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6:34-27:14 눈먼 허기가 빚은 균열, 그 균열을 품으시는 넉넉한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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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욕망과 편애로 눈이 멀어 가장 가까운 이들과의 관계를 스스로 허무는 '자기 굽음'에서 돌이켜, 어둠에 쫓기는 영혼을 하나님의 날개 아래 피신시킴으로써 찢긴 삶이 샬롬으로 직조되는 대반전의 드라마에 고요히 동참하는 거룩한 순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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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육신이 허물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나이 들수록 더 투명해져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타인의 고통을 전보다 훨씬 섬세하게 감지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세월이 흐를수록 자기 안에 더 깊이 움츠러들어, 젊은 날의 편견과 집착이 오히려 더 완고한 성벽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이삭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저는 이 두 갈래의 갈림길 앞에 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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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는 말합니다.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창 27:1) 성경 기자가 이 한 문장을 그냥 흘려 쓴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생리적 노화의 보고가 아닙니다. 이 가정 전체에 깔린 어떤 영적인 실명(失明)을 조심스럽게 지시하는 말입니다. 이삭은 눈이 어두워지기 훨씬 전부터 이미 중요한 무언가를 보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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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다오. 그것을 먹은 후에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창 27:4)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의 마지막 말치고는 이상할 만큼 먹을 것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중에서부터 세우신 질서는 이미 오래전에 선포되었습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 그 말씀을 기억했더라면 이삭은 별미보다 먼저 하나님을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입맛을 앞세웠습니다. 별미라는 작고 향기로운 욕망이 하나님의 언약보다 더 크게 그의 눈앞을 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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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가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계획을 엿들은 뒤 야곱을 불러 속임수를 지시합니다. 일찍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녀의 태중에서부터 약속하신 것을 그녀는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다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위한 편애가 하나님을 향한 신뢰보다 앞서버렸습니다. 이삭의 '별미'와 리브가의 '편애', 이 두 욕망이 한 가정의 중심에서 충돌하며 형제를 원수로 갈라놓는 비극을 빚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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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아우구스티누스는 죄의 본질을 이렇게 포착했습니다. 인간이란 '자기 안으로 굽어진 존재(homo incurvatus in se)'라고. 루터가 그 통찰을 이어받아 더욱 날카롭게 벼렸습니다. 무한히 바깥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할 존재가 자기를 향해 안으로, 안으로만 굽어져 있다는 것, 그것이 죄의 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삭의 굽음은 별미였고, 리브가의 굽음은 편애였으며, 야곱의 굽음은 빼앗기지 않으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이 세 겹의 굽음이 한 지붕 아래서 뒤엉켜 가족을 산산조각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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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낯선 이야기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때로 우리가 다니는 교회당 안에서도, 누군가의 몫을 빼앗아야만 내 삶이 채워진다는 어두운 논리가 작동합니다. 축복마저도 누군가를 제치고 먼저 움켜쥐어야 할 한정된 재화로 전락한 이삭 가정의 풍경은, 오늘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자화상 앞에 오래 서 있으면, 우리는 이 이야기가 단지 믿음의 선조들의 허물이 아니라, 정확히 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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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경이 이 이야기를 전하는 까닭은 우리를 정죄하거나 절망케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이토록 일그러진 가정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속임수와 편애와 식탐으로 뒤엉킨 그 허물투성이의 가문을, 하나님은 끝내 놓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은총의 역설입니다. 우리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망가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 망가짐 속을 뚫고 들어와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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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니, 더 정직하게 묻겠습니다. 이미 상처를 주고받은 관계 앞에서, 이미 허물을 쌓아온 자신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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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묵상'을 권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흔히 오해하듯, 나의 소원을 주님 앞에 반복해서 아뢰는 것이 묵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묵상이란, 잠시 내 욕망이 만들어온 시끄러운 소음을 멈추고, 어둠에 쫓기는 나의 실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가져다 놓는 일입니다. 『묵상을 다시 생각하다』의 저자는 묵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묵상이란 "어둠에 추격당한 영혼이 하나님의 날개 아래서 피신했다가 마침내 새벽을 깨우게 하는 대반전 드라마를 창조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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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표현이 참 아름답고 또 정확합니다. 피신, 그것이 묵상입니다. 별미에 눈이 멀어 영적 분별을 잃은 이삭도, 편애로 가족을 갈라놓은 리브가도, 두려움에 쫓겨 속임수를 행한 야곱도, 그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숨어드는 것, 그것이 묵상입니다.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일을 멈추고, 내가 만들어온 균열을 솔직히 인정하며, 그러나 동시에 그 균열마저 품으시는 하나님의 넉넉함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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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라는 표현도 귀하게 다가옵니다. 어둠은 피신한다고 즉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날개 아래 피신해 있는 동안, 아주 천천히, 어둠 저편에서 새벽이 옵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게 아닌 새벽, 하나님이 여시는 새벽. 이삭 가정의 이야기는 오랜 어둠 속에서도 끝내 새벽을 열어내신 그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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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각자의 가정과 관계 안에도 크고 작은 균열이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자신이 이삭처럼 별미라는 이름의 작은 욕망 앞에 큰 것을 잃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리브가처럼 선한 의도를 가지고도 그 방법이 관계를 허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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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 주간, 내 힘으로 축복을 증명하고 쟁취해야 한다는 그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조용히, 어둠에 쫓기는 나의 영혼을 하나님의 크고 부드러운 날개 아래 맡기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찢긴 관계, 우리의 부끄러운 허물, 우리의 굽어진 마음, 그 모든 것을 품어 안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이삭의 가정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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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신한 영혼에게 새벽이 옵니다. 반드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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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래된 베틀을 생각합니다. 베틀 위를 수평으로 오가는 씨실은 우리의 일상입니다. 때로 이기심으로 엉키고, 편애로 끊어지며, 볼품없는 자국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아래로 단단하고 고요하게 드리워진 날실이 있습니다. 흔들리지도, 끊어지지도 않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그 날실에 우리의 끊어진 씨실이 잇대일 때, 우리가 허물어놓은 관계의 자리에도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집니다. 묵상이란 바로 그 날실 앞에 고요히 머무는 일입니다. 내 손으로 완벽한 직물을 짜내려 허둥대기를 멈추고, 나의 끊어진 씨실을 그 영원한 날실에 잇대어 놓는 일입니다. 그때 우리의 상처 난 일상은, 우리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빛깔의 직물로 완성되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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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