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6:12-33 다툼의 우물을 양보하고 얻은 평화, 세상이 무릎 꿇는 온유함의 승리

by 평화의길벗 posted Apr 1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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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6:12-33 다툼의 우물을 양보하고 얻은 평화, 세상이 무릎 꿇는 온유함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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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년의 때에 이삭이 그랄 땅에서 농사하여 백 배의 결실을 얻고 거부가 됩니다.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아브라함 때에 판 우물들을 막아버리고, 아비멜렉 왕은 이삭을 추방합니다(12-16절). 이삭은 그랄 골짜기로 물러나 우물들을 다시 파지만, 그랄 목자들과의 다툼(에섹)과 적대감(싯나)으로 인해 계속해서 우물을 양보하고 물러납니다. 마침내 다툼이 없는 '르호봇(넓은 곳)'을 얻습니다(17-22절). 이후 브엘세바로 올라갔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사 두려워하지 말라며 언약을 재확인하시고, 이삭은 제단을 쌓습니다(23-25절). 마침내 아비멜렉 일행이 찾아와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보았다'며 평화 조약을 요청하고, 이삭은 그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환대하여 평안히 돌려보냅니다(26-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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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문화·신학적 배경 : 고대 근동 사막 기후에서 '우물'은 단순한 식수원을 넘어 생존권이자 재산권이며, 부족의 세력을 나타내는 정치적 상징이었습니다. 타인의 우물을 흙으로 메우는 행위는 강력한 적대 행위이자 사실상의 선전포고였습니다. 신학적으로, 창세기 26장은 이삭의 삶을 집중 조명하는 성경 유일의 장입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삭에게 계승되며, 흠결 많은 인간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신실하게 성취되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몽타주입니다. 수평적 읽기 관점에서,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의 '모방 욕망(mimetic desire)' 이론처럼 세상은 이삭의 풍요를 시기하여 그를 희생양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삭은 폭력의 악순환에 동참하지 않고 양보와 비폭력 저항이라는 수평적 지혜를 선택합니다. 결국 이 수평적 온유함이 세상의 권력(아비멜렉)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를 스스로 고백하게 만드는 놀라운 선교적 승리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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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6절  수직적 축복과 수평적 적대감 : 은혜가 촉발한 시기와 추방

