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1-11 삼백 데나리온을 깬 사랑의 향기, 계산을 넘어선 환대의 순간

by 평화의길벗 posted Mar 1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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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1-11 삼백 데나리온을 깬 사랑의 향기, 계산을 넘어선 환대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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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모든 경제적 계산과 종교적 효율성 논쟁을 잠재우고, 현재의 순간에 전부를 바친 한 여인의 파격적인 헌신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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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나무들이 차가운 겨울을 뚫고 새순을 내미는 생명의 계절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여전히 효율과 타산이라는 냉정한 잣대 속에서 숨 가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가성비'를 따지고, '최대 이익'을 좇는 셈법으로 영혼마저도 계량하려 합니다.


요한복음 12장은 바로 이 계산의 세계에 던져진 파격적인 환대(歡待)의 사건을 기록합니다. 유월절 엿새 전, 나사로의 집에서 열린 잔치. 이 식탁에는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가 '함께 앉아' 있었고 (요12:2, 개역한글), 마르다는 분주히 '일을 맡아' 섬기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기적이 일상으로 스며든 순간, 이 평범한 풍경을 깨뜨린 이가 바로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는 순전한 나드 향유,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값비싼 기름을 들고 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요12:3). 삼백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일 년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이는 단순한 돈이 아니라, 한 가족의 1년 치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미래의 가능성'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그 미래를, '지금-여기'의 사랑의 순간을 위해 통째로 깨뜨려 버렸습니다.


이 행위는 모든 경제적 논리를 무너뜨리는 '불합리한 사랑'의 선언이었습니다. 한동일 교수의 말처럼,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손해가 되는지 계산하지 않고, 그냥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이 바로 그러합니다. 그것은 종교적 의무나 체면치레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존재 전부를 내어드린 '순전한 현존(現存)'의 예배였습니다.


그리고 이 파격적인 사랑의 향기는 곧바로 차가운 계산의 그림자를 불러왔습니다.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는 즉각적으로 반발합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요12:5).


유다의 말은 겉으로 보기에 지극히 '도덕적이고', '효율적'이며, '사회 참여적'인 언어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저자는 그가 "도둑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은 것을 훔쳐 감이러라"며 그의 의도가 비열한 사적 이익에 있었음을 폭로합니다 (요12:6).


유다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Sell it! Give it to the poor!)라는 행위의 질문에 갇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Is my love for Jesus absolute?)라는 존재의 질문을 놓쳤습니다. 송민원 교수의 깊은 묵상처럼, 우리가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며 나아가야 할 길은, 유다처럼 삶의 모든 것을 '쓸모'라는 잣대로 재단하는 실용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유다처럼 신앙의 이름으로 우리의 사랑과 섬김을 계산합니까? '이 정도 했으면 됐지', '남들보다 더 많이 해야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지'와 같은 계산은, 마리아의 순전한 나드 향유를 '낭비'로 규정하려는 차가운 이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계산을 훨씬 초월하는 '낭비적 사랑'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비난을 단호히 막으시며, 마리아의 행위를 '내 장례할 날을 위하여 간직한 것'으로 재해석하십니다 (요12:7). 이 말씀은 마리아의 파격적인 현재의 헌신이, 곧 예수님의 장엄한 미래의 희생과 연결되는 예언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의 길에서 주저하는 이들이여.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깨뜨린 향유처럼 측량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이미 부어주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요12:8)는 예수님의 말씀은, 가난한 이웃에 대한 책임을 면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 순간이 바로 하나님 사랑을 향한 가장 순전한 헌신의 기회임을 가르쳐 줍니다.


진정한 묵상(默想)은, 유다의 계산처럼 '어떻게 하면 손해를 보지 않을까'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처럼 잠시 세상의 소리를 멈추고 (묵상의 본질적 행위인 '멈춤'),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라는 향기를 깊이 들이마시는 행위입니다. 그 향기는 우리의 삶을 짓누르는 '해야 한다'는 교훈적 의무감을 걷어내고, '이미 받았다'는 은혜의 충만함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나사로의 생생한 부활은 많은 이들을 예수께로 이끌었지만, 기득권층은 그 '증거'를 없애려 나사로까지 죽이려 했습니다 (요12:10-11). 살아있는 증거는 언제나 세상의 계산을 위협합니다. 마리아의 향기는 그 계산에 저항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도 이제 우리의 삶을 짓누르는 모든 계산기를 내려놓고, 우리의 존재 전부를 바쳐도 아깝지 않은 그 은혜의 향기 속에서 자유롭게 걷는 복된 존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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