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1:17-35 우상의 안장 위에 앉은 절망과 도망자 : 얽힌 속임수 사이를 가르시는 하나님의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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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라반 몰래 아내와 자식들,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가나안을 향해 도주합니다. 이때 라헬은 아버지 라반의 '드라빔(테라핌, תְּרָפִים)', 가정 수호신을 도둑질합니다(17-21절). 삼 일 만에 도주 사실을 안 라반이 칠 일을 추격하여 야곱을 따라잡지만, 그 전날 밤 하나님이 라반의 꿈에 나타나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십니다(22-25절). 라반은 야곱을 만나 왜 몰래 도망쳐서 딸들과 손자들을 보낼 기회를 빼앗았는지, 그리고 왜 자신의 '신(드라빔)'을 훔쳤는지 위선적으로 힐문합니다(26-30절). 야곱은 두려움 때문에 몰래 떠났다고 변명하며, 누구에게서든 신상을 찾으면 그는 죽을 것이라는 경솔한 저주의 맹세를 합니다(31-32절). 라반이 모든 장막을 뒤지나, 라헬이 드라빔을 낙타 안장 아래 넣고 그 위에 앉아 '여성의 생리'를 핑계로 일어나지 않음으로써 아버지를 속이고 위기를 모면합니다(33-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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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문화적 배경 : 고대 근동 사회(누지 문서 등)에서 '드라빔(테라핌, תְּרָפִים)', 은 집안을 지키는 수호신일 뿐만 아니라 가문의 상속권과 우두머리로서의 법적 권리를 보장하는 일종의 '소유권 증서' 역할을 했습니다. 라헬이 이를 훔친 것은 아버지의 재산에 대한 자신의 몫을 확보하려는 경제적·세속적 동기였습니다. 또한 당시 여성의 생리 기간은 '부정(不淨, 투메아, טֻמְאָה)', 한 상태로 간주되었으므로, 라헬이 그 상태로 신상 위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고대 근동의 우상들이 얼마나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인지를 극적으로 조롱하는 문학적 장치입니다.
# 신학적 배경 : 신학적으로 본문은 속고 속이는 기만의 연속입니다. 야곱은 라반의 '마음을 훔치고(욕남 야아코브 에트 레브 라반, וַיִּגְנֹב יַעֲקֹב אֶת לֵב לָבָן)' 도망하며, 라헬은 아버지의 '신을 훔치고', 라반은 위선적인 핑계로 야곱을 압박합니다. 거룩한 벧엘로 돌아가는 여정임에도 이들의 짐짝 속에는 여전히 세상의 우상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수평적 관계의 총체적 난국 속에서도, 하나님은 추격자 라반의 꿈에 나타나 그를 막아서심으로써 당신의 백성을 완벽하게 보호하시는 섭리자로 등장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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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1절 도망자의 두려움과 은밀한 우상(드라빔) : 짐짝 속에 숨겨진 라반의 딸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한 믿음 없이 두려움과 세상의 썩은 동아줄(우상)을 움켜쥐고내딛는 불완전한 걸음조차도 약속을 향한 여정으로 품어주시는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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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자식들과 아내들을 낙타에 태우고 라반의 집에서 얻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출발합니다. 마침 라반이 양 털을 깎으러 간 사이에, 라헬은 아버지의 '드라빔(테라핌, תְּרָפִים)', 을 도둑질합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알리지 않고 '가만히 도망치되(욕남 야아코브 에트 레브 라반, וַיִּגְנֹב יַעֲקֹב אֶת לֵב לָבָן, 라반의 마음을 훔치다)', 유브라데 강을 건너 길르앗 산을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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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겉으로는 당당한 구원 여정처럼 보이지만, 수평적 읽기에서 드러나는 이 가정의 내면은 철저한 두려움과 기만입니다. 야곱의 도주를 묘사하는 히브리어 원문은 의미심장합니다. '욕남 야아코브 에트 레브 라반(וַיִּגְנֹב יַעֲקֹב אֶת לֵב לָבָן)', 직역하면 '야곱이 라반의 마음을 훔쳤다'입니다. 