하나님은 메마른 땅에서도 백 배의 결실을 주시는 전능자이시나,그 축복이 세상의 시기와 갈등을 동반할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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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흉년이 든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창성하고 왕성하여 거부(巨富)가 됩니다. 이를 본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아브라함 때에 팠던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웁니다. 마침내 아비멜렉 왕이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며 이삭을 추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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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이삭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랄에 머문 결과로 받은 엄청난 물질적 축복을 보여줍니다. 유목민인 이삭이 '농사'를 지어 백 배를 얻었다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기적적 개입입니다. '백 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마 13:8)에서 좋은 땅이 맺는 결실과 동일한 숫자로, 신약 독자들에게 강렬한 정경적 울림을 줍니다. 그러나 수평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압도적인 '수직적 은혜'는 필연적으로 이웃과의 '수평적 긴장'을 유발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קִנְאָה, 킨아)'는 가인이 아벨의 제사를 시기했던 그 원초적인 인간 어둠의 반복입니다. 그들은 타인의 성공을 축하하기보다 그의 생명줄인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우는' 파괴적 폭력을 행사합니다. 아비멜렉의 추방 명령은 세상이 하나님의 사람을 감당하지 못하고 밀어내는 배타적 권력의 전형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었지만, 세상의 적대감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쫓겨나는 신세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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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예수 잘 믿으면 세상에서도 만사형통할 것'이라는 얄팍한 기복주의에 빠집니다. 그러나 진짜 축복은 시련을 동반합니다. 직장이나 사업터에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탁월한 성과를 낼 때, 세상은 나를 칭찬하기보다 시기하고 견제하며 때로는 부당하게 내칠 수 있습니다. 나의 정당한 헌신과 결실이 타인의 악의적인 질투(우물 메우기)로 돌아올 때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내가 잘못 살아서가 아니라 세상이 하나님의 빛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축복받은 이후에 겪는 억울한 추방과 배척의 자리에서, 분노에 휩싸이지 않고 하나님의 다음 인도하심을 바라보는 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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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2절  다툼과 양보, 그리고 르호봇 : 포기함으로 얻는 더 넓은 땅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과 다투지 않고 평화를 위해 기꺼이 손해와 양보를 선택할 때,우리의 지경을 넓히시고(르호봇) 번성케 하시는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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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그랄 골짜기로 쫓겨나 아버지가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팝니다. 이삭의 종들이 새 우물을 발견하자 그랄 목자들이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며 다투므로 그 이름을 '에섹(다툼)'이라 합니다. 다른 우물을 파자 또 다투므로 '싯나(적대감)'라 부릅니다. 이삭이 또 이동하여 세 번째 우물을 팠을 때는 다툼이 없었으므로 '르호봇(넓은 곳)'이라 부르며,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의 지경을 넓히셨으니 번성하리라'고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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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은 고대 사회에서 생명과 직결된 절대적 자산입니다. 이삭은 막강한 부와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음에도(16절), 불합리한 분쟁 앞에서 무력 행사로 맞서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가장 빛나는 '비폭력 저항과 양보의 윤리'를 보여줍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삭이 우물에 붙인 이름들입니다. '에섹'과 '싯나(שִׂטְנָה)'는 '대적자, 고발자'를 뜻하는 '사탄(שָׂטָן)'의 어근과 동일합니다. 즉, 이삭은 자신이 맞서 싸우는 것이 단순한 목자들과의 다툼이 아니라 사탄적 적대감임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 영적 통찰 위에서 그는 싸우지 않았습니다.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더 높은 영적 지혜에서 비롯된 온유함이었습니다. 세상의 논리로는 끝까지 싸워 쟁취해야 이기는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논리에서는 포기하고 양보하는 자가 최종적으로 '르호봇(רְחֹבוֹת, 넓은 공간)'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고 하신 말씀의 완벽한 구약적 실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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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사회는 '내 몫을 빼앗기면 바보가 된다'는 권리 주장과 무한 투쟁의 전장입니다. 부동산 문제, 직장 내 승진 경쟁, 심지어 교회 내의 주도권 다툼에서도 양보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이삭처럼 '불합리하게 빼앗기고도 말없이 물러나 다시 땅을 파는' 삶은 미련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투어 빼앗은 '에섹'과 '싯나'가 아니라, 평화를 위해 양보하고 얻은 '르호봇'에서 우리의 지경을 넓혀 주십니다. 억울하게 공을 빼앗긴 직장인, 상속 문제로 손해 본 형제, 인간관계에서 오해를 뒤집어쓴 성도가 계십니까? 변명하고 싸우기보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르호봇'을 믿고 온유함으로 한 걸음 물러나 보십시오. 평화를 심는 자만이 진정한 번성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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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5절  브엘세바의 현현과 참된 예배 : 물러난 자리에서 만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억울함을 참고 물러난 자의 밤에 찾아오사'두려워하지 말라' 위로하시며 언약을 재확인해 주시는 따뜻한 위로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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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그곳을 떠나 브엘세바로 올라갑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나타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십니다. 이삭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장막을 치고, 종들은 거기서도 우물을 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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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호봇에서 멈추지 않고 더 척박한 남쪽 '브엘세바'로 올라간 이삭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 밤'이라는 시간적 표현은 이삭의 심리적 상태를 대변합니다. 계속되는 양보와 이주 속에서 이삭의 내면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언제 또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어둠의 시간에 하나님은 수평적 관계에서 상처받고 쫓겨난 자를 수직적 은혜로 덮어주십니다. 이 '밤의 현현(Theophany)'은 야곱이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밤(창 32장)과 같은 신학적 구조를 공유합니다. 어둠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이삭의 응답은 세 가지 동사로 요약됩니다. '제단을 쌓고(예배)', '장막을 치고(나그네 됨의 수용)', '우물을 팠다(일상의 성실함)'.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이 세 동사는 신앙인의 삶의 리듬을 보여줍니다. 예배로 하나님을 만나고, 나그네의 겸손으로 현실을 수용하고, 일상의 우물을 묵묵히 파내려 가는 것 - 이것이 세상의 적대감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성숙한 신앙의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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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양보의 삶을 살다 보면 짙은 외로움과 두려움의 '밤'이 찾아옵니다. '나만 바보같이 당하고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할 때,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사람을 찾아다니며 하소연하는 자리가 아니라 '브엘세바의 제단'입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을 이길 힘을 얻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까? 내 권리를 빼앗겼습니까? 분노의 칼을 가는 대신 먼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으십시오. 예배가 회복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장막에서 흔들림 없이 나의 우물(일상의 소명)을 파내려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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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33절  세상의 인정과 환대의 식탁 : 원수가 찾아와 무릎 꿇는 비폭력의 승리

