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5:1-22 세겜의 상수리나무 아래 묻어버린 것들

by 평화의길벗 posted May 0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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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5:1-22 세겜의 상수리나무 아래 묻어버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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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을 짓밟고 움켜쥔 탐욕의 전리품을 흙 속에 파묻고, 상처와 수치로 얼룩진 삶의 한복판에서도 묵묵히 곁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 말씀이 내 몸을 통과하도록 기꺼이 앓는 것, 그것이 신앙의 본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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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초여름의 싱그러운 물기로 찰랑이는 아침입니다. 눈부신 계절의 풍경 속에서도 남모를 삶의 무게와 꼬여버린 관계의 매듭 앞에서 홀로 한숨짓고 계신 분들, 그리고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막막한 현실 앞에서 신앙의 참된 의미를 더듬고 계신 모든 분의 영혼에 창조주 하나님의 넉넉한 위로가 고요히 깃들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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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종종 타인을 밟고 올라선 폭력적 성취를 승리와 영광이라 포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창세기 35장의 풍경은, 그 얄팍한 세속적 욕망과 폭력으로 산산조각 난 한 가정의 참담한 실패와, 그 부끄러운 도피의 길 한복판에 기어코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를 묵직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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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로 올라가기 직전, 야곱의 가정은 세겜 성에서 끔찍한 살육과 약탈을 저질렀습니다. 딸 디나의 수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시므온과 레위가 거룩한 할례를 무기 삼아 성읍 사람들을 도륙하고 그들의 재물을 빼앗은 것입니다. 거룩함이 폭력의 외장을 걸친 순간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치명적인 역설 앞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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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창 35:1)라고 외친 것은 영웅적인 신앙의 행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변 부족들의 보복이 두려워 쫓기듯 떠나야 했던, 가해자 가족의 절망적이고 비루한 도피였습니다. 그 절박한 길 위에서 야곱은 가족들에게 명합니다.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창 35:2). 그러자 그들은 손에 있던 모든 이방 신상들과 귀고리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습니다(창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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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수리나무 아래 묻혀버린 것들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미신의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세겜 사람들을 짓밟고 빼앗은 탐욕의 전리품이었으며, 타인을 철저히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시켰던 잔혹한 폭력성과 이기심의 상징이었습니다. 야곱의 가족이 그것들을 흙 속에 파묻을 때, 그들은 단지 종교적 의례를 수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웃을 향해 휘둘렀던 파괴적인 무기와 욕망의 찌꺼기들을, 다시는 꺼내지 않겠다는 결단으로 땅에 눌러 넣은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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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신을 섬기는 까닭은 내 욕망을 내 하나님처럼 섬기기 때문입니다. 우상이란 언제나 나의 가장 은밀한 탐욕이 종교적 언어를 빌려 입은 얼굴입니다. 그것은 가나안의 형상만이 아닙니다. 타인을 수단으로 삼아 내 안전을 확보하려는 충동, 공동체의 고통을 외면하고 나만의 성취를 쌓으려는 욕망, 거룩함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위선. 이 모든 것이 세겜의 상수리나무 아래 묻혀야 할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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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엘륄은 현대 기술 문명이 인간의 삶을 효율과 성과의 논리로 촘촘하게 재편하면서, 인간이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 논리의 노예가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강하게. 이 기술 문명의 신들은 지극히 세련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가족이 묻어야 했던 이방 신상이 오늘의 언어로 돌아온 것입니다. 엘륄은 이 거대한 흐름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그 흐름으로부터 진정한 의미에서 '떠남'이라고 말했습니다. 세겜을 떠나 벧엘로 향하는 야곱의 발걸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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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묻고 떠났다고 해서 삶이 곧 평온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벧엘을 떠나 에브랏으로 가는 길에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난산 끝에 숨을 거둡니다(창 35:16-19). 