야곱이 도망친 것은 단순한 몸의 이동이 아니라, 라반의 '심리적 동의'를 속여 가로챈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13절) 당당하게 장인과 작별하지 못하고 몰래 도망치는 야곱 속에는 아직 '도망자의 두려움(Fear of Fugitive)'이 20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라헬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구원 여정에 합류하면서 아버지의 드라빔을 훔칩니다. 드라빔은 단순한 종교적 우상이 아니라 부의 상속을 보장하는 고대 사회의 '경제적 증서'입니다. 라헬은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돈을 다 먹었다'고 분노했지만(15절), 결국 아버지 라반과 똑같이 물질적 상속에 집착하는 '라반의 딸(Daughter of Laban)'로서의 세속적 본성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몸은 약속의 땅으로 향하지만, 짐짝 속에는 세상의 우상이,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가득한 혼합주의적 신앙(Syncretism)의 전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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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상(라반의 집)을 떠나 영적 가나안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짐짝(마음)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라헬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 삶과 미래를 지켜줄 '나만의 드라빔'(부동산, 통장, 인맥, 학벌, 자식의 성공)을 몰래 숨겨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가치관과 결별하겠다고 찬양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세상의 방법으로 이익을 확보하려는 얄팍한 이중성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내 내면에 숨겨진 현대판 드라빔을 십자가 앞에 내어놓고 깨뜨려야 합니다. 내 삶을 지키는 것은 장막 깊숙이 숨겨둔 드라빔이 아니라, 벧엘에서 만나주신 언약의 하나님 한 분뿐임을 기억하며 당당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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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5절 폭력적 추격과 하나님의 방어막 : 야곱이 잠든 밤, 대적의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
하나님은 위기에 처한 당신의 언약 백성을 맹수처럼 쫓는 세상의 폭력을 향해'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하시며 친히 방패가 되어주시는 전능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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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일 만에 야곱의 도주를 안 라반이 그의 형제들을 거느리고 '칠 일 길(데렉 쉬브아트 야밈, דֶּרֶךְ שִׁבְעַת יָמִים)', 을 추격하여 길르앗 산에서 야곱을 따라잡습니다. 그러나 그 전날 밤,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의 꿈에 현몽하여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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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무리는 노약자와 가축이 있어 이동 속도가 느렸습니다. '칠 일 길(데렉 쉬브아트 야밈)'을 단숨에 따라잡은 라반의 기동력은 압도적이었습니다. 라반은 야곱의 모든 소유와 딸들을 강제로 빼앗을 힘과 명분이 있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을 맹렬히 추격해오던 바로의 마차 군대(출 14:9)처럼, 인간의 수평적 능력으로 볼 때 야곱은 완벽한 독안에 든 쥐였습니다. 그러나 라반이 야곱을 치기 바로 전날 밤,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수직적 개입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경고 '히샤메르 레카(הִשָּׁמֶר לְךָ, 너는 스스로 삼가라)',는 히브리어에서 가장 강도 높은 경고의 형식입니다. 이 표현은 신명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삼가라'고 엄고하실 때(신 4:9, 6:12) 동일하게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라반의 꿈에 나타나시어 당신의 언약 백성을 향한 어떠한 폭력도 용납하지 않으심을 선언하셨습니다.
