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7:30-46 빼앗긴 자의 통곡, 그 통곡 속으로 걸어 들어오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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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이란, 누군가를 밀어내야만 내가 복을 얻는다는 세상의 잔혹한 법칙에서 돌이켜, 축복에서 배제되어 통곡하는 자의 눈물 속으로 깊이 걸어 들어가는 묵상을 통해, 찢긴 관계마저 끝내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아파하는 사랑 안에 내 삶을 온전히 내어맡기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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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의 울음소리를 저는 오래 잊지 못합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가로챈 직후,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가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그 순간을 이렇게 전합니다.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창 27:34) 짧은 문장 하나인데, 읽을 때마다 가슴 어딘가가 저며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장자권을 잃은 사람의 분노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삶의 근거를,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한꺼번에 빼앗긴 자의 통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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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랫동안 이 본문을 어떻게 읽어왔습니까. 야곱은 영적인 축복을 사모한 자였고 에서는 세속에 물든 자였으니, 야곱이 축복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식의 독법이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읽는 순간, 에서의 울음소리는 사라집니다. 역사의 뒤안길로, 섭리라는 이름의 필연 속으로 조용히 묻혀버립니다. 송민원 교수가 지적하듯, 이것은 성경을 '수직적'으로만 읽는 오랜 습관의 폐해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원 드라마에만 집중하다 보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 누군가의 권리가 짓밟히고 누군가의 눈물이 땅바닥에 흘러내리는 그 '수평적' 현실은 자꾸 지워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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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경은 에서의 울음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에서가 소리 내어 울었다고 썼고, 에서가 두 번씩이나 간청했다고 썼습니다. 이 울음을 흘려 넘기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이야기의 진짜 비극과 마주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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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의 가정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이삭은 별미를 탐하는 식탐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질서를 잊었고, 리브가는 편애가 신앙보다 앞서 남편을 기만하고 아들들을 갈라놓았으며, 야곱은 두려움이 만들어낸 속임수로 형의 삶에 씻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죄의 본질을 '자기 안으로 굽어진 존재(homo incurvatus in se)'라고 불렀을 때, 그는 바로 이런 장면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릅니다. 무한히 바깥을 향해, 타인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할 존재가 안으로, 안으로만 굽어져 마침내 가장 가까운 사람을 수단으로 삼거나 경쟁자로 전락시키는 것, 그것이 죄가 만들어내는 얼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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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인간을 '서로 함께 존재'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본래 혼자 설 수 없는 존재들, 서로에게 기댄 채 생을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존재들입니다. 그 본래의 모습이 무너질 때, 형은 동생을 향해 살의를 품고, 어머니는 아들을 야반도주시키며, 한 지붕 아래 살던 가족이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이산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리브가는 야곱을 보내며 "며칠 동안만 있으라"고 말했지만(창 27:44),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리브가와 야곱의 재회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식을 살리려던 어머니가 자식을 영영 잃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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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선하다고 해서 방법의 폭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실을 이삭의 가정은 온몸으로 증언합니다. 이런 이야기 앞에 서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지금껏 누군가의 몫을 가로채며 앞서 나온 적이 없습니까. 선한 의도를 방패 삼아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적이 없습니까. 혹은, 에서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열심히 살았는데 어느 날 내 몫이 통째로 사라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적이 없습니까. 이 이야기는 먼 옛날 믿음의 선조들의 허물이 아닙니다. 정확히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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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니, 더 솔직하게 물어야 하겠습니다. 이미 상처를 주고받은 이 자리에서,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강을 건너버린 이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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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묵상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 소원을 주님 앞에 반복해 아뢰는 것이 묵상이 아닙니다. 묵상이란 『묵상을 다시 생각하다』의 저자들이 말한 대로, "말씀이 내 몸을 통과하는 체험"입니다. 에서의 울음소리를 내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울음이 내 가슴을 뚫고 지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빼앗긴 자의 억울함, 버림받은 자의 비통함이 나의 감정과 포개어지는 그 불편하고도 아픈 시간, 그것이 묵상입니다. 권연경 교수가 묵상을 가리켜 "걷기"라고 부른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관념의 성 안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고통 속으로, 그리고 나 자신의 민낯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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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걷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야곱만 따라가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속임수를 쓰고 도망치는 야곱을 벧엘 광야에서 친히 찾아가신 하나님은, 동시에 에서를 향해서도 일하고 계셨습니다. 훗날 에서는 넉넉한 부유함 속에 살게 됩니다. 오랜 세월 뒤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야곱을 맞이한 에서는, 복수 대신 달려가 목을 안고 울었습니다.(창 33:4) 그 화해의 포옹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성경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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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망가진 이 가정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속임수와 배신과 시기심으로 얼룩진 그 이야기를, 하나님은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은총의 역설입니다. 우리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이토록 망가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 망가진 자리에서부터 하나님은 새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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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지금 에서의 자리에 계십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상처만 가득 안고 계십니까. 아니면 야곱의 자리에 계십니까. 앞서 나가긴 했지만 뒤에 남겨진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자꾸 귓가에 맴돌고 계십니까. 어느 자리에 계시든, 하나님은 그 자리로 걸어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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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힘으로 축복을 증명해야 한다는 그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만히, 지금 내 곁에서 통곡하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얼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 묵상이고, 그것이 신앙입니다. 우리의 찢긴 관계, 우리가 남긴 상처, 우리가 받은 상처, 그 모든 것을 아파하시며 품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에서의 울음에도 귀 기울이셨던 그분이, 오늘 우리의 울음에도 귀 기울이고 계십니다. 통곡하는 자의 곁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반드시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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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케스트라 공연장에서 가끔 지휘자보다 연주자들을 바라봅니다. 저마다 다른 악기를 쥔 연주자들이 어느 순간 서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할 때, 무대 위에 무언가가 달라집니다. 자기 소리만을 크게 내려는 악기는 언제나 불협화음을 만듭니다. 그러나 옆 사람의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소리를 조율하는 순간, 음악은 비로소 음악이 됩니다. 믿음의 공동체도 그렇습니다. 내 축복만을 키우려는 욕망이 앞설 때, 우리는 서로를 해치는 불협화음 속에 살게 됩니다. 그러나 묵상이란 잠시 자기 소리를 낮추고, 에서처럼 통곡하고 있는 옆 사람의 소리에 귀를 여는 일입니다. 그때 비로소 지휘자이신 하나님이 이끄시는 곡조가 들립니다. 그 곡조는 승자의 개선가가 아닙니다. 상처받은 자들이 서로를 안고 함께 울다가, 함께 일어서는 깊고 느린 음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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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