게다가 맏아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는 참담한 패륜을 저지릅니다(창 35:22). 신앙적 결단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찾아드는 이 끔찍한 상실과 가족의 수치를, 성경은 왜 이토록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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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신앙이 우리를 비극으로부터 면제해 준다는 값싼 위로를 거절하는 성경의 정직함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감옥의 냉기 속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값싼 은혜는 죄의 값을 치르지 않는 면죄부이며, 값비싼 은혜는 제자를 죽음으로 불러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이라고. 야곱의 길은 값비싼 은혜의 길이었습니다. 이방 신상을 묻고 벧엘에 제단을 쌓은 뒤에도, 그는 아내의 죽음 앞에 서야 했고 아들의 범죄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 길이 신앙의 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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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는 또 말했습니다. 교회는 타자를 위해 존재할 때 비로소 교회라고. 야곱이 걷는 이 험한 길은 오직 자기 혼자만의 구원을 위한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빚어지고, 그 민족을 통해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흘러가게 될 것이었습니다. 상처투성이의 가정, 실패로 얼룩진 그 공동체가 세상을 위한 그릇으로 빚어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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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릴케는 고백했습니다. "나를 낳아 준 어둠이여, 나는 불꽃보다 당신을 좋아한다. 어둠은 모든 것을 스스로 품고 있다. 나는 밤을 믿는다." 라헬의 무덤이 된 에브랏으로 가는 길, 르우벤의 치욕이 기록된 그 밤. 성경은 그 어둠을 지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어둠 속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시어 다시 한 번 축복의 언약을 선포하십니다(창 35:9-12). 어둠이 은혜의 무대가 되는 이 역설 앞에서 우리는 오래 머물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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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우리는 묵상에 관한 깊은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묵상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 지식을 빠르게 습득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내 마음의 평안을 확보하는 영적 테크닉도 아닙니다. 묵상이란 말씀이 내 몸을 통과하는 체험입니다. 내 안에 똬리를 튼 폭력과 탐욕의 짐을 말씀의 빛 앞에 정직하게 꺼내놓고, 그 낯선 말씀이 내 완악한 자아를 뚫고 지나가 나를 교정해 낼 때까지 기꺼이 앓고 몸부림치는 순종의 행위입니다. 비효율적으로, 서투르게, 끙끙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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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륄이 경고한 효율의 신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묵상은 그 자체로 저항입니다. 빠른 답을 거부하고, 즉각적인 위안을 미루며, 말씀 앞에서 긴 시간을 허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행위가 실은 가장 깊은 생명의 행위입니다. 인공지능이 수십만 편의 성경 주석을 순식간에 정리해 줄 수는 있어도, 야곱처럼 밤새 하나님과 씨름하며 환도뼈가 어긋나는 고통을 대신 감당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 씨름은 오직 내가, 직접, 온몸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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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의 전통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관상합니다. 서두르지 않고 본문 앞에 머뭅니다. 본문이 나를 읽도록 내어줍니다. 동방 교회의 헤시카즘 전통이 말하는 '고요함' 역시 이 지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는 폭풍이 지난 뒤 세미한 소리로 찾아오는 것처럼, 내 안의 소음이 가라앉고 나서야 들립니다. 함석헌 선생이 씨알의 영성으로 말씀하셨듯, 땅속의 씨앗이 어둠 속에서 껍질을 깨뜨리며 싹을 틔워 올리듯, 묵상 속에서 우리의 완악한 자아가 말씀에 의해 조용히 부서지며 새 생명으로 빚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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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부버는 진정한 만남을 나-너(I-Thou)의 관계라 불렀습니다. 상대를 목적으로 만나는 것, 그 사람의 전 존재를 향해 내 전 존재로 응답하는 것. 묵상이란 하나님과의 이 나-너의 만남입니다. 성경 본문을 내 필요를 위한 정보로 다루는 나-그것(I-It)의 관계가 아니라, 본문 안에서 나를 향해 말씀하시는 살아있는 하나님을 향해 내 전 존재로 응답하는 만남. 세겜의 상수리나무 아래 이방 신상을 묻는 행위가 바로 그 나-그것의 관계를 청산하는 결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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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오늘 이 본문이 우리에게 건네는 초대는 이것입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십시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세겜의 상수리나무 아래 무언가를 묻어야 합니다. 타인을 짓밟고 움켜쥔 세속의 전리품들, 내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붙들어 왔던 이기심의 신상들, 거룩함의 이름으로 이웃에게 휘둘렀던 폭력의 도구들. 