야곱은 몰래 도망친 비겁자였고, 그 아내는 우상을 훔친 도둑이었습니다.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야곱 일행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3절)'고 하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친히 방어막이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완전함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우리의 불완전함을 덮으시는 맹렬한 보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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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때로 우리의 약점이나 실수를 빌미로 맹수처럼 우리를 추격해 옵니다. '이제는 꼼짝없이 당하겠구나' 싶은 막다른 길에 몰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절망하지 않을 이유는, 나를 쫓는 세상의 권력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서 내 등 뒤에 서서 나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알지도 못하는 밤에 하나님은 이미 라반의 꿈에 나타나 상황을 통제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떨며 밤을 지새울 때, 우리를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시 121:4) 우리의 대적을 막아서십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위해 친히 싸우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보호를 전적으로 신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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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32절 라반의 위선과 야곱의 치명적 맹세 : 가족애로 포장된 탐욕과 경솔한 입술
하나님은 우리가 함부로 내뱉은 경솔한 맹세와 가족 간의 소통 부재로 인해파국을 맞이할 뻔한 순간에도, 침묵 속에서 우리의 치명적인 실수를 덮어주시는 긍휼의 아버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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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반은 야곱을 만나 '왜 나를 속이고 딸들을 칼에 사로잡힌 자같이 끌고 갔느냐, 내게 알렸다면 기쁨과 노래로 보냈을 것'이라며 위선적으로 힐문합니다. '하나님이 막으셔서 야곱을 해치지는 않겠지만 왜 내 '신(엘로하이, אֱלֹהַי)', 을 도둑질했느냐'고 다그칩니다. 야곱은 아내들을 강제로 빼앗길까 두려워 몰래 떠났다고 변명하며,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로 이흐예, לֹא יִחְיֶה)', 이라는 치명적인 저주의 맹세를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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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적 읽기의 정수가 드러나는 기막힌 대화입니다. 라반은 딸들을 노동력 착취의 도구로 팔아넘긴 냉혹한 자본가였음에도, 지금은 '딸들과 손자들을 사랑하는 자애로운 할아버지'로 둔갑합니다. '음악과 축제'로 너희를 보냈을 텐데'라는 그의 말은 철저한 위선입니다. 권력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폭력을 아름다운 명분과 가족애로 포장하는 데 능숙합니다. 라반은 결국 자신의 본심, 즉 '잃어버린 재산의 권리(드라빔)'에 대한 집착을 폭로합니다.
반면 야곱의 반응은 처참합니다. 야곱은 아내 라헬이 드라빔을 훔친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이 가정 내에 부부 간의 '수평적 소통'이 완벽하게 단절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무지를 깨닫지 못한 야곱은 호기를 부리며 '로 이흐예(לֹא יִחְיֶה, 그는 살지 못할 것이다)', 라는 저주의 맹세를 내뱉습니다. 훗날 사사 입다가 전쟁 승리 후 경솔한 맹세로 딸을 잃었듯이(삿 11:30-35), 야곱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라헬을 향해 '사형 선고'를 내린 셈입니다. 라헬은 이 사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베냐민을 낳다가 길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창 35:16-19). 하나님의 보호로 생명을 건진 자가, 자신의 경솔한 입술로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인간의 치명적인 어리석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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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은 우리 가정과 교회에 두 가지 경고를 던집니다. 첫째, 라반처럼 명분으로 포장된 위선을 경계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과 기득권을 챙기면서 '다 교회를 위해서, 다 당신을 사랑해서'라고 포장하는 종교적 위선이 있지 않습니까? 둘째, 야곱의 경솔한 언어를 경계해야 합니다. 가족 간에 깊은 대화와 소통(라헬의 상태에 대한 이해) 없이, 가장이라는 권위로 함부로 내뱉은 분노의 말이나 단정적인 선언이 사랑하는 배우자나 자녀의 영혼을 찌르는 저주의 비수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소서(시 141:3)', 우리는 생명을 살려야 할 그리스도인의 입술로 함부로 죽임의 언어를 내뱉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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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35절 생리대 아래 깔린 드라빔과 무력한 우상 : 부정함에 뭉개지는 세상의 신
하나님은 인간이 목숨처럼 의지하는 세상의 권력과 재물(드라빔)이결국 피조물의 부정함 아래 조롱당할 헛된 우상에 불과함을 폭로하시는 유일한 참 신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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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반이 야곱, 레아, 두 여종의 장막을 차례로 뒤지고 마지막으로 라헬의 장막에 들어갑니다. 라헬은 드라빔을 '낙타 안장', 아래에 넣고 그 위에 앉아 있습니다. 라반이 장막을 샅샅이 뒤지자, 라헬은 '마침 생리가 있어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으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라고 핑계를 댑니다. 라반은 결국 드라빔을 찾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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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전체에서 가장 풍자적이고 블랙 코미디 같은 장면입니다. 드라빔은 한 가문의 길흉화복을 주관하고 소유권을 결정짓는 절대적인 '신(우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위대하다는 신이 지금 딸의 치맛자락 아래, 짐승(낙타)의 안장 밑에 깔려 숨막혀 있습니다. 고대 근동 및 이스라엘 문화에서 여성의 월경 기간은 제의적으로 '부정한 상태’, 를 의미했습니다(레 15:19). 라헬이 그 드라빔을 철저히 깔고 뭉개 앉은 것은 아버지를 속이는 교활한 기만극이지만, 신학적으로 성경 저자는 이를 통해 우상 숭배의 허구성을 통쾌하게 조롱하고 있습니다.
