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3:1-20 원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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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이란, 이웃을 적으로 돌리던 이기적 무장을 해제하고,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서 내 삶의 자리를 찾아가는 묵상을 통해, 마침내 원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발견하며 부둥켜안는 화해의 은총을 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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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했을 때, 그것이 과장이나 수사가 아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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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 같사오며."(창 3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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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형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으로 빼앗고, 눈먼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훔쳤으며, 이십 년 전 형의 분노를 피해 밤길을 도망쳤던 사람입니다. 그 형이 사백 명의 장정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에 자식들과 아내들을 앞세우고 자신은 뒤에 남았던 사람입니다. 그 야곱이,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얍복 강가의 씨름이 있었습니다. 밤새 알 수 없는 이와 씨름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졌습니다. 그 씨름이 누구의 주도로 시작되었는지, 저는 하나님 쪽에서 먼저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도망자가 기도하러 홀로 남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서늘한 강가의 도망자를 찾아오셔서 먼저 씨름을 거신 것입니다. 야곱이 변하지 않으면 에서와의 화해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물로 형의 분노를 덮으려 했지만,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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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도뼈가 꺾였습니다. 야곱이 서고 달릴 수 있게 하던 힘의 중심이 무너졌습니다. 위기가 닥치면 언제든 타인을 두고 혼자 달아날 수 있다고 믿었던 그 능력이, 그 밤에 꺾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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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야곱은 절뚝이며 걸었습니다. 형을 향해. 도망가지 않고, 가족을 방패로 삼지 않고, 자신이 앞장서서 걸었습니다. 일곱 번 땅에 몸을 굽히며 걸었습니다(창 33:3). 화려한 예물을 뽐내는 당당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다리를 절며, 밤새 씨름의 흔적을 온몸에 지닌 채 걸어오는 상처 입은 동생의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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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가 달려왔습니다. 복수하러 달려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껴안으러 달려왔습니다. 목을 어긋맞추고 울었습니다(창 33:4). 무장한 사백 명이 눈물의 군중이 되었습니다. 살육이 예고되었던 그 들판이 환대의 성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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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반전이 왜 일어났는지를 생각합니다. 에서의 마음이 어떻게 돌아선 것입니까. 완벽하게 준비된 야곱이 왔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절뚝이는 야곱이 왔기 때문입니다. 뻣뻣하게 서 있을 때는 닿지 못했던 것이, 무릎이 꺾인 사람 앞에서 열렸습니다. 강한 동생이 아니라 상처 입은 동생 앞에서, 에서의 굳었던 마음이 허물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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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강할 때 화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준비되었을 때, 적절한 말을 갖추었을 때, 더 나은 조건을 만들었을 때 화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다른 것을 말합니다. 화해는 우리가 약해진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환도뼈가 부러진 자리에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게 된 자리에서, 비로소 진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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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십자가의 논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강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상처받을 수 있는 몸으로 오셨습니다. 부러질 수 있는 몸으로 오셔서, 실제로 부러지심으로써,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얍복 나루의 씨름에는 이미 십자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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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타자의 얼굴이야말로 무한자가 자신을 계시하는 자리라고. 우리는 신비한 체험이나 종교적 황홀경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상처 입혔던 형, 두려워했던 형, 이십 년을 피해온 형의 얼굴에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내가 외면하고 도망쳐 온 그 얼굴 위에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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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영 목사님은 묵상을 가리켜 "그분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세상이 들려준 이야기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남을 밟고 올라서야 살아남는다는 이야기, 약한 자는 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야기, 원수는 무너뜨려야 한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 속에서 이웃은 경쟁자이거나 적입니다.
묵상이란 그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야기, 원수마저 품으시는 그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 삶의 자리를 그 이야기 안에 두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 안에서 이웃은 다른 얼굴을 가집니다. 경쟁자가 아니라, 내가 화해해야 할 사람. 적이 아니라, 그 얼굴 위에 하나님이 계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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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십 년의 원망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곱도 하루아침에 변한 것이 아닙니다. 벧엘의 사다리가 있었고, 우물가의 눈물이 있었고, 칠 년의 노동이 있었고, 얍복 나루의 씨름이 있었습니다. 그 긴 여정 끝에,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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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킨타이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떤 이야기 속에서 내 자리를 찾을 수 있는가를 먼저 알아야,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고.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야기가 우리의 삶을 결정합니다. 약육강식의 이야기 속에 있으면 이웃이 적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화해 이야기 속에 있으면 원수의 얼굴에서 신성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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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에서가 있습니까. 이십 년은 아니어도, 오래 피해온 얼굴이 있습니까. 그 얼굴을 생각할 때 여전히 두렵거나 분한 마음이 드십니까. 야곱에게도 그 얼굴이 있었습니다. 사백 명을 이끌고 오는 그 얼굴이 두려워 가족을 앞세웠습니다. 그러나 환도뼈가 꺾인 후 야곱은 앞으로 걸었습니다. 절뚝이면서도, 걸었습니다. 그 걸음 끝에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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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치유되고 나서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절뚝이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걸음이 묵상이고, 그것이 신앙입니다. 이번 한 주간, 피해온 얼굴을 향해 한 걸음만 내딛어 보시기 바랍니다. 절뚝거려도 괜찮습니다. 야곱이 그랬습니다. 그 절뚝이는 걸음 끝에, 하나님의 얼굴이 있습니다. 원수의 얼굴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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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굽쇠를 생각합니다. 두 개의 소리굽쇠 중 하나를 두드리면, 건드리지 않은 다른 쪽도 울리기 시작합니다. 같은 주파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공명입니다. 야곱이 환도뼈가 꺾인 채 형을 향해 걸어갔을 때, 에서 안에서도 무언가가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이 다가올 때, 우리 안에서도 상처 입었던 기억이 울립니다. 그 떨림이 마음을 엽니다. 묵상이란 그 주파수를 찾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서 내 고유한 떨림을 찾아, 이웃의 떨림과 공명하기 시작하는 일. 그때 오래 단절되었던 것들이 소리 없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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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