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3:01-20 얍복강을 건넌 절뚝거림과 화해의 포옹, 그리고 세겜에 멈춰 선 미완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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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형 에서가 400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습니다. 야곱은 가족들을 여종, 레아, 라헬의 순서로 나누어 뒤에 세우고, 자신은 그들 맨 앞으로 나아가 일곱 번 땅에 굽히며 형에게 다가갑니다(1-3절). 에서는 달려와 야곱을 목 안고 입 맞추며 함께 웁니다(4절). 야곱은 아내와 자식들을 인사시키고, 자신이 준비한 예물을 형에게 억지로 강권하며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 고백합니다(5-11절). 에서가 함께 동행하자고 제안하지만, 야곱은 가축과 어린 자식들의 연약함을 핑계로 정중히 거절하며 세일로 따라가겠다고 약속합니다(12-16절). 그러나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야곱은 약속과 달리 숙곳에 이르러 집과 우릿간을 짓고, 가나안 땅 세겜에 평안히 이르러 땅을 사고 제단을 쌓아 '엘엘로헤이스라엘(이스라엘의 하나님, 하나님)'이라 부릅니다(17-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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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문화적 배경 : 고대 근동의 외교 문서(아마르나 문서 등)를 보면, 종주(주군) 앞에서 신하(봉신)가 ‘일곱 번 엎드려 절하는 것’은 철저한 복종과 항복을 의미하는 전형적인 외교 의식입니다. 야곱이 건넨 예물(히브리어 ‘민하’, 조공) 역시 20년 전 훔쳐 간 장자의 ‘축복(베라카)’을 물질적으로나마 되돌려주려는 배상의 성격을 지닙니다.
# 신학적·문학적 배경 : 32장의 ‘브니엘(하나님의 얼굴)’ 체험이 33장의 ‘형의 얼굴’과 교차합니다. 하나님을 대면하고도 살아남은 야곱은, 자신을 죽이려던 형의 용서하는 얼굴 속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얼굴(은혜)을 발견합니다. 인간의 용서와 수용이 곧 하나님의 은혜가 육화되는 통로임을 보여주는 장엄한 신학적 서사입니다.
# 송민원의 '수평적 읽기' 관점 : 본문은 야곱의 내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치독한 ‘편애의 서열화’(라헬을 가장 안전한 맨 뒤에 둠)와 ‘세속적 타협’(세일로 간다며 속이고 숙곳과 세겜에 안주함)을 고발합니다. 얍복강을 건넜다고 해서 사람이 하루아침에 완벽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평적 읽기는, 야곱의 얄팍한 핑계와 멈칫거림 속에서도 먼저 달려와 목을 껴안는 에서(피해자)의 조건 없는 환대를 통해, 관계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역설적인 샬롬을 읽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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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절뚝거리며 앞장서는 흠결 많은 가장 : 편애의 서열 속에서도 첫발을 내딛다
하나님은 우리의 오랜 죄성(편애와 이기심)이 단번에 사라지지 않는 연약함을 아시면서도,환도뼈가 부러진 채 십자가를 향해 앞장서 걷도록 우리의 영혼을 견인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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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눈을 들어보니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습니다. 야곱은 자식들을 여종들과 레아와 라헬에게 각각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맨 앞에,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라헬과 요셉은 맨 뒤에 둡니다. 그리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형 에서에게로 다가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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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은 씁쓸하면서도 감동적인 인간의 실존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었지만, 현실의 400명 군대 앞에서 야곱의 오랜 본성인 '편애와 차별'은 고스란히 작동합니다. 목숨이 위태로운 순서대로 덜 사랑하는 여종의 자식들을 총알받이로 맨 앞에 세우고, 가장 사랑하는 라헬과 요셉은 가장 안전한 후방에 배치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고 인간의 뿌리 깊은 이기적 구조가 하루아침에 성화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32장에서 야곱은 처자식과 재물을 모두 앞서 보내고 자신은 '맨 뒤(후방)'에 숨어 있던 비겁자였습니다. 그러나 환도뼈가 위골된 이 아침, 야곱은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가족들 '맨 앞'으로 나아갑니다. '일곱 번 엎드려 절한다'는 것은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철저한 자기 비하이자 죽음을 각오한 항복입니다. 고대 근동 외교 문서에서 '일곱 번 엎드림'은 완전한 복종과 무장해제를 상징하는 최고급 경의 표현이었습니다. 편애의 한계는 여전하지만, 그는 더 이상 타인을 인간 방패로 삼지 않고, 자신이 뿌린 죗값을 스스로 감당하기 위해 고통의 최전선으로 걸어 들어가는 성숙한 가장의 첫발을 내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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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은혜를 받고 직분을 받아도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는 세속적인 서열화, 누군가를 차별하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만 편애하는 죄성 때문에 좌절합니다. 그러나 완벽해져야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영적 성숙은 내 안의 찌질함과 약점을 부둥켜안은 채로, 내 가족과 교회가 직면한 위기의 '맨 앞'에 서서 십자가의 고통을 짊어지는 데 있습니다. 비판의 뒤로 숨지 마십시오. 환도뼈가 부러져 절뚝거리더라도 책임의 자리 맨 앞으로 걸어 나갈 때, 하나님은 그 초라한 걸음을 통해 가장 위대한 평화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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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1절 원수의 얼굴에서 발견한 브니엘(하나님의 얼굴) : 피해자의 포옹이 완성하는 화해
