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0:25-43 개천가에서 나뭇가지를 깎는 사람, 그 손을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
.
신앙이란, 내 몫을 빼앗기지 않으려 타인을 수단으로 삼고 교묘한 꾀를 부리는 삶에서 돌이켜, 그 얄팍한 몸부림조차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품에 묵상으로 안기며, 이웃을 경쟁자가 아닌 동반자로 새롭게 만나는 위대한 항복의 사건입니다.
*
야곱이 개천가에서 나뭇가지를 깎고 있습니다. 버드나무, 살구나무, 신풍나무. 그 가지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튼튼한 짐승들이 물을 마시러 올 때 그것을 보게 합니다. 얼룩진 강한 새끼가 태어나면 그것이 자기 몫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창 30:37-39). 야곱은 이 방법이 효과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는 이 방법 말고는 다른 것을 몰랐는지도 모릅니다. 꾀를 쓰는 것, 한 발 먼저 계산하는 것, 그것이 야곱이 살아온 방식이었으니까요.
.
그런데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야곱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난하고 싶은 마음보다 먼저, 그 쓸쓸함이 느껴집니다. 장인 라반은 이미 야곱의 몫이 될 짐승들을 몰래 빼돌려 사흘 길 밖으로 치워버렸습니다(창 30:35-36). 야곱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뭇가지를 깎습니다. 속고 또 속으면서도, 포기하지 못하고 꾀를 내는 사람. 그 모습이 어딘가 낯설지 않습니다.
.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 대목에서 야곱을 이렇게 읽었습니다. 그는 착취당해 왔지만 이제 보복하는 것이라고. 정확한 진단입니다. 야곱의 나뭇가지는 신앙의 행위가 아니라 보복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저는 챔버스의 말에 한 마디를 더 얹고 싶습니다. 보복하는 사람은 아직 그 자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라반에게 매여 있기 때문에 라반을 이기려 하는 것입니다. 상처가 아직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
라반과 야곱의 갈등을 들여다보면, 거기에 위대한 신앙의 서사가 없습니다. 있는 것은 탐욕과 탐욕의 충돌입니다. 라반은 조카의 노동력을 착취해 부를 쌓으려 했고, 야곱은 장인의 재산을 교묘하게 빼앗아 오려 했습니다. 그 싸움에서 짐승들은 도구가 되었습니다. 생명마저 이익 계산의 수단이 된 것입니다.
.
이것이 낯선 이야기입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때로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도, 사람이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일은 끊이지 않습니다.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혹은 빼앗기지 않기 위해, 우리는 저마다의 개천가에서 나뭇가지를 깎습니다. 정교하게, 집요하게, 때로는 그것이 잘못인 줄도 모른 채.
.
칸트는 인간을 결코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움과 결핍에 사로잡힐 때,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이 바로 그 원칙입니다. 야곱이 짐승들을 자기 이익의 도구로 삼았듯, 우리도 모르는 사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내 필요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대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장면에서 어디 계십니까. 야곱의 꾀를 기뻐하며 그를 거부로 만들어 주시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얄팍한 몸부림을 보시며 깊이 침묵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떠나지는 않으십니다. 벧엘에서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말씀하셨던 그 언약 때문에, 자격 없는 야곱을 끝끝내 버리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헤세드, 언약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잘해서 유지되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엉망이어도, 꾀를 부려도, 보복심에 불타도,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함께 계시겠다는 사랑입니다. 야곱이 개천가에서 나뭇가지를 깎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거기 계셨습니다. 한심해하시면서도, 그 손을 놓지 않으시면서.
.
그것을 아는 것이 묵상입니다. 『묵상을 다시 생각하다』의 저자들은 묵상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종교적 경험 안에 하나님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며 그 넓은 품에서 세상을 새롭게 만나는 것"이라고. 묵상이란 내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품에 그냥 안기는 것입니다. 그 품에 안긴 사람만이 타인을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경쟁자가 아니라 함께 걸어가야 할 사람으로.
.
야곱은 결국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게 됩니다. 그 씨름은 나뭇가지를 내려놓는 밤이었습니다. 내 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는 법을 배우는 밤이었습니다. 그 밤이 오기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개천가에서 나뭇가지를 깎는 그 긴 시간을, 하나님은 인내로 기다리셨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지금 개천가에 서 계십니까. 내 몫을 지키기 위해, 혹은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 어떤 나뭇가지를 깎고 계십니까. 그 수고가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꾀가 꾀를 낳고, 경쟁이 경쟁을 낳는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우리는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그 나뭇가지를 빼앗으려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뭇가지를 쥔 손을 보고 계십니다. 그 손이 지쳐서 스스로 내려놓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순간이 얍복강입니다. 그 순간이 묵상입니다. 나뭇가지를 내려놓는 것이 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항복이 실은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 그것이 이기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자유입니다.
.
이번 한 주간, 손에 쥔 나뭇가지를 잠시 내려다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도 이미 무언가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나뭇가지를 쥔 손을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조용히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개천가에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나뭇가지를 깎는 사람 곁에도.
.
사막을 구르는 회전초를 생각합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굴러다니며 닥치는 것마다 몸에 붙입니다. 몸집은 커지지만 뿌리가 없습니다. 야곱이 개천가에서 부린 꾀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같은 사막에 깊이 뿌리내린 나무가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릴 뿐 뽑히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곳의 물을 향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묵상이란 그 뿌리를 내리는 일입니다. 표면의 바람을 잡으려 구르기를 멈추고, 가장 깊은 곳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조용히 내려가는 일. 뿌리가 내려지는 만큼, 우리는 흔들리면서도 쓰러지지 않게 됩니다.
.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