그것들을 흙 속에 눌러 넣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여정에 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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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여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는 길가의 무덤을 만날 수도 있고, 가장 가까운 이의 수치스러운 소식을 들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어둠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나타나십니다. 냄새나고 찢겨진 우리의 비루한 현실 밑바닥까지 기꺼이 내려오시어, 그 치명적인 허물조차 당신의 보혈로 덮어 생명으로 엮어내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자비가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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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연약한 신앙 여정은 깊은 산속에 말없이 서 있는 거대한 상수리나무의 너른 품을 찾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고단한 생을 살아가며 온갖 탐욕의 찌꺼기와 부끄러운 폭력의 상처들을 그 나무뿌리 아래 남몰래 파묻고 돌아섭니다. 그러나 상수리나무는 자신의 발밑에 묻히는 그 독기 어린 것들을 책망하거나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깊은 땅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생명의 수액으로 그 모든 독성을 고요히 정화해 내며, 마침내 길 잃고 지친 순례자들에게 자신의 가지를 활짝 넓혀 가장 서늘하고 평온한 안식의 그늘을 내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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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이 자리가 잠시 세겜의 상수리나무 아래가 되기를 바랍니다.

억지로 내 상처를 완벽하게 포장하려 허둥대는 헛된 수고를 멈추십시오. 타인을 밟고 내 몫을 챙기려 했던 이기심의 신상들을 조용히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상처투성이인 나를 있는 그대로 품어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내 몸을 온전히 통과하도록, 묵상의 자리에 기꺼이 머무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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끙끙대도 좋습니다. 서툴러도 괜찮습니다. 빠른 답이 오지 않아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말씀 앞에서 오래 앓는 그 비효율적인 시간이, 실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가장 깊이 일하시는 시간입니다.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밤새 씨름하여 환도뼈가 어긋났을 때 비로소 새 이름을 얻었듯이, 우리도 말씀과의 그 고통스러운 씨름 끝에 새로운 존재로 빚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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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가 옥중서신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넘칠 때가 아니라 우리의 가장 약하고 부서진 자리에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가 완벽한 신앙인의 얼굴을 하고 당당히 나아갈 때가 아니라, 세겜의 수치를 등에 지고 두려움에 떨며 벧엘로 향하는 그 비루한 도피의 길 위에서, 하나님은 사방의 성읍들에 당신의 두려움을 내리시어 야곱을 친히 보호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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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 주간, 조용히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아직 묻지 못하고 손에 꼭 쥐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타인의 존엄을 밟으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그 무언가가 있습니까. 거룩함의 언어로 포장하였지만 실은 나의 탐욕과 두려움을 섬겨왔던 신상이 있습니까. 그것을 세겜의 상수리나무 아래 묻으십시오. 깊이, 다시 꺼내지 않을 만큼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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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말씀 앞에 앉으십시오. 오늘 밤, 혹은 내일 이른 아침, 창세기 35장을 천천히 다시 읽으십시오. 야곱의 두려움을 내 두려움으로, 라헬의 무덤 앞에 선 야곱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에게 나타나시어 축복하신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만나십시오. 서두르지 마십시오. 본문이 나를 읽도록, 그 말씀이 내 몸을 통과하도록, 기꺼이 그 자리에 머무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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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가 어둠을 믿는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 어둠 속에서 별빛을 믿습니다. 세겜의 상수리나무 아래 부끄러운 것들을 묻고 벧엘을 향해 걷는 그 밤길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별빛처럼 고요히 내려앉고 있습니다. 그 별빛 아래, 상처 많고 흠결 많은 우리 모두가 마침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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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것들을 묻고, 말씀 앞에 앓으며, 이웃의 곁을 내어주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빕니다. 그 순례의 길 위에 창조주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실 것입니다.그 별빛 아래, 상처 많고 흠결 많은 우리 모두가 마침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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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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