하나님은 내가 훔치고 상처 준 이웃의 조건 없는 용서와 포옹을 통해서,우리에게 구원과 화해를 베푸시는 '은혜의 얼굴(브니엘)'로 다가오시는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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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가 달려와서 야곱을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입 맞추고, 함께 웁니다.' 에서가 야곱의 가족들과 인사를 나눈 후, 야곱이 가져온 예물을 처음에는 거절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혜의 표시(원어 '베라카', 축복)로 이 예물을 받아달라고 강권하여 결국 에서가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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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최고의 반전이자 감동적인 화해의 장면입니다. 야곱은 형의 마음을 돈(짐승 580마리)으로 매수하려 했지만, 정작 화해의 기적을 만든 것은 기만자 야곱의 뇌물이 아니라 피해자 에서의 조건 없는 환대였습니다. 에서는 400명의 군대를 세워둔 채 무장해제하고 '달려와서, 안고, 목을 맞추고, 입 맞추며' 웁니다. 이 네 개의 연속된 동사는 훗날 누가복음 15장에서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수평적으로 상처받은 피해자가, 자격 없는 가해자에게 베푸는 압도적인 선제적 은혜입니다.
이 용서 앞에서 야곱은 형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브니엘)'과 같다고 고백합니다. 32장에서 자격 없는 자를 죽이지 않고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브니엘)가, 33장에서는 자신을 찢어 죽일 권리가 있음에도 안아주는 형의 얼굴을 통해 육화(Incarnation)된 것입니다. 아울러 야곱이 형에게 바친 예물은 단순한 조공이 아니라 원어에서 '베라카(축복)'로 표현됩니다. 20년 전 아버지를 속이고 형에게서 훔쳐 간 그 '축복'을, 이제 겸손히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는 진정한 배상과 회개의 행위입니다. 화해는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돌려줌'에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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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가해자가 승리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 나라의 샬롬은 '상처 입은 피해자의 용서'를 통해 완성됩니다. 나에게 깊은 상처를 준 가족, 직장 동료, 교회의 지체들이 있습니까? 내게는 그들을 찌를 400명의 명분과 군대가 있지만, 에서처럼 무장을 해제하고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그들을 끌어안을 수 있습니까? 반대로, 내가 누군가를 속이고 빼앗아 성공을 이루었다면, 야곱처럼 내가 부당하게 얻은 '축복'을 되돌려주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배상이 있어야 합니다. 화해는 값싼 입술의 사과가 아니라, 피해자의 넉넉한 환대와 가해자의 정직한 배상이 만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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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6절 정중한 거절과 건강한 거리두기 : 융합이 아닌 각자의 자리로
하나님은 무조건 하나 됨을 강요하는 세상의 폭력 속에서, 서로의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며샬롬을 유지하도록 건강한 '경계'를 허락하시는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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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가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고 제안하지만, 야곱은 자식들이 연약하고 양과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어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떼가 다 죽을 것이라며 정중히 거절합니다. '내 주(형)는 앞서가소서, 나는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뵈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에서가 종 몇 명을 머물게 하겠다는 제안조차 야곱은 거절하고, 결국 에서는 세일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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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독자가 이 대목에서 야곱이 세일로 가겠다고 약속해 놓고 다른 길(숙곳)로 빠진 것을 두고 또다시 형을 속인 야곱의 교활함으로 비판합니다. 물론 야곱 내면에 아직 형을 향한 온전한 신뢰가 형성되지 않은 두려움이 남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수평적 읽기 관점에서 이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 매우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경계 설정'입니다. 무조건적인 용서와 눈물의 포옹을 나누었다고 해서, 이질적인 두 집단이 당장 뒤섞여 동거할 수는 없습니다. 400명의 군대를 거느린 에서의 세속적 문화와, 유약한 가축과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벧엘의 언약을 지켜야 할 야곱의 문화는 삶의 보폭과 속도, 지향하는 가치가 다릅니다. 억지로 동행했다가는 다시 갈등이 재발할 것이 자명합니다.
