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6:34-27:14 눈먼 가장의 식욕과 조급한 어미의 속임수: 무너진 가족 관계 속에 일하시는 역설적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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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가 40세에 헷 족속의 두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큰 근심이 됩니다(26:34-35). 이삭이 나이 들어 눈이 어두워지자, 맏아들 에서를 남몰래 불러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오면 축복하겠다고 제안합니다(27:1-4). 이 말을 엿들은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 염소 새끼를 가져오게 하여 자신이 이삭의 입맛에 맞는 별미를 만들 테니, 야곱이 대신 들어가 축복을 가로채라고 명령합니다(27:5-10). 야곱이 발각될 것을 두려워하자, 리브가는 그 저주를 자신이 받겠다며 야곱을 안심시키고 속임수를 실행에 옮기게 합니다(27: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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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문화적 배경 : 고대 근동 족장 사회에서 '장자권'과 아버지가 임종 직전에 내리는 '축복(베라카, בְּרָכָה)'은 단순한 정서적 위로가 아니라 법적 효력을 지닌 언약의 계승이었으며, 한 번 선포되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절대적 선언이었습니다. 에서가 40세에 이방 여인들과 결혼한 것은 언약 공동체의 영적 순수성을 훼손하는 심각한 일탈이었습니다.
# 신학적 배경 : 이 본문은 창세기의 족장들이 결코 도덕적으로 무결점한 영웅이 아님을 고발합니다. 이삭의 육신적 편애, 리브가의 권모술수, 에서의 세속성, 야곱의 기회주의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 수평적 읽기 관점 : 이 본문은 '소통이 단절된 역기능 가정'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이삭은 아내와 상의하지 않고 몰래 에서를 부르며, 리브가 역시 남편을 바로잡기보다 몰래 야곱을 부추겨 속임수를 기획합니다. 이 역기능의 중심에서도 창세기의 핵심 신학, 곧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5:23)'는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실패에 묶이지 않고 역설적으로 성취된다는 신학이 빛을 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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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34-35 에서의 세속적 혼인과 부모의 근심 : 언약 가문을 흔드는 수평적 상처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의 방식에 동화되어 영적 순수성을 잃어버릴 때,그것이 개인의 문제를 넘어 공동체 전체의 근심과 아픔이 됨을 일깨우시는 거룩하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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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가 40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방 여인들과의 이중 결혼은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큰 '근심(모라트 루아흐, מֹרַת רוּחַ)', 곧 '영혼의 쓴맛'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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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4장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하인에게 엄중히 당부했습니다. '내 아들을 위하여 이 가나안 족속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택하지 말라'(24:3). 그 언약적 유훈을 정면으로 무시한 채, 장자 에서는 가나안 족속 헷 사람의 여인을 두 명이나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것은 라멕의 일부다처제(창 4:19)를 연상시키며, 에서가 언약의 상속자로서 근본적으로 부적합한 세속적 인물임을 본문이 의도적으로 폭로하는 장치입니다. '근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모라트 루아흐(מֹרַת רוּחַ)'는 직역하면 '영의 쓴맛'입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에서 오직 여기에만 등장하는 표현으로, 그 영적 고통의 깊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증언합니다. 수평적 읽기로 볼 때, 에서의 선택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단절뿐만 아니라 이삭과 리브가 부모에게 깊고 지속적인 '수평적 상처와 영적 근심'을 안겨주었습니다. 자녀의 영적 이탈은 부모의 가장 처절한 고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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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자녀들은 세상 속에서 어떤 가치관으로 배우자를 선택하고 삶을 개척하고 있습니까? 에서처럼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고, 세상의 화려한 조건에 취해 이방 문화(불신앙적 가치관)와 거침없이 결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부모 된 우리는 자녀의 세속적 성공에 박수 치기 전에, 그들의 영적 상태가 하나님과 교회를 근심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믿음의 가문을 세우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거룩한 경계선을 가정 안에 다시 그어야 합니다. 에서의 이방 혼인이 26장과 27장의 비극 전체를 촉발시킨 단초였음을 기억하십시오. 