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0:1-24 침묵 속에 지워진 이름들, 그 이름을 기억하시는 하나님 .

by 평화의길벗 posted Apr 24,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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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0:1-24 침묵 속에 지워진 이름들, 그 이름을 기억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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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내 결핍을 채우기 위해 가장 연약한 자를 도구로 삼는 세상의 잔혹한 경쟁에서 돌이켜, 침묵 속에 지워진 이들의 고통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하는 묵상을 통해, 자격 없는 우리를 끝내 놓지 않으시는 은혜 안에 고요히 닻을 내리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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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0장을 읽으면서 저는 자꾸 한 가지에 마음이 걸립니다. 빌하와 실바. 이 두 사람의 이름입니다. 라헬은 야곱에게 절규했습니다.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창 30:1) 그 절규 속에서 그녀는 자기 몸종 빌하를 야곱의 침소로 들여보냅니다. 레아도 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출산하지 못하게 되자 몸종 실바를 야곱에게 내어줍니다. 그리고 두 여인이 낳은 아이들에게 자신들의 경쟁과 승리를 기념하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단, 납달리, 갓, 아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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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긴 이야기 어디에도 빌하와 실바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원했는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그 밤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성경은 한마디도 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야기 속에 있었지만, 이야기의 주체가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삶이 결정되는 자리에서, 그들은 말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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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것을 오래된 이야기로 읽을 수 없습니다. 오늘도 누군가의 경쟁과 욕망을 위해 침묵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필요를 채우기 위해 타인을 수단으로 삼는 일, 그것은 라반의 장막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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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말했습니다. 인간을 결코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고.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때로 우리가 다니는 공동체 안에서도, 가장 힘없는 사람이 가장 먼저 도구가 됩니다. 빌하와 실바처럼. 아무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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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헬과 레아의 경쟁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우리 자신이 보입니다.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이것은 단순히 자녀를 원하는 간절함이 아닙니다. 이것은 타인과 자신을 끊임없이 저울질하며 스스로를 지옥으로 몰아가는 비교의 언어입니다. 언니는 아이가 있는데 나는 없다. 동생은 사랑을 받는데 나는 받지 못한다. 그 비교가 사람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지를 이 장면은 잘 보여줍니다. 경쟁에 불타는 사람은 결국 가장 연약한 누군가를 밟게 됩니다. 그것이 경쟁의 논리가 가는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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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지저분하고 슬픈 이야기의 끝에서 성경은 예상치 못한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창 30:22) 라헬이 드디어 요셉을 낳으며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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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백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경쟁에서 이겼으니 하나님이 상을 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라헬은 여전히 부끄러웠습니다. 자기 몸종을 남편의 침소로 들여보낸 그 밤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빌하가 낳은 아이를 자기 아이인 양 품었던 그 시간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 부끄러움을 하나님이 씻어주셨다는 것, 그것이 이 고백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라헬의 경쟁심을 상 주신 것이 아니라, 경쟁 속에서 스스로를 망가뜨린 라헬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은총입니다.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이토록 엉망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부끄러움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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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빌하와 실바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경은 그들에 대해 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이 지워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셨습니다(창 29:31). 그 눈이 빌하와 실바를 보지 못하셨을 리 없습니다.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역사가 지운 이름들을 기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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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아는 것이 묵상의 시작입니다. 차준희 교수는 묵상을 가리켜 "하나님의 생각으로 내 생각을 교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 내 경쟁과 욕망 속에서 지워버렸던 얼굴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는 일. 그것이 묵상입니다. 빌하와 실바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 그 기억이 나를 바꿉니다. 내가 지금 누군가를 도구로 삼고 있지는 않은지, 내 경쟁의 불길 속에서 누군가의 존엄을 짓밟고 있지는 않은지, 그 물음 앞에 가만히 서는 것, 그것이 묵상이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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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의 안에는 라헬도 있고 레아도 있습니다. 남보다 뒤처지는 것 같아 절규하는 라헬이 있고, 사랑받지 못해 안간힘을 쓰는 레아가 있습니다. 그 안간힘이 때로 우리 주변의 빌하와 실바를 만들어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는 고백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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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의 파도는 계속 몰아칩니다. 그러나 파도가 아무리 거세도 바다의 가장 깊은 곳은 고요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그 깊은 곳에 닻으로 내리는 것, 그것이 묵상입니다. 내가 지금 어떤 경쟁의 파도 위에 있든, 그 파도 아래 더 깊은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부끄러움을 씻어주시는 분이, 우리가 지운 이름들을 기억하시는 분이, 거기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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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 주간, 내 결핍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를 수단으로 삼으려는 그 오래된 충동을 잠시 멈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경쟁의 이야기 속에서 지워진 얼굴이 있지는 않은지, 조용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 얼굴을 기억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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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지워진 이름들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끄러움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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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바다를 생각합니다. 표면은 늘 바람에 흔들리고 파도에 부서집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센 폭풍도 바다의 가장 깊은 곳까지 흔들지는 못합니다. 거기는 고요합니다. 묵상이란 흔들리는 표면에서 싸우기를 멈추고, 그 깊은 곳으로 닻을 내리는 일입니다. 닻이 내려지는 동안 배는 여전히 흔들립니다. 그러나 닻이 바닥에 닿는 순간, 배는 표류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말씀 읽기가 그 닻을 내리는 일입니다. 파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떠내려가지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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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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