야곱이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떼가 다 죽으리라'고 한 이 말은, 단순한 핑계가 아니라 지혜로운 통찰입니다. 진정한 샬롬은 때로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각자의 길을 걷는 데서 지켜집니다. 얍복강의 씨름이 갈등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폭력을 관계 안에 가두어 두지 않는 경계를 확보한 것입니다. 31장에서 라반과 세운 '갈르엣과 미스바'처럼, 야곱은 에서와도 건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새로이 시작된 화해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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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흔히 '용서'와 '관계의 밀착'을 혼동합니다. 용서했으니 무조건 다시 친하게 지내고, 동업을 하고, 함께 사역해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과거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받은 관계라면, 용서의 포옹 이후에는 반드시 건강한 거리두기가 필요합니다. 속도와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 무리하게 보폭을 맞추려다 보면 내 영혼의 어린것들과 신앙의 양 떼가 다 죽습니다. 내 신앙의 순결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세상(에서)의 호의와 동행 제안을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또 다른 비극을 막고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성숙한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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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0절 세겜에 멈춰 선 안주와 미완의 제단 : 벧엘로 가야 할 순례자가 세겜에 땅을 사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 본향을 잊고 세상의 안락함(세겜)에 안주할 때조차,우리가 세운 미완성의 제단을 받으시며 궁극적 부르심의 자리로 이끄시기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인내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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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세일로 돌아갔으나, 야곱은 세일이 아닌 요단강 동편 '숙곳(초막들)'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어 그곳 이름을 숙곳이라 부릅니다. 이후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땅을 산 후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엘엘로헤이스라엘(이스라엘의 하나님,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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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여정은 벧엘로 향해야 마땅했습니다. 20년 전 그가 서원했던 자리(창 28:20-22), '나를 평안히 돌아오게 하시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 했던 그 언약의 목적지는 세겜이 아니라 '벧엘'이었습니다. 그러나 형의 위협이 사라지자 야곱은 영적 긴장을 늦춥니다. 숙곳에 머물며 '집(항구적 거주지)'을 짓는 것, 그것은 순례자가 순례를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경제적·상업적 중심지였던 세겜에 땅을 사고 주저앉습니다.
척박한 신앙의 자리(벧엘)보다 눈에 보기 좋고 살기 편한 세속적 도시(세겜)와 타협하여 안주하려는 영적 나태함입니다. 결국 이 세겜에서의 타협과 지체는 다음 장(34장)에서 딸 디나가 강간당하고 아들들이 학살을 저지르는 참혹한 비극의 씨앗이 됩니다. 영적 안주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세겜에 쌓은 제단 '엘엘로헤이스라엘'을 통해 야곱이 드디어 하나님을 조상의 하나님이 아닌 '나(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된 그 절반의 성장조차 묵묵히 받으시며, 기어이 그를 벧엘로 이끌어내실 준비를 하십니다. 완성되지 않은 제단이지만, 하나님은 그 위에서도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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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가 지나가면 우리의 본성은 어김없이 숙곳과 세겜(세상의 안락함)에 집과 우릿간을 짓고 안주하려 합니다. 병이 낫게 해 주시면, 사업을 회복시켜 주시면 벧엘로 올라가 온전한 헌신을 드리겠다고 눈물로 서원해 놓고, 정작 문제가 해결되면 생활의 편리를 핑계로 신앙의 변두리(세겜)에 머물며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겜의 머무름은 필연적으로 영적 위기(34장의 비극)를 초래합니다. 지금 당신이 장막을 치고 있는 곳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벧엘입니까, 아니면 적당히 종교 생활을 즐기며 세상의 부를 누리는 세겜입니까? 미완성의 제단을 허물고, 오늘 당장 하나님과 처음 언약을 맺었던 그 거룩한 벧엘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영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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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의 연약한 절뚝거림 속에서도 먼저 다가와
은혜의 얼굴로 안아주시는 화해의 하나님 아버지,
원수 같은 형을 마주하는 공포 속에서도
여전히 내가 덜 사랑하는 자식들을 맨 앞에
방패막이로 세우려 했던 야곱의 치독한 이기심이,
바로 내 가족과 이웃을 대하는
저의 부끄러운 민낯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하면서도
관계 속에서 여전히 서열을 매기고
편애를 멈추지 못하는 우리의 일그러진 본성을
십자가의 보혈로 덮어 주시옵소서.
그럼에도 비겁한 후방에서 기어 나와
위기의 맨 앞에 서기 위해 절뚝거리며 발을 내딛는
우리의 그 초라한 첫걸음을 받아주시옵소서.
주님, 야곱의 얄팍한 뇌물 작전에도 불구하고
먼저 달려와 목을 껴안고 입 맞추며 울어준
에서의 환대 속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조건 없는 용서를 봅니다.
상처 입은 자의 용서가 어떻게
가해자를 살려내는 하나님의 얼굴(브니엘)이 되는지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 광양사랑의교회 공동체 안에
이토록 가슴 저린 용서와 포옹,
그리고 부당하게 취한 것을 정직하게 되돌려주는
'베라카(축복)의 배상'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동시에 무조건적인 융합이 아닌 건강한 거리 속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지혜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주님, 위기가 지나간 후 벧엘로 올라가야 할 서원을 잊은 채,
눈에 보기 좋은 세겜에 땅을 사고 안주하려 했던
야곱의 세속적인 타협이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음을 두려워합니다.
'엘엘로헤이스라엘'을 고백하면서도 세겜에 머무는 절반의 신앙을 넘어,
미완의 제단에서 일어나 온전한 부르심의 자리인
벧엘을 향해 끝까지 전진하는
거룩한 순례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원수 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팔을 벌려
영원한 평화를 이뤄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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