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1-14 밤바다의 허무를 덮는 새벽의 식탁, 나를 살리시는 다정한 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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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밤새워 그물을 던져도 빈 그물뿐인 우리 삶의 피곤하고 허망한 바다로 찾아오시어, 정죄 대신 따뜻한 숯불과 밥상을 내어주시는 주님의 환대에 온전히 안기며, 내 힘으로 살아가려는 고집을 꺾고 그분의 거대한 사랑의 이야기 속으로 나를 편입시키는(묵상) 은총의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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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걷히고 푸스름한 여명이 찾아오는 새벽녘의 고요함을 좋아하시는지요? 온갖 소음이 잠든 시간, 비로소 내면의 깊은 숨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는 아침입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의 분주함에 쫓기다 문득 길을 잃은 것 같은 헛헛함으로 이 자리에 앉으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무거운 짐에 지쳐 신앙의 언저리에서 서성이고 계신 모든 분께 부활하신 주님이 차려주시는 따뜻한 식탁의 위로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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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수고한 만큼의 보상이 주어져야 마땅하다고 가르치지만, 현실은 종종 우리의 간절한 수고를 차갑게 배반하곤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21장의 갈릴리 바다 풍경 역시, 십자가의 참혹함과 부활의 혼란 속에서 길을 잃고 짙은 무력감에 빠져 있는 제자들의 애처로운 실존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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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요 21:3). 베드로의 이 한마디에는 짙은 체념이 배어 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사도의 부르심을 뒤로한 채, 자신들에게 가장 익숙하고 안전해 보이는 옛 삶의 자리로 퇴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음에도 돌아온 것은 철저한 '빈 그물'이었습니다. 송민원 교수는 우리가 성경을 읽고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제가 들어왔던 말들을 버리고 제가 듣고 싶은 말들을 버리는 힘겨운 싸움"을 겪어야 한다고 갈파했습니다. 제자들은 평생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였지만, 자신들의 경험과 알량한 지식이라는 낡은 그물로는 생명의 기쁨을 단 한 마디도 건져 올릴 수 없었습니다. 내 힘으로 내 인생을 책임져 보겠다는 인간의 굳센 자아가 철저히 붕괴하는 절망의 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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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날이 새어갈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캄캄한 실패의 바닷가에 서 계셨습니다(요 21:4). 한동일 변호사는 삶의 깊은 성찰을 나누며 "내가 어두우면 상대의 밝음이 보일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밤새 이어진 실패와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라는 짙은 어둠 속에 갇혀 있었기에, 제자들은 비로소 여명 속에서 다가오시는 주님의 그 압도적인 밝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영적 준비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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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배신하고 도망쳐 옛 생활로 돌아간 제자들을 향해 윽박지르지 않으십니다. 김기석 목사님이 묵상하셨듯, "예수님에게는 억지가 없습니다. 제자들의 무지와 무능을 탄식하실 뿐 그들에게 상처가 되는 말은 하지도 않으시고, 화를 내지도 않습니다. 그저 믿어주시고 기다리실 뿐입니다". 주님은 그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요 21:6) 하시며, 절망을 향해 있던 그들의 삶의 방향을 생명의 방향으로 부드럽게 틀어주십니다. 순종의 결과는 일백쉰세 마리라는 은총의 만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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뭍에 올라온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책망이 아니라 숯불 위에 놓인 생선과 떡이었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 21:12). 언어에는 저마다의 온도가 있습니다. 자격을 묻고 실패의 책임을 추궁하는 세상의 말은 영혼을 얼어붙게 하지만, 밤새 허기지고 지친 실패자들을 향해 건네신 주님의 이 밥상 초대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맹렬한 은총의 온도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당신을 부인했던 대제사장 뜰의 그 차가운 '숯불'의 트라우마를, 친히 구워내신 사랑의 '숯불'로 말끔히 덮어 치유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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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압도적인 환대의 식탁에 우리 삶을 들이밀고 그 사랑을 받아먹는 거룩한 행위가 바로 '묵상'입니다.『묵상의 여정』에서 박대영 목사님은 "신앙은 둘 중 어느 한 이야기를 선택하여 그 이야기의 일부가 되기로 결심하는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묵상이란, 내가 이룩한 얄팍한 업적을 진열하며 스스로를 증명해 내는 지적 노동이 아닙니다. 빈 그물밖에 남지 않은 나의 초라하고 남루한 실패의 이야기를 그대로 들고 나아가, 나를 살리기 위해 친히 조반을 지으시며 기다리시는 주님의 그 거대한 구원의 이야기 속으로 온전히 내 삶을 편입시키는 치열하고도 아름다운 항복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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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혹시 밤새 수고하여도 남는 것 없는 팍팍한 일상에 회의를 느끼고 계십니까? 뜻대로 풀리지 않는 현실 속에서 "나는 왜 이리도 자격이 없고 무능할까" 자책하며 빈 그물만 바라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더 훌륭한 헌신의 열매를 맺어 증명해야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것이라는 무거운 율법의 짐에 짓눌려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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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헛된 수고의 그물을 십자가 앞에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주님은 완벽하고 강인한 제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밤새 수고하고 지친 당신의 자녀들을 화톳불 가로 불러 모아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어 하십니다. 빈 그물이면 어떻습니까? 우리의 텅 빈 연약함이야말로 주님의 은혜가 가장 풍성하게 채워질 완벽한 조건입니다. 이번 한 주간, 내 힘으로 삶을 움켜쥐려던 고집을 꺾고, "와서 조반을 먹으라" 부르시는 주님의 다정한 음성에 묵상으로 온전히 기대어, 참된 쉼과 생명을 누리시는 복된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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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영혼은 볼품없이 빚어진 '투박한 질그릇'과 같습니다. 질그릇은 화려한 금그릇이나 은그릇처럼 제 스스로 번쩍이는 빛을 내지 못하며, 세상의 눈에는 거칠고 투박하여 무가치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질그릇의 진짜 가치는 그 투박한 ‘비어 있음’에 있습니다. 완전히 비어 있기에, 오히려 주인이 담아주는 가장 따뜻한 생명의 국밥(은혜)을 온전히 식지 않게 품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나를 화려하게 꾸미려는 헛된 덧칠을 멈추고, 빈 그릇 같은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 앞에 그대로 내어놓을 때(묵상), 주님은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가장 따뜻한 하늘의 양식으로 우리를 채워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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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