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5:1-17 억지 열정을 내려놓고, 은총의 수액이 흐르는 사랑의 이야기에 머물다

by 평화의길벗 posted Mar 22,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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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1-17  억지 열정을 내려놓고, 은총의 수액이 흐르는 사랑의 이야기에 머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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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열매를 맺으려 헐떡이는 율법적 강박과 모범답안을 비워내고, 우리를 종이 아닌 ‘벗’으로 부르시며 생명의 수액을 아낌없이 공급하시는 참포도나무이신 주님의 이야기에 온전히 ‘머무르는(묵상)’ 은총의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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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의 빗장을 풀고, 메말랐던 나뭇가지마다 보이지 않는 생명의 수맥이 차올라 기어코 연둣빛 새싹을 밀어 올리는 2026년 3월의 경이로운 봄날입니다. 저마다의 무거운 삶의 짐을 짊어지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의 깊은 회의 속에서도 여전히 생명의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께 평화의 주님이 주시는 따뜻한 위로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증명'하라고 다그칩니다. 뚜렷한 성과와 열매를 내놓지 못하면 가차 없이 도태되는 혹독한 경쟁 사회 속에서, 우리는 나무에서 잘려 나간 가지처럼 바짝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조차 남들보다 더 번듯한 종교적 열매를 맺어 인정받으려는 무거운 의무감으로 다가올 때가 참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15장의 다락방 강화는, 그렇게 소진되어 버린 우리 영혼을 향해 주님이 건네시는 가장 부드럽고도 강력한 은총의 초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난을 앞둔 비장한 밤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읽으며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한다'는 결과에 집착하곤 합니다. 열매가 없으면 불에 던져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라도 종교적 열심을 짜내려 발버둥 칩니다. 하지만 주님이 강조하신 방점은 '열매'가 아니라 '거함(Abide)'에 있습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는 것은 가지 스스로 진액을 만들어내는 노동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저 나무에 든든히 붙어 나무가 길어 올린 생명의 수액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입니다.


송민원 교수는 그의 책에서, 우리가 성경을 온전히 읽어내기 위해서는 언제나 두 가지와 싸워야 한다고 통찰합니다. 하나는 교회와 학교에서 듣고 배워 이미 정해놓은 ‘모범답안’과의 싸움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을 내가 원하는 식으로 읽어내려는 ‘자신의 욕망’과의 싸움입니다. 이 두 가지를 비워내는 힘겨운 싸움의 끝에야 비로소 성경은 속살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힘으로 무언가를 쟁취하고 증명해야 한다는 세속적 욕망과 율법주의라는 모범답안에 갇혀, "내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고 두 팔 벌려 안아주시는 주님의 다정한 본심을 오해하곤 했습니다.


이토록 넉넉한 주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명령에 복종해야만 밥값을 하는 일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요 15:15)라며 우리를 당신의 가장 내밀한 벗으로 격상시켜 주십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사랑받고 인정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주의 창조주께서 비루하고 흠 많은 우리를 '나의 친구'라고 호명하시고 인정해 주실 때, 우리의 상처 난 자아는 치유되고 비로소 가장 나다운 생명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기주 작가가 말했듯 세상의 말들은 우리를 평가하고 찌르는 차가운 온도를 지녔지만, 우리를 벗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말씀은 벼랑 끝에 선 영혼을 기어코 살려내는 펄펄 끓는 생명의 온도를 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사랑 안에 온전히 거하며 그 수액을 받아 마시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은 이야기입니다. 1학년 아이가 아빠를 기다리며 쓴 삐뚤빼뚤한 짧은 글을 통해서도 아빠의 다채로운 사랑과 체온을 느끼듯이, 성경이라는 거대한 이야기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이 실시간으로 나를 껴안아 주심을 깨닫고 기대하는 시간이 곧 묵상입니다. 또한 묵상은 방황과 귀환입니다. 깊이 사랑하면 상대방이 건넨 한마디 말, 작은 표정 하나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일까, 어쩌면 이런 사정 때문은 아니었을까?' 상상력을 총동원해 묻고 또 물으며 혼자 미소 짓기도 하는 연인들의 애틋한 헤아림, 그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우리를 벗이라 부르신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이의 연애편지처럼 읽고 그 깊은 의미 속으로 기쁘게 귀환하는 것이야말로 가지가 포도나무에 온전히 붙어 있는 방식입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신앙의 길을 걸으며 "나는 왜 이토록 열매가 없을까?", "나의 헌신은 왜 늘 이토록 초라할까?" 자책하며 회의에 빠져 계신 분이 있습니까? 더 뜨겁게 봉사하지 못하는 자신을 채찍질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계신가요?


그러나 김기석 목사님은 일찍이 “우리는 열정적인 사람의 큰 소리는 때로 강박적이고 지나친 열정은 폭력적임을 너무 오랫동안 경험해왔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억지로 짜내는 인간적 열심과 종교적 강박은 결국 나 자신을 소진시키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폭력이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피곤한 실적이 아니라, 주님 품에 머물며 누리는 안식과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선언을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나무에 찰싹 붙어있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악력(握力)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격 없는 우리를 먼저 찾아와 당신의 몸에 접붙이시고 기어코 생명의 진액을 흘려보내시는 주님의 그 맹렬하고도 압도적인 은총 덕분입니다. 이번 한 주간, 무엇을 더 해야 한다는 율법의 무거운 짐을 십자가 아래 살며시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내 곁에 다가와 "너는 내 사랑하는 벗이다"라고 속삭이시는 주님의 생명 이야기(묵상) 속에 영혼의 닻을 내리십시오. 우리가 그분의 사랑 안에 평안히 쉴 때, 우리 삶의 메마른 가지 끝에서도 기어코 세상이 줄 수 없는 향기로운 은혜의 꽃망울이 툭, 툭 터져 오를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낡고 메마른 '스펀지'가 바다에 잠기는 것과 같습니다. 스펀지가 스스로의 힘으로 수분을 만들어내려 쥐어짜는 것은 헛된 고통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저 힘을 빼고 광활한 바다(주님의 은총) 한가운데로 자신을 푹 던져 머무르게 할 때, 스펀지의 텅 빈 공간마다 생명의 물결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마침내 촉촉하고 생기 넘치는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게 됩니다. 억지로 열매를 맺으려는 수고를 멈추고 주님의 사랑이라는 깊은 바다에 우리 영혼을 온전히 맡길 때, 참포도나무이신 그분의 생명력이 우리의 일상을 가장 눈부시고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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