽입한 구조입니다. 히브리어 '톨레도트'는 단순한 족보가 아니라 한 존재로부터 파생되는 역사와 문명의 흐름 전체를 가리킵니다. 저자는 에서에게도 하나의 고유한 역사가 있음을 창세기의 공식적인 형식으로 인정합니다. 수직적인 교리적 잣대로만 보면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넘긴 망령된 자요, 이방 여인들과 통혼하여 부모의 근심이 된 세속적 인물입니다. 그러나 수평적 읽기는 에서의 삶을 함부로 악마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창조하신 생명을 함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에서는 구속사적 약속의 땅과 언약 계승권은 잃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도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반 은총을 풍성하게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약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 곧 하나님이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리신다(마 5:45)는 진리와 맥이 닿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우산은 우리의 좁은 종교적 테두리보다 훨씬 넓고 광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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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나와 내 공동체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한다는 영적 엘리트주의에 빠집니다. 교회 밖의 이웃들이 누리는 성공과 번성을 불신앙의 아이러니로 깎아내리거나, 그들을 배타적으로 정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서에게 쏟아진 하나님의 돌보심을 기억하십시오. 신앙의 테두리 밖에 있는 이들을 혐오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넓으신 마음을 우리의 좁은 그릇에 가두는 일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긍휼히 여기며, 일반 은총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로 나아올 수 있도록 중보하고 섬기는 성숙한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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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6-8 평화를 위한 분리와 세일 산으로의 이주
하나님은 인간의 세속적 선택조차도 당신의 언약 성취를 위한 발판으로 삼으시는 전능하신 섭리의 주권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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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자기 아내들과 자녀들,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가축과 재물을 이끌고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합니다. 두 사람의 소유가 너무 많아 함께 거주할 수 없었고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 땅이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서는 세일 산에 거주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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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은 창세기 13장에서 소유가 많아져 아브라함과 롯이 갈라섰던 사건의 완벽한 데칼코마니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피 터지는 소유권 분쟁이나 유혈 사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 에서가 야곱을 "떠나다"는 표현에 사용된 동사 '야레드(יָרַד)'의 방향성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두 형제의 운명이 완전히 분기되는 결정적 순간을 암시합니다. 에서는 동생과 다투는 대신,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미련 없이 떠나 세일 산을 새로운 근거지로 삼습니다.
수평적 읽기의 시각에서 에서의 선택은 두 가지 양면성을 지닙니다. 첫째, 그는 눈앞의 경제적 풍요와 이익을 좇아 하나님의 언약이 담긴 약속의 땅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세속적이고 실용적인 한계를 보였습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았던 그 오래된 패턴이 이번에는 가축 떼를 먹일 목초지라는 현실적인 이유로 반복되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나 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더 이상의 폭력과 갈등을 예방하기 위한 성숙한 경계 짓기였습니다. 억지스러운 동거가 낳을 분쟁보다, 적절한 거리두기로 유지되는 평화가 때로는 더 지혜로운 선택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선택조차도 주권적으로 사용하십니다. 에서가 스스로 가나안을 비워줌으로써, 결과적으로 야곱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의 온전한 상속자로 정착하게 됩니다. 인간은 자기의 배를 불리기 위해 세일 산으로 떠났지만, 하나님은 그 인간의 욕망마저 활용하사 언약의 역사를 오차 없이 성취해 내십니다. 이것이 섭리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우연처럼 보이는 인간의 선택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언약 성취의 퍼즐 조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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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인간관계나 사역의 현장에서 제한된 자원과 공간 때문에 불가피한 갈등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무조건 하나 됨만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평화를 위해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적절한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분리의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예리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지금 당장의 경제적 이익이나 마음의 편함이라는 세일 산을 위해, 하나님이 내게 머물라고 하신 사명의 자리인 가나안을 이탈하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의 풍요가 아무리 매력적으로 보여도, 영적 본향 밖에서 쌓아 올린 견고한 성은 결국 허무한 것입니다. 어떠한 현실적 결핍과 갈등 속에서도 세일 산의 부요함이 아니라, 척박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흐르는 십자가의 자리를 끝까지 사수하는 굳건한 신앙의 상속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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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의 허물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당신의 약속을 성취해 가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
어머니들의 시기와 대리모 출산이라는 타락한 인간의 욕망 속에서 태어난
야곱의 열두 아들을 기어이 구속사의 거룩한 도구로 세워 가시는
그 주권적인 은혜 앞에 찬양을 드립니다.
완벽한 사람을 찾지 않으시고, 흠결 많고 찌그러진
일상의 진흙탕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임을 고백합니다.
오늘 어린이날, 다음 세대를 바라보며 우리는 고백합니다.
우리의 가정이 야곱의 집처럼 상처와 편애로 얼룩져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당신의 언약이 흘러가는 통로로 세워 가심을 믿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향한 편애와 비교의 죄를 내려놓고,
그들 모두를 하나님의 선물로 귀히 여기는
부모와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과거의 상처와 증오로 평생을 으르렁대며
피의 복수를 꿈꾸었던 에서와 야곱이 마침내
아버지 이삭의 죽음 앞에서 무기를 내려놓고
눈물의 장례식을 함께 치르는 화해의 모습을 봅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와 가정 안에도 이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자존심과 세속적 경쟁의 사슬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늦기 전에 먼저 용서의 손을 내미는 화해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약속의 땅 밖으로 밀려난 에서에게도
일반 은총의 풍성함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넓으신 품을 배웁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을 정죄하고 무시하던 영적 교만을 회개하오니,
그들을 향해서도 긍휼의 마음을 품게 하옵소서.
또한 때로는 억지스러운 융합보다 건강한 거리두기가
평화를 지키는 길임을 깨달아 지혜롭게 관계를 맺어 가되,
눈앞의 이익을 좇아 사명의 자리를 이탈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우리의 발걸음을 굳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모든 얽힌 갈등을 십자가의 피로 씻으시고,
영원한 샬롬의 약속으로 우리를 품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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