하나님은 원수 갚는 것을 우리 손에 맡기지 않으시고,도리어 원수들로 하여금 우리를 찾아와 화해를 청하게 만드시는 승리의 주관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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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멜렉 왕이 군대 장관 비골과 친구 아훗삿을 데리고 이삭을 찾아옵니다. 이삭이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쫓아내고서 왜 왔느냐'고 묻자, 그들은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며 불가침 평화 조약을 맺자고 간청합니다. 이삭은 그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먹고 마신 후 아침에 평안히 보냅니다. 그날 종들이 새 우물에서 물을 얻었고 그 이름을 '세바(맹세)'라 부르며, 그 성읍 이름이 브엘세바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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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의 절정이자 수평적 읽기가 주는 가장 강력한 선교적 통찰이 담긴 본문입니다. 이삭을 추방했던 최고 권력자 아비멜렉이 친히 찾아와 고개를 숙입니다. 그들이 항복한 이유는 이삭의 군사력이나 재력이 아니라, 그의 양보와 온유함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임마누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힘으로 맞서는 자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억울함을 당하고도 묵묵히 선을 행하는 자 배후의 영적 권위 앞에서는 전율합니다. '분명히 보았다'는 표현의 히브리어 '라오 라이누(רָאוֹ רָאִינוּ)'는 강조형 부정사로, '우리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는 강한 확신의 표현입니다. 이삭의 삶 자체가 살아있는 복음이었습니다.

이삭의 위대함은 여기서 빛을 발합니다. 그는 자신을 내쫓았던 원수들을 조롱하거나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풍성한 '환대의 잔치'를 베풉니다.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마 5:44)의 구약적 선취입니다. 이 평화의 조약 직후 새 우물이 터져 나온 것은, 하나님께서 이 환대의 식탁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축복입니다. 화해의 자리에서 생명의 물이 흘러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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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 속에서 직장 동료나 불신 이웃들에게 받아야 할 최고의 찬사는 '당신을 보니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우리가 그들과 똑같이 독하게 싸워 이길 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억울함을 감수하고 양보하며, 도리어 나를 핍박했던 자에게 환대의 식탁(커피 한 잔, 따뜻한 밥 한 끼)을 내어줄 때 세상은 우리의 신앙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적대감 앞에서 '성명서'를 내고 싸우는 전투적 집단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평화의 잔치를 베푸는 온유한 르호봇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나의 삶의 자리에 나를 시기하고 밀어내는 '아비멜렉'이 찾아왔을 때, 용서와 환대의 잔치 자리를 내어주는 십자가의 복음을 실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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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의 억울함을 갚아 주시고 참된 평화로 이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기근과 같은 메마른 인생 속에서도 저희에게 백 배의 은혜를 부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축복으로 인해 세상의 시기와 질투를 받을 때, 

저희는 이삭처럼 온유하게 물러서지 못하고 

혈기와 분노로 빼앗긴 우물을 되찾으려 싸웠던 지난날의 교만과 혈기를 회개합니다.

주님, '에섹'과 '싯나', 다툼과 사탄적 적대감으로 가득한 이 세상 한복판에서, 

내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고 양보함으로 하나님이 넓혀주시는 평화의 땅 

'르호봇'을 기업으로 얻는 지혜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억울함과 두려움으로 잠 못 이루는 밤에 우리를 찾아오사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시고, 

세상의 분요 속에서도 묵묵히 예배의 제단을 쌓고, 

나그네의 겸손으로 장막을 치며, 

일상의 우물을 성실히 파내려 가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저희의 양보와 비폭력의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당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놀라운 선교의 기적을 보게 하옵소서. 

나를 내어쫓았던 원수들에게조차 기꺼이 환대의 잔치를 베풀었던 이삭처럼,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으로 세상을 품고 승리하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화해의 자리마다 생명의 물이 터져 나오는 '세바의 우물'이 

저희의 가정과 직장과 교회 안에 넘치게 하옵소서.

원수 된 우리를 위해 친히 생명의 잔치를 베풀어 주신,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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