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1-16 세상 한복판에 남겨진 자들을 위한 영원한 중보, 그 은총의 투명성

by 평화의길벗 posted Mar 2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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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1-16 세상 한복판에 남겨진 자들을 위한 영원한 중보, 그 은총의 투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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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고단한 세상 밖으로 도피하려는 얄팍한 모범답안을 버리고,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우리를 지키시는 주님의 애끓는 중보기도를 오감으로 삼키며(묵상), 내 안의 욕망을 닦아내어 세상을 비추는 거룩한 투명성을 회복하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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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화사하게 피어났던 산수유와 매화가 자리를 내어준 가지마다, 물오른 연초록 잎새들이 봄바람에 수줍게 떨리는 2026년 3월 27일의 아침입니다. 하루하루 밥벌이의 무거움을 견뎌내며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묵묵히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짙은 모호함 속에서 흔들리며 참된 진리의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께 하늘의 넉넉한 평화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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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늘 치열하고 고단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선한 의도조차 오해받고, 진실하게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 세상의 차가운 냉소 앞에 부딪혀 길을 잃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끔찍한 수난을 앞두고, 홀로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과 우리들을 위해 올리신 가장 길고도 장엄한 대제사장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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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첫머리에서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요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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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님은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가을날>의 한 구절을 쓸쓸하게 읊조리게 된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시인이 남국의 햇살을 베풀어 남은 과일들이 무르익기를 구했듯,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라는 캄캄한 '때'를 앞두고서도 자신이 아니라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의 영혼이 온전히 무르익기를 간구하고 계십니다. 십자가의 치욕조차 아버지가 맡기신 사랑의 사명을 완수하여 생명을 살려내는 '영광'으로 껴안으시는 주님의 숭고함 앞에서는 그 어떤 인간의 수사도 길을 잃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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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도는 철저히 '세상에 남겨질 사람들'을 향해 있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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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신앙이 깊어지는 것을, 이 지긋지긋하고 팍팍한 세상의 현실에서 훌쩍 벗어나 저 높은 영적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곤 합니다. 우리는 종종 고통이 없는 평안이나 현실 도피라는 자기중심적인 모범답안을 쥐고 신앙을 재단하려 합니다. 그러나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리켜 "세상 안에서, 그러나 세상의 것이 아닌"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통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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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우리가 무균실 같은 종교적 울타리 안으로만 숨어들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요 17:14)라고 기도하십니다. 냄새나고 상처 많은 뻘밭 같은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가되, 세상을 지배하는 미움과 폭력, 탐욕의 방식에는 동화되지 않은 채 묵묵히 은총의 길을 걸어가기를 응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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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모순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현실을 버텨내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우리는 보통 묵상이라 하면, 촛불을 켜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고요히 앉아 있는 식물적이고 정적인 자세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김기석 목사님은 "묵상은 동물적이다"라고 일깨워 주십니다. 사자가 먹을 것을 앞에 두고 그르렁거리며 냄새를 맡고, 혀로 핥고, 씹어 삼키듯, 나를 위해 애끓는 기도를 올리시는 주님의 말씀을 내 삶의 구체적인 감각으로 씹어 삼켜 나의 피와 살로 번역해 내는 치열한 행위가 참된 묵상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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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묵상은 거룩한 "자기 닦음"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참회록>에서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을 밤이면 밤마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내려 했듯, 묵상은 내 마음에 매일같이 드리우는 이기심과 얄팍한 방어 본능을 치열하게 닦아내는 영적 노동입니다. 잘 닦인 유리창이 바깥의 풍경을 고스란히 통과시켜 보여주듯, 우리 자신을 투명하게 닦아내어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넉넉한 사랑을 왜곡 없이 보여주는 거룩한 '투명성'을 회복하는 것이 곧 묵상의 지향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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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세상의 유혹에 이토록 쉽게 무너지는데, 내가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까?" 하며 깊은 회의와 자책에 빠진 분이 계십니까? 억지로라도 대단한 종교적 실적을 내서 하나님께 인정받아야 한다는 무거운 율법의 강박에 짓눌려 계시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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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동일 변호사는 성경을 강독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기도를 통해 변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흠집 하나 없는 완벽한 유리창이 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언가를 증명해 내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입니다. 구원은 전능자이신 주님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악에 빠지지 않게 지켜주소서"라고 눈물로 중보기도하고 계심을 알아차리고, 그 맹렬한 은혜의 파도에 나의 연약함을 온전히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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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 알량한 힘으로 세상과 맞서 싸워 이기려는 어깨의 무거운 힘을 십자가 아래 살며시 빼십시오. 세상의 거센 풍파가 우리를 흔들지라도, 세상의 창조주이신 주님의 그 뜨거운 중보기도가 우리를 든든히 에워싸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이번 한 주간, 우리를 짓누르는 증명의 강박을 훌훌 벗어버리고, 세상 한가운데서 하늘의 맑은 빛을 넉넉히 통과시키는 다정하고 투명한 은총의 창문으로 평안히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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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 여정은 수천 미터 깊은 바다로 내려가는 '잠수종(Diving Bell)'과 같습니다. 잠수종은 숨 막히는 수압과 칠흑 같은 어둠이 지배하는 바다 한복판(세상)으로 깊숙이 내려가지만, 결코 바닷물에 침수되거나 그 압력에 짓눌리지 않습니다. 수면 위에서부터 끊임없이 맑은 산소를 공급해 주는 든든한 '생명줄'이 온전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서 상처받고 고립되어 숨이 막히는 것 같을지라도,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맹렬한 중보기도가 생명줄처럼 우리 영혼에 단단히 잇대어져 있음을 묵상으로 깊이 들이마실 때, 우리는 세상 한가운데서도 결코 세상에 삼켜지지 않고 마침내 맑은 생명의 호흡을 이웃과 나누는 거룩한 통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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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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