작은 영적 타협이 가정 전체의 역사를 비극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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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1-4 이삭의 어두운 눈과 육신적 편애 : 영적 분별력을 잃은 가장의 실패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 시야가 육신의 탐욕과 편견으로 가려질 때,그것이 언약의 물줄기를 가로막는 치명적 장애물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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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게 되자, 맏아들 에서를 은밀히 부릅니다. 이삭은 '나는 이제 늙어 어느 날에 죽을지 모르니' 사냥하여 내가 즐기는 '별미(맛아담, מַטְעַמִּים)'를 만들어 오면, 먹고 죽기 전에 네게 마음껏 축복하겠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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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첫 마디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27:1)'는 단순한 노화의 의학적 묘사가 아닙니다. 창세기 내러티브에서 육체적 상태는 종종 영적 상태의 표상으로 기능합니다. 엘리 제사장도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였는데'(삼상 3:2) 이후 하나님의 임재(궤)를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는 영적 실패가 묘사됩니다. 즉, 이삭의 어두운 눈은 '영적 분별력의 상실'에 대한 서사적 선언입니다. 이삭은 리브가의 태중에 쌍둥이가 있을 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5:23)', 는 하나님의 신탁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별미(맛아담)', 즉 사냥한 고기가 주는 육신적 쾌락과 장남 에서에 대한 편애에 이끌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려 합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은밀히(밀실에서)'라는 행동 방식입니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와 이 중대한 결정을 상의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러 가는 순간에도 가족의 반응을 배제했듯, 이삭 역시 가장 중대한 언약 계승의 결정을 '밀실 독단'으로 처리하려 합니다. 언약 공동체의 수평적 소통이 철저히 봉쇄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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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우리의 영적 시야가 흐려질 위험이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게 유익을 주는 사람(에서)만을 편애하며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왜곡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나 가정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육신적 기호나 세속적 혈연주의에 얽매여 소통을 차단하고 밀실 행정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눈먼 이삭의 모습입니다. 영적 리더일수록 자신의 판단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묻고, 배우자와 공동체(동역자)와 투명하게 소통해야 합니다. '별미'가 주는 즉각적인 만족과 쾌락이 영원한 언약의 물줄기를 가로막게 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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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5-10 리브가의 엿들음과 기만적 계획 : 선한 목적과 불의한 수단의 충돌
하나님은 목적이 선하다 할지라도 불의한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으시며,우리의 조급한 개입 없이도 당신의 뜻을 신실하게 성취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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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에서에게 말할 때 리브가가 엿듣습니다. 에서가 사냥하러 나가자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 이삭의 계획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염소 떼에서 좋은 새끼 두 마리를 가져오면 이삭이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줄 테니, 야곱이 아버지께 가지고 들어가 '그 축복을 받으라'고 명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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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가는 하나님의 신탁(야곱이 언약의 후계자가 될 것)을 가슴에 품고 있던 인물입니다(25:23). 그녀의 열심은 진실합니다. 그러나 남편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려 하는 위기 앞에서, 그녀는 두 가지 선택지를 외면합니다. 남편을 영적으로 설득하는 것과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는 것입니다. 대신 그녀는 '엿듣고', '별미를 조작'하는 권모술수를 동원합니다. 본문에서 '엿듣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 '샤마(שָׁמַע)'는 '듣다, 순종하다'는 의미인데,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목소리를 '순종하여 들어야' 할 리브가가 남편의 밀담을 '엿듣는' 데 이 동사가 사용됩니다. 경청의 방향이 하나님에서 인간의 음모로 뒤바뀐 것입니다.
