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1-24 멈춰선 칼끝에 피어난 은총, 무고한 희생을 거부하시는 생명의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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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이란, 신을 달래기 위해 약자를 제물로 바치라 강요하는 세상의 폭력적인 모범답안을 부수고, 아이의 생명을 구원하심으로 ‘수평적 연대’의 소중함을 일깨우신 창조주의 음성을 우리 영혼의 '천상 회의(묵상)'로 모셔 들여 일상에 번역해 내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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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의 화려한 낙화가 지나간 빈자리마다, 기어코 짙푸른 새 잎사귀들을 밀어 올리며 숨 가쁜 생명의 호흡을 이어가는 2026년 4월의 경이로운 봄날입니다. 생명이 약동하는 이 아름다운 계절의 한복판에서도, 저마다 설명할 수 없는 삶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오늘이라는 순례의 길을 걷고 계신 광양사랑의교회 교우 여러분, 그리고 짙은 안개 같은 현실 앞에서 회의하며 참된 진리를 묻고 계신 모든 분께 평화의 주님이 주시는 다정한 위로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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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종종 소수의 강자를 위해 다수의 약자를 희생시키는 잔혹한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대의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고, 그것을 거룩한 헌신으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구약성경 창세기 22장의 모리아 산 풍경은, 그토록 끔찍한 폭력을 요구하는 낡은 세속의 종교관과, 그 벼랑 끝에서 생명을 기어코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맹렬한 은총이 묵직하게 교차하는 현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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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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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랫동안 이 본문을 아브라함의 영웅적인 순종을 칭송하는 텍스트로만 읽어왔습니다.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쳤더니 복을 받았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송민원 교수는 그의 책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에서, 우리가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미 정답이라 굳게 믿고 있는 얄팍한 '모범답안'을 과감히 비워내야 한다고 통찰합니다. 나아가 그는 성경을 하나님과 인간의 위계적 복종으로만 바라보는 '수직적 관점'을 넘어, 인간과 인간, 생명과 생명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는 '수평적 관점'으로 읽어낼 것을 제안합니다. 수평적 시선으로 이 본문을 다시 읽을 때, 비로소 제단에 묶여 공포에 떠는 힘없는 소년 이삭의 젖은 눈동자가 우리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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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일 변호사는 고대 인류의 비루한 실존을 통찰하며 "태초에 질문과 폭력이 있었습니다"라고 갈파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신의 분노를 달래거나 제국의 번영을 위해 어린아이를 불태워 바치는 인신공기(Human Sacrifice)는 몹시도 흔한 '수직적 폭력'이었습니다. 김기석 목사님 역시 맑은 소리를 내기 위해 아기를 쇳물에 던져 넣었다는 에밀레종의 전설을 언급하시며, 세상의 위대한 아름다움이나 성취 이면에는 늘 무고한 자들의 끔찍한 희생이 은폐되어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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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떨리는 손으로 칼을 높이 쳐들었을 때, 침묵을 찢고 다급한 음성이 하늘을 가릅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창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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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주 작가가 일깨워 주었듯 언어에는 저마다의 온도가 있습니다. 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약자의 생명을 짓밟는 제국의 언어는 영혼을 얼어붙게 하는 차가운 영하의 온도입니다. 그러나 관습적인 폭력을 멈춰 세우시고 벼랑 끝에 선 생명을 단숨에 안아 올리시는 하나님의 이 다급한 부르심은, 세상을 살려내는 가장 맹렬하고 뜨거운 생명의 온도입니다. 하나님은 수직적인 종교적 열심을 증명하기 위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수평적 생명 관계가 파괴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칼을 멈춰 세우심으로써, 인간의 생명을 수단으로 삼는 모든 세상의 폭력과 영원히 결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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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경이롭고 따뜻한 창조주의 사랑을 우리 일상 한복판으로 모셔 들이기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차준희 교수는 묵상을 가리켜 "하나님의 천상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묵상이란 내 이성의 잣대로 성경을 재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복을 차려입고 엄위로우신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 타인을 밟고 올라서야 내가 산다고 가르치는 세속의 폭력적인 세계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명 존중의 말씀으로 내 비뚤어진 내면을 철저히 교정받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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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정민영 선생은 묵상을 가리켜 "통전적 번역"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살려내신 그 하나님의 긍휼을 그저 2천 년 전의 옛이야기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의 삶의 자리에서 약하고 소외된 이웃의 손을 잡아주는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으로 실시간 번역해 내는 치열한 영적 모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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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는 하나님께 이삭처럼 귀한 것을 바치지 못해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며 깊은 회의와 자책감에 빠진 분이 계십니까? 대단한 희생과 헌신을 증명해 내야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무거운 율법의 강박에 짓눌려 계시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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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무언가 값비싼 것을 바쳐서 신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그 폭력적이고 무거운 모범답안을 십자가 앞에 조용히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한 희생을 요구하며 쥐어짜는 가학적인 폭군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두려움에 떠는 우리를 위해 수풀에 친히 숫양을 걸리게 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내가 손에 쥔 칼을 얼마나 굳세게 휘두르며 결단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자격 없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참된 어린 양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그 압도적인 자비에 온전히 기대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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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 주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내 곁의 이웃을 피곤하게 하고 희생시키던 차가운 습관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약자의 생명을 기어코 품어 안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천상 회의(묵상)의 자리에서 깊이 들으시며, 일상 속에 따뜻한 생명의 언어를 번역해 내시는 복된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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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 여정은 춥고 거센 겨울 산자락을 든든하게 막아서고 있는 '방풍림(Windbreak Forest)' 아래 머무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이치와 제국의 논리는 칼바람을 잠재우기 위해 가장 힘없고 연약한 나무(이삭)를 꺾어 제물로 바치라고 우리를 매섭게 몰아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람과 맞서 싸워 스스로를 증명하라고 다그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주님 친히 거대하고 다정한 은총의 방풍림이 되시어, 세상을 향해 쏟아지는 진노와 폭력의 바람을 당신의 몸으로 온전히 막아내 주십니다. 우리가 내 알량한 헌신으로 바람을 피하려는 헛된 수고를 멈추고, 우리를 덮어주시는 그 은혜의 숲 그늘 아래 고요히 머무르며 서로의 체온을 나눌 때(묵상), 우리의 삶은 비로소 세상이 앗아갈 수 없는 영원한 평화와 수평적 사랑의 넉넉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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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