라반이 '엘로하이(אֱלֹהַי, 나의 신)', 라고 부르며 찾아 헤매는 그 신이 지금 여성의 '데레크 나쉼(דֶרֶךְ נָשִׁים, 여성의 생리)', 아래에 깔려 자기 자신조차 구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열왕기상 18장에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을 조롱한 것('혹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이라', 왕상 18:27)과 같은 성경의 신랄한 우상 비판의 전통(Idol Polemic)입니다. 신약에서 바울이 세상의 자랑을 '스퀴발론(σκύβαλον, 배설물)', 으로 여겼던 것(빌 3:8)처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이 탐하는 우상은 생리대 아래 깔린 오물과 다를 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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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은 물론, 때로는 성도들조차 돈, 학벌, 권력, 사회적 지위라는 '현대판 드라빔'이 내 인생을 구원하고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이라 굳게 믿고 그것을 훔쳐서라도 얻으려 안달합니다. 라반은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칠 일을 쫓아왔고, 라헬은 그것을 차지하겠다고 안장 아래 숨겼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우리가 그토록 목숨 거는 세상의 우상들은, 내 삶에 진짜 위기(죽음과 심판)가 닥쳤을 때 나를 지켜주기는커녕 안장 밑에 깔린 무능력한 물건으로 전락합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깔고 앉아 안심하고 있습니까? 재물입니까, 지위입니까? 진정한 자유와 평안은 드라빔을 훔치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무가치한 우상을 과감히 버리고, 추격자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만을 나의 유일한 산성으로 삼고 벧엘(예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참된 성도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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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도망치는 두려움과 세상의 위협 사이에서도
친히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야곱의 가족이 빚어내는 기만과 탐욕,
그리고 어리석은 맹세의 모습을 통해
우리 내면에 숨겨진 추악한 민낯을 직시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간다고 하면서도,
두려움으로 마음을 훔쳐 도망치고,
짐짝 속에는 여전히 세상의 '테라핌(드라빔)'을 숨겨놓고 안심하려 했던
우리의 이중적인 신앙을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 주시옵소서.
주님, 대적의 꿈속에라도 나타나시어 '내 백성을 건드리지 말라'고 지켜주시는
그 압도적인 수직적 은혜를 찬양합니다.
우리가 잠든 밤에도 우리를 위해 친히 싸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또한, 배우자의 고통은 알지 못한 채 '로
이흐예(살지 못할 것이다)'라는 경솔한 저주와 정죄의 말을 내뱉었던
무지한 입술을 회개하오니, '내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소서(시 141:3)'라는
시편 기자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
'데레크 나쉼(생리)' 아래 깔려 자기조차 구원하지 못하는
드라빔의 무력함을 보며 깨닫습니다.
우리가 목숨 걸고 집착했던 재물과 세상의 성공이
실상은 바울이 말한 '스퀴발론(배설물)'처럼 헛된 것임을
철저히 자각하게 하옵소서.
모든 성도들이 더 이상 무가치한 세상의 드라빔을 훔치느라
인생을 허비하지 않게 하시고,
나를 위해 친히 싸우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약속의 벧엘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참된 피난처요, 살아계신 능력의 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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