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3:1-20 나그네의 슬픔이 평화의 영토가 될 때, 막벨라 굴에 스민 수평적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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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무력한 상실의 고통 속에서 종교적 특권이나 폭력을 앞세우는 세속의 방식을 거부하고, 정당한 값을 치르며 이웃과 평화를 엮어내는 '수평적 연대'를 향해 나아가며, 그 캄캄한 슬픔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내 영혼의 '둥지를 트는(묵상)' 눈부신 은혜의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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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 제각기 머금었던 생명의 진액을 아낌없이 뿜어내며, 흩날리는 벚꽃의 낙화 너머로 기어코 푸른 연초록 잎사귀들을 밀어 올리는 4월의 아름다운 봄날입니다. 눈부신 생명의 향연 속에서도 문득문득 찾아오는 삶의 짙은 허무와 유한함 앞에 남몰래 눈시울을 적시며 오늘이라는 순례의 길을 걷고 계신 광양사랑의교회 교우 여러분, 그리고 척박한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신앙의 회의를 안고 참된 진리를 찾고 계신 모든 분의 일상에 생명이신 주님의 따스한 위로가 스며들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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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늘 힘과 소유를 우상처럼 떠받듭니다. 더 많은 땅을 차지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 타인을 호령하는 것을 성공이라 부추깁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구약성경 창세기 23장의 풍경은, 그토록 치열한 세속의 욕망과는 정반대로, 아내를 잃고 통곡하는 한 늙은 나그네의 먹먹한 슬픔과, 그 비애의 자리에서 힘이 아닌 '환대와 평화'로 이웃과 관계를 맺어가는 숭고한 궤적을 묵직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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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평생을 하나님의 약속 하나에 의지하여 떠돌았습니다. 그러나 헤브론 땅에서 평생의 반려자인 사라가 백이십칠 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을 때, 그는 아내의 시신을 누일 손바닥만 한 땅 한 평조차 없는 처량한 "나그네며 거류하는 자"(창 23:4)에 불과했습니다. 천하의 아브라함조차 죽음이라는 거대한 절망 앞에서 "슬퍼하며 애통하다가"(창 23:2) 엎드려 우는 나약한 인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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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문을 대할 때, 우리는 종종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사들인 것을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 '위대한 영적 승리'로만 읽어내려 합니다. 하지만 송민원 교수는 그의 책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에서 성경을 읽는 우리의 낡은 습관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과 인간의 위계적 질서로만 바라보는 '수직적 관점'을 넘어, 인간과 인간, 이웃과 타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관계의 얽힘에 주목하는 '수평적 관점'으로 본문을 읽어낼 것을 권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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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일 변호사는 인류의 비루한 실존과 고대 역사를 성찰하며 "태초에 질문과 폭력이 있었습니다"라고 갈파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땅을 차지하는 가장 흔한 방식은 힘과 폭력이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수직적 종교의식에만 사로잡힌 광신도였다면, 헷 사람들을 향해 "이 땅은 하나님이 내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이니 당장 내놓으라"며 오만하게 권리를 주장하거나 폭력을 행사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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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평적 시선으로 바라본 아브라함의 모습은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그는 이방인인 헷 사람들을 향해 몸을 굽혀 두 번이나 절을 합니다(창 23:7, 12). 헷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창 23:6)라 칭송하며 묘실을 거저 내어주겠다고 호의를 베풀 때에도, 아브라함은 그들의 호의를 공짜로 편취하지 않고 에브론에게 당시 은 사백 세겔이라는 막대한 값을 정당하게 지불합니다(창 23:16). 그는 종교적 특권 의식으로 이웃을 짓밟은 것이 아니라, 극도의 슬픔 속에서도 이방인들과의 수평적 연대를 통해 서로를 존중하며 가장 평화롭고 정당한 방식으로 자신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타인에게 무례를 범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오늘날의 이기적인 종교인들에게, 아브라함의 이 겸손하고도 단정한 태도는 참된 거룩이 무엇인지를 서늘하게 일깨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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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슬픔의 한복판에서도 타인에 대한 예의와 다정함을 잃지 않도록 우리 영혼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의 여정』에서 박대영 목사님은 묵상을 가리켜 어미 새가 새끼를 품기 위해 나뭇가지를 물어다 집을 짓는 “둥지 본능(nesting instinct)”에 비유했습니다. 세상의 거친 폭력과 예기치 않은 상실의 칼바람 앞에 맨몸으로 내동댕이쳐지지 않도록, 매일매일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든든한 둥지를 내면에 틀고 우리 영혼을 그 은총의 품 안에 온전히 거주하게 하는 치열한 생존의 행위가 바로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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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성경을 묵상한다는 것은 깊은 '공감'의 자리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수천 년 전, 낯선 이방 땅에서 사랑하는 아내의 주검을 안고 막막함에 떨었을 아브라함의 그 비통한 처지 속으로 조용히 잠입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상실과 아픔을 그의 눈물에 포개어 보며, 이웃의 고통을 향해 내 영혼의 폭을 한 뼘 더 넓히는 거룩한 마음의 확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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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혹시 삶의 모진 풍파 속에서 남들처럼 번듯한 내 집 한 채, 그럴싸한 성취 하나 이루지 못해 깊은 회의와 좌절에 빠져 계신 분이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치열하게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왜 내 손에 쥐어진 것은 차갑고 어두운 '막벨라 굴(무덤)' 하나뿐이냐며 남몰래 원망의 눈물을 훔치신 적은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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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무언가 대단한 땅을 정복하고 빼앗아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는 무거운 강박을 십자가 앞에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무자비한 정복자가 되어 세상을 힘으로 굴복시키기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평생 소유했던 것은 오직 죽음을 품은 작은 동굴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캄캄한 죽음의 땅, 보잘것없는 슬픔의 굴을 마침내 생명이 약동하는 약속의 영토를 향한 위대한 씨앗으로 바꾸어 내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얼마나 남들보다 우월한 자리를 쟁취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나그네처럼 길을 잃고 우는 우리의 가장 초라한 슬픔까지도 기어코 품어 안아 주시며, 끝내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빚어내시는 하나님의 그 맹렬하고도 다함 없는 자비에 기대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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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 주간, 타인을 배제하고 짓눌러 내 영역을 확장하려는 세상의 낡은 방식을 거절하십시오. 비록 우리 손에 쥐어진 것이 슬픔의 작은 굴 하나뿐일지라도, 그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영혼의 둥지를 틀며(묵상), 이웃과 더불어 따스한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복된 여러분의 일상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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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 여정은 기나긴 세월을 견뎌내며 몸통에 새겨지는 나무의 '나이테(Tree Rings)'와 같습니다. 나무는 따스한 봄과 여름의 풍요로움 속에서만 자라지 않습니다. 뼈가 시리도록 혹독한 겨울의 추위와 상실의 아픔(사라의 죽음과 나그네의 서러움)을 온몸으로 견뎌낼 때, 비로소 그 시련의 시간은 가장 단단하고 짙은 색의 나이테로 나무의 중심에 둥글게 새겨집니다. 우리가 내 힘으로 시련을 당장 회피하려 허둥대는 수고를 멈추고, 우리 삶에 찾아온 상실조차도 평화와 존중이라는 수평적 은혜로 묵묵히 껴안을 때(묵상), 그 캄캄했던 슬픔의 흔적들은 마침내 우리 영혼이 어떤 거센 비바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생명의 창공을 향해 우뚝 솟아오르게 하는 가장 견고하고도 아름다운 내면의 무늬로 완성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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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