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6:1-11 낯선 질책 속에 담긴 은총, 두려움의 장막을 걷어내는 사랑의 스타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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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생존의 두려움 때문에 이웃(아내)을 방패막이로 삼으려던 얄팍한 이기심(꾀)을 내려놓고, 이방인의 입술을 통해서라도 우리의 부끄러움을 깨우치시며 기어코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낯선 '스타카토' 연주에 귀를 기울이는(묵상) 은총의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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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벚꽃의 향연이 지나간 자리마다 연초록의 새잎들이 따스한 햇살을 머금고 더 깊고 단단한 생명의 호흡을 시작하는 4월의 아침입니다. 하루하루 쫓기듯 살아가는 분주함 속에서도 내면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시는 광양사랑의교회 교우 여러분, 그리고 팍팍한 현실의 무게 앞에서 짙은 회의를 안고 참된 진리를 더듬고 계신 모든 분의 일상에 생명이신 주님의 평화가 깃들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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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늘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위기가 닥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보호라는 견고한 성을 쌓고, 때로는 타인을 희생시켜서라도 나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이기적인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구약성경 창세기 26장 전반부의 그랄 땅 풍경은, 흉년이라는 생존의 위기 앞에서 철저히 바닥을 드러내는 한 인간의 비루한 민낯과, 그 부끄러운 실패조차 넉넉히 덮어 안으시는 하나님의 경이로운 은혜를 묵직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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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살던 땅에 아브라함 때와 같은 큰 흉년이 듭니다(창 26:1). 먹고사는 문제가 벼랑 끝에 몰리자 이삭은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있는 그랄로 내려갑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인간의 실존을 성찰하며 "사람은 자신이 마지막이나 처음을 알지 못한 채 중간에 있음을 깨닫는다"라고 갈파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온전한 약속(처음)과 완성될 구원(마지막) 사이의 그 불확실한 '중간 지대'에서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아내 리브가가 몹시 아름다웠기에, 그곳 사람들이 아내를 빼앗으려고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짓눌린 나머지 "그는 내 누이라"(창 26:7)며 거짓말을 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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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이 본문을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한 이삭의 '수직적인 믿음의 실패'로만 해석하곤 합니다. 그러나 송민원 교수는 성경을 하나님과 인간의 위계적 질서로만 파악하는 시선에서 벗어나,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얽히고 충돌하는 이야기에 주목하는 '수평적 관점'으로 읽어낼 것을 권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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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적 시선으로 바라본 이삭의 행동은 참으로 폭력적이고 잔인합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사랑하는 아내인 리브가를 낯선 남자들의 성적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시켰습니다. 타인의 생명과 존엄을 방패막이 삼아 나의 이익을 지켜내려 한 것입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저 역시 제 외로움과 고통에서 눈을 들어 타인의 외로움, 아픔을 보려는 그 순간부터 저의 외로움과 아픔의 방의 크기가 작아지기 시작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에 눈이 먼 이삭은 아내의 아픔과 수치심을 바라보지 못한 채 오직 자기 안위라는 이기적인 골방에 갇혀버리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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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삭의 얄팍한 행동에 대해 오스왈드 챔버스는 뼈아픈 지적을 남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며 주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의 꾀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꾀가 나의 뜻을 수행하고 나의 유익을 구하는 데 사용되면 우리는 마침내 형식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나의 간교함을 축복해 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을 빙자하여 자신의 비겁한 '꾀'를 합리화하려 했던 전형적인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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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껴안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이방의 왕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호통을 칩니다.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창 26:10).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삭은 이웃을 사지로 몰아넣었는데, 도리어 이방인인 아비멜렉이 나서서 윤리적 질서를 바로잡고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창 26:11)며 수평적 정의와 보호의 울타리를 쳐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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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비겁하게 숨어버린 이삭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방 왕의 입술을 통해 그의 허위를 폭로하시고, 동시에 그를 안전하게 지켜내셨습니다. 이토록 낯설고도 압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삶의 한복판으로 모셔 들이기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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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님은 "하나님의 연주음은 스타카토 식으로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그 선율을 이해하는 사람을 일러 믿는 사람이라 말합니다"라고 통찰했습니다. 묵상은 조용하고 편안한 선율만을 기대하는 낭만적 명상이 아닙니다. 때로는 아비멜렉이라는 전혀 기대치 않았던 이방인의 질책을 통해서라도 나의 이기심을 끊어내시며 짧고 강렬하게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그 '스타카토' 연주를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내 영혼을 조율하는 치열한 영적 듣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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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묵상은 나만 살겠다고 움켜쥐었던 꾀를 내려놓고, 김기석 목사님의 표현처럼 "타자의 고통을 상상하는 능력"을 회복하는 거룩한 과정입니다. 이삭처럼 생존의 두려움 때문에 이웃을 수단으로 삼던 비루함을 십자가 앞에 내어놓고, 상처 입은 이들의 자리에 나의 마음을 포개어 넣는 진정한 교양,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나를 새롭게 빚어가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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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교우 여러분,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내가 손해 보지 않으려면 세상 사람들처럼 적당히 꾀를 부리고 타협해야 해"라며 이삭처럼 두려움의 장막 뒤에 숨어 계신 분이 있습니까? 나의 얄팍한 밑바닥이 드러날까 봐 주눅이 들고, 흠결 없는 믿음을 증명하지 못해 짙은 자책감에 빠져 계시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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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스스로 내 인생을 완벽하게 방어해 내겠다는 그 무거운 짐을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위기 앞에서도 단 한 번의 두려움 없이 행동하는 완벽한 영웅이기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아내마저 부인하며 덜덜 떨고 있는 이삭의 그 참담한 실패조차 책망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이방인의 권력을 통해서라도 기어코 그를 보호해 내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 우리의 굳센 담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겁한 우리의 꾀조차 넉넉히 덮어 선으로 바꾸어 내시는 하나님의 그 다함 없는 은총에 기대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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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 주간, 타인을 희생시켜 나를 지키려던 세상의 낡고 차가운 모범답안을 미련 없이 버리십시오. 그저 우리의 허물마저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낯선 스타카토 연주에 묵상으로 귀 기울이며, 이웃을 향해 따뜻한 연민의 손을 내미는 참된 자유와 평안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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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연약한 신앙은 캄캄한 방안에서 나 자신만 비추어 보던 작은 '거울(Mirror)'과 같습니다. 두려움이 엄습할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인을 외면한 채 거울 속의 내 상처와 생존의 안위만을 초조하게 들여다봅니다(이삭의 이기심).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삶에 낯선 은혜로 개입하실 때, 그분은 우리 손에 쥐어진 거울의 뒷면을 벗겨내어 세상을 향해 탁 트인 투명한 '창문(Window)'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내 얄팍한 꾀로 나만 지키려던 시선을 거두고,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볼 때(묵상), 우리는 비로소 내 곁에서 위기에 처한 이웃의 고통을 넉넉히 껴안으며, 세상을 향해 불어오는 주님의 따스한 사랑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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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