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4:18-31 날 선 칼을 내려놓고 용광로 앞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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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오후가 유리처럼 맑다. 바람이 연초록 잎사귀들을 어루만지며 지나가고, 그 사이로 햇살이 부서져 땅 위에 흩어진다. 이런 날, 사람은 문득 자신이 지금 얼마나 오래된 이야기 안에 살고 있는지를 잊어버린다. 계절은 돌아오고, 아이들은 웃고, 일상은 바쁘게 흘러간다. 그러나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들은, 오늘도 조용히 우리 안에서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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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4장의 세겜 성 이야기는 그래서 낯설지 않다. 디나가 수치를 당하고, 하몰과 세겜이 통혼을 제안하고, 야곱의 아들들이 할례를 조건으로 내세우고, 그리고 제삼일에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든다. 고통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하나님의 가장 거룩한 표지를 손에 쥐고 저지른 참상이다. 할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몸에 새기는 그 신성한 예식이, 마취제가 되고 함정이 되고 학살의 도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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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러나 우리는 안다. 이런 일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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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폭력의 역사는 너무 길어서 다 읽을 수가 없다. 십자군의 검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새기고 있었다. 이단 심문소의 고문 도구들은 진리를 수호한다는 명목 아래 사용되었다. 가장 거룩하다고 믿는 것이 가장 잔혹한 흉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34장이 오늘 우리에게 들이미는 서늘한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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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엘륄은 기술 사회를 분석하면서 인간이 수단에 종속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날카롭게 포착했다. 효율이라는 수단이 목적이 되고, 방법론이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할 때,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그 일을 시작했는지를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시므온과 레위는 여동생의 명예를 지킨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챙긴 것은 양과 소와 나귀와 재물과 포로들이었다. 명분은 정의였지만 실상은 약탈이었다. 거룩한 수단이 탐욕의 도구로 둔갑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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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깊은 슬픔은 아버지 야곱에게서 온다. 이 참상 앞에서 그는 아들들의 잔혹함에 분노하지 않았고, 디나의 상처를 먼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는 말한다.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나를. 나를. 나와 내 집이. 세 번이나 자신을 말한다. 이웃의 죽음 앞에서, 딸의 눈물 앞에서, 그의 시선은 오직 자기 생존을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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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는 값싼 은혜를 경계했다. 값비싼 은혜는 십자가 앞에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고, 값싼 은혜는 은혜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안락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야곱의 공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공포가 이웃을 향한 마지막 연민마저 닫아버렸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인간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 구부러진 존재의 뒤틀림이 된다. 본회퍼가 말했듯, 교회는 타자를 위한 교회일 때만 교회이고, 신앙인은 타자를 위해 존재할 때만 신앙인이다. 그 문이 닫히는 순간, 남는 것은 종교라는 껍데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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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어두운 본문 앞에서, 우리는 묵상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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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의 문자를 뒤지는 일이 아니다. 묵상은 자신의 분노와 탐욕이 얼마나 거룩한 언어로 포장될 수 있는지를, 그 간격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일이다. 렉시오 디비나의 오랜 전통은 성경을 읽되 서두르지 말 것을 가르쳤다.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관상하는 그 느린 호흡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본문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본문이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내어주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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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시카즘의 수도사들은 내면의 고요를 찾아 광야로 들어갔다. 그 고요는 소음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었다. 자신 안의 소음, 즉 정당화하고 싶은 욕망, 복수하고 싶은 충동, 살아남아야 한다는 공포의 소음을 듣기 위한 침묵이었다. 함석헌은 씨알의 고난 속에서 인간이 비로소 자신의 뿌리와 만난다고 했다. 고통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것이었다. 묵상은 그 통과의 길에서 혼자가 아님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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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는 묵상을 직조의 비유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삶은 영원이라는 날실과 시간이라는 씨실로 짜는 무늬라고.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까닭은 삶의 날실을 가지런히 하기 위함이라고. 시므온과 레위는 분노와 탐욕이라는 씨실로 세겜 성의 역사 위에 핏빛 무늬를 새겼다. 그리고 야곱은 두려움이라는 씨실로 자신의 삶을 잔뜩 오그라들인 채 짰다. 그러나 날실은 끊어지지 않았다. 이 끔찍한 이야기 이후에도 하나님은 야곱을 벧엘로 부르시고, 다시 그 가문을 통해 당신의 구원의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망가진 씨실을 품어내는 날실의 끈기, 그것이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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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우리는 잠시 멈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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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어떤 칼을 쥐고 있는가. 종교적 확신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라는 이름으로, 혹은 공동체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날을 세워두고 있는 칼이 없는가. 그 칼로 상처를 낸 사람이 없는가. 내 신앙의 열심이 누군가를 베어버린 적은 없는가. 야곱처럼, 세상이 무서워 문을 닫아걸고 이웃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는 곳에 숨어버린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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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들은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그 질문 앞에 잠시 머무는 것으로 충분하다. 묵상은 그렇게 시작된다. 빠른 답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질문 앞에 오래 앉아 있는 용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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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 여정은 어쩌면 차갑게 벼려진 칼을 내려놓고 용광로 앞에 서는 것인지도 모른다. 칼은 나를 지키고 타인을 베기 위해 날카롭게 단련된다. 그러나 용광로는 그 단단히 굳어버린 것을 녹인다. 하나님은 당신의 뜨거운 은총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거기서 우리의 뾰족한 자아는 녹아내리고, 이웃을 향해 열린 그릇으로 다시 빚어진다. 마르틴 부버가 말했듯, 나는 너를 통해 비로소 나가 된다. 이웃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온전한 자아가 아니라 더 깊이 고립된 반쪽짜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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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4장은 하나님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도, 개입도 보이지 않는다. 이 침묵이 무섭다. 그러나 그 침묵이 포기가 아님을 우리는 이후의 이야기를 통해 안다. 하나님은 이 병든 가정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 비루함과 잔혹함과 비겁함을 다 아시면서도, 그 안에서 당신의 약속을 이어가셨다. 이것이 맹렬한 은혜다. 우리가 아름다워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이 끔찍한 모습 그대로 붙들려 천천히 변해가는 것, 그것이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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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 주간, 당신 손 안에 있는 칼이 무엇인지 조용히 물어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을 자리를 찾기를 바란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단번에 놓이지 않아도 된다. 다만 용광로 앞으로 한 걸음씩 다가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영원이라는 날실은 오늘도 드리워져 있다. 우리의 얼룩진 씨실을 그 위에 올려놓는 것, 그것이 묵상이고, 그것이 기도이며, 그것이 결국 우리 삶이 아름다운 무늬가 되어가는 길이다.영원이라는 날실은 오늘도 드리워져 있다. 우리의 얼룩진 씨실을 그 위에 올려놓는 것, 그것이 묵상이고, 그것이 기도이며, 그것이 결국 우리 삶이 아름다운 무늬가 되어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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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오후, 연초록 잎사귀들이 여전히 바람에 흔들린다. 이 다사로운 계절에, 잠시 멈추어 서기를 권한다. 손에 쥔 것들을 내려놓고, 당신을 가장 오래 사랑하신 분의 용광로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기를. 그 뜨거운 은총 안에서 우리의 날카롭고 차가운 자아가 녹아내리고, 이웃에게 생명의 온기를 전할 수 있는 둥근 그릇으로 다시 빚어지기를. 영원이라는 날실은 오늘도 끊어지지 않고 드리워져 있다. 우리의 씨실이 아무리 얼룩지고 엉켜 있어도, 그 날실 위에 올려놓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기를. 하나님은 그 무늬마저 당신의 손으로 어루만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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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