수평적 읽기 관점에서 이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파괴적 폭력'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명분 아래 거짓과 속임수라는 불의한 방법이 동원됩니다. 본문은 야곱의 승리를 결코 영웅화하지 않습니다. 이 기만의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야곱은 20년 넘는 망명 생활과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는 피해자의 삶(창 29-31장)을 감내해야 했고,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는 아픔(창 37장)까지 짊어집니다. 성경의 서사는 일관되게 이 진리를 증언합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갈 6:7)'는 법칙은 언약 백성에게도 예외 없이 작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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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앙생활과 교회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교회 부흥을 위한다'는 거룩한 명분을 내세워 불의한 수단이나 편법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비즈니스 방식이나 정치적 술수를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 상대를 속이고 주도권을 쟁취하려는 모습은 리브가의 빗나간 열심과 같습니다. 목적이 거룩하다면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과 과정도 정직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조급함과 속임수 없이도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엿듣는 귀'를 '기도하는 무릎'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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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11-14 야곱의 이기적 두려움과 리브가의 맹목적 희생 : 역기능 가정을 뚫는 역설적 은혜
하나님은 얽히고설킨 인간의 이기심과 속임수, 상처투성이의 관계망 속에서도기어이 당신의 구속사를 이끌어 가시는 역설적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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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형 에서는 털이 많고 자신은 매끈하니, 아버지가 만져보면 속이는 자로 여겨져 축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두려워합니다. 리브가는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라'고 단언하며 야곱을 재촉합니다. 결국 야곱은 어머니의 지시대로 염소 새끼를 가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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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야곱의 대답은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는 아버지를 속이는 것이 '윤리적, 신앙적으로 악한 죄'이기 때문에 주저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들켜서 저주를 받을까 봐' 두려워한,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기회주의적인 계산이었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Coram Deo)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발각되는 것(Coram Homine)이었습니다. 도덕적 자아가 아니라 처세적 자아가 야곱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리브가는 '저주는 내가 받겠다'며 왜곡된 모성애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이 말은 훗날 놀라운 예언적 아이러니로 실현됩니다. 리브가는 이 사건 이후 성경에서 다시는 살아있는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야곱을 살아서 다시 보지 못하는 삶이 그녀의 '저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위대한 신학은 바로 여기서 빛을 발합니다. 이토록 철저히 망가진 역기능 가정의 죄악과 헛수고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실패에 묶이지 않고 도리어 그 결함을 뚫고 지나가며 거대한 섭리를 성취해 가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역설적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도덕적 청결함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진흙 속에서도 토기를 빚으시는 도예가이십니다(렘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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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의 행동 기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가?(Coram Deo)'라는 신전의식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이익을 챙길 수 있는가?'라는 이기적 계산입니까? 부모로서 자녀를 위해 희생한다고 하면서, 도리어 자녀에게 편법과 속임수를 가르치며 영적인 저주를 자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눈먼 이삭, 속이는 리브가, 계산적인 야곱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아 정직하고 투명한 믿음의 가정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붙드시는 주권적인 은혜에 감사하며, 편법을 멈추고 하나님의 방식에 순복하십시오. 진흙탕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은 멈추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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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의 연약함과 실패 속에서도
신실하게 언약의 역사를 써 내려가시는 은혜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과 리브가의 가정이 빚어내는 참담한 기만과 단절의 이야기를 거울삼아,
오늘 우리 내면에 숨겨진 탐욕과 영적인 눈멂을 통렬히 회개합니다.
에서처럼 '영의 쓴맛(모라트 루아흐)'을 부모에게 안기면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영적 무감각을,
이삭처럼 육신의 별미와 편애에 이끌려 하나님의 신탁을 외면했던 탐욕을,
리브가처럼 기도의 무릎 대신 엿듣는 귀와 꾀하는 손을
먼저 내밀었던 조급함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주님,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명분으로
불의한 수단을 정당화했던 우리의 교만과 조급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야곱처럼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름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의 들킴을 두려워하며 살아온 처세적 삶을 회개합니다.
오직 'Coram Deo',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투명한 삶이 되게 하옵소서.
수평적 소통이 단절되고 각자의 욕망이 충돌하는
이 시대의 가정과 교회 안에 십자가의 긍휼을 부어 주시옵소서.
은밀한 밀실의 모의를 버리고,
정직하고 투명한 소통의 식탁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진흙탕 같은 실패 속에 있을 때에도
토기장이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놓지 않으심을 믿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결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구원의 역사를 빚어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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