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4:50-67 저물녘 들판의 경청, 상실의 빈자리를 채우는 주체적 연대의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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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힘과 권위로 타인을 통제하려는 수직적 관습을 내려놓고 서로의 주체적 결단을 존중하는 '수평적 연대'를 향해 나아가며, 상실의 텅 빈 들판에 서서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듣는 '경청(묵상)'을 통해 우리를 온전히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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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하게 피어났던 봄꽃들이 어느덧 연초록 잎사귀에 고요히 자리를 내어주며, 대자연이 제각기 더 깊은 성숙의 계절로 접어드는 2026년 4월 13일 월요일 아침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내며 오늘이라는 순례의 길을 걷고 계신 광양사랑의교회 교우 여러분, 그리고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 막막한 현실 속에서 회의하며 참된 위로를 묻고 계신 모든 분의 일상에 평화의 주님이 주시는 다사로운 은총이 스며들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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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종종 위계와 서열이라는 수직적 잣대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려 듭니다. 힘 있는 자가 약한 자의 운명을 마음대로 결정하고, 타인의 목소리를 지워버리는 것을 당연한 권리처럼 여깁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구약성경 창세기 24장 후반부의 풍경은, 그토록 철저히 닫혀 있던 고대 가부장제 사회의 한복판에서, 한 여성의 주체적인 결단이 존중받고 두 상처 입은 영혼이 만나 서로를 위로하는 참으로 눈부신 '수평적 연대'의 기적을 묵직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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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우물가에서 만난 리브가의 가족들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진실하게 고백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라반과 브두엘은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창 24:50)라며 리브가를 데려가도록 허락합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곧바로 길을 떠나려는 종과 며칠만이라도 더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가족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집니다. 그때 가족들은 고대 근동의 관습으로는 도무지 상상하기 힘든 놀라운 제안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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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소녀를 불러 그에게 물으리라"(창 2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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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원 교수는 그의 책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에서, 성경을 하나님과 인간, 혹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수직적 관점'으로만 읽으려는 우리의 낡은 습관을 깨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존중과 얽힘에 주목하는 '수평적 관점'으로 읽어낼 것을 제안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여성은 아버지나 오라비의 소유물처럼 여겨지던 수직적 억압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그 견고한 수직의 벽을 허물고, 한 여성의 인격과 의지를 수평적으로 묻고 존중합니다. 가족들의 부름에 리브가는 단호하고도 명징하게 대답합니다. "내가 가겠나이다"(창 2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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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위대한 결단은 타인의 강요에 의한 맹목적인 끌려감이 아니었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그 거대한 구원 서사 속으로 자신의 운명을 기꺼이 던져 넣는 자유인의 눈부신 선언이었습니다. 이기주 작가가 일깨워 주었듯 언어에는 저마다의 온도가 있습니다. 약자의 입을 틀어막고 운명을 강제하는 제국의 언어가 영혼을 꽁꽁 얼어붙게 만드는 영하의 온도라면, "그에게 물으리라"는 존중의 언어와 "내가 가겠나이다"라는 자발적 순명의 언어는 굳어버린 세상을 단숨에 녹여내는 가장 따뜻하고 생기 넘치는 은총의 온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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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은 이제 가나안 땅, 저물어 가는 들판으로 옮겨집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어머니 사라를 떠나보낸 깊은 상실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본문은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창 24:63)라고 기록합니다. 이 텅 빈 들판에서 이삭이 한 '묵상'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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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의 사상을 성찰한 찰스 링마는 이렇게 갈파합니다. "묵상은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이 듣기를 통해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미래에 대한 소망, 과거의 해결, 무의미함 앞에서의 인내를 가져다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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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의 묵상은 고요한 방안에서 지식을 해부하는 관념적인 명상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과 고독이라는 인생의 무의미함 한복판(들판)에 서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경청'하는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기다림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위로를 묵상하며 눈을 들었을 때, 스스로 결단하여 먼 길을 달려온 리브가와 마주치게 됩니다. 이삭은 그녀를 어머니의 장막으로 인도하여 아내로 맞이하고,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창 24:67)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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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일 변호사는 인간의 꺾인 마음을 보듬으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 역시 제 외로움과 고통에서 눈을 들어 타인의 외로움, 아픔을 보려는 그 순간부터 저의 외로움과 아픔의 방의 크기가 작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를 잃고 슬픔의 방에 갇혀 있던 이삭과, 정든 고향과 가족을 떠나 낯선 땅에 도착한 외로운 리브가가 만났을 때, 두 사람은 서로의 아픔을 바라보며 깊이 끌어안았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하늘에서 벼락처럼 떨어지는 기적이 아니라, 이렇듯 연약한 두 존재가 수평적으로 만나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다정한 연대와 환대를 통해 우리 삶에 임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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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혹시 삶의 여정에서 이삭처럼 깊은 상실감과 고독의 들판에 홀로 버려진 것 같아 회의감에 빠진 분이 계십니까? 남들처럼 번듯하게 신앙의 훌륭한 업적을 증명해 내야만 하나님이 나를 위로해 주실 것이라는 율법적인 강박에 짓눌려 계시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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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피곤하고 무거운 증명의 짐을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감정도 없이 명령에 복종만 하는 수직적인 노예가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리브가처럼 우리의 주체적인 마음과 결단을 기다려 주시며, 이삭처럼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인내심을 가지고 경청(묵상)하는 우리의 그 연약한 모습조차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스스로 슬픔을 이겨낼 만큼 강인해서가 아니라, 상처투성이인 우리의 빈 장막에 누군가를 보내시어 마침내 수평적인 위로와 평화를 엮어내시는 하나님의 그 섬세하고도 다함 없는 자비에 기대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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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 주간, 힘으로 타인을 통제하려는 세상의 수직적 우상들을 멀리하십시오. 그저 저물녘 들판에 서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의 발걸음 소리를 인내심을 가지고 경청하며(묵상), 내 곁에 다가온 이웃과 다정한 위로의 온기를 나누는 복된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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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 여정은 차갑고 어두운 밤을 지새우는 나그네 곁에 피워진 '저물녘의 밑불(Embers)'과 같습니다. 하늘 높이 치솟으며 모든 것을 한순간에 집어삼키는 거대한 불기둥(수직적 권력과 강요)은 위협적일 뿐 사람 곁에 온기를 오래 남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재 속에서 스스로를 고요히 태우며 은은하게 붉은빛을 머금은 밑불은 결코 자신을 과시하지 않으면서도, 밤새도록 떨고 있는 나그네의 굳은 몸을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부드럽게 녹여줍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내 방식대로 통제하려는 헛된 수고를 멈추고, 서로의 결단을 존중하며 상실의 곁을 조용히 지켜줄 때(묵상), 우리의 척박한 일상은 차가운 세상을 훈훈하게 데우는 가장 다정하고도 꺼지지 않는 은총의 화톳불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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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