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1-11 예수님은 헌신적인 사랑의 향유를 받으시고, 당신의 죽음과 구원을 예비하시는 메시아이십니다.

by 평화의길벗 posted Mar 1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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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1-11 예수님은 헌신적인 사랑의 향유를 받으시고, 당신의 죽음과 구원을 예비하시는 메시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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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위한 저녁 식사가 마련되었는데, 마르다는 음식을 대접하고 나사로는 식사 자리에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매우 값비싼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발을 닦아 드렸고, 향유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 찼습니다. 제자 중 하나이자 후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는 이 행동을 비난하며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도둑질할 목적으로 한 말임을 사도 요한은 밝힙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두둔하시며 "나의 장례를 위하여 이것을 간직하게 하라"고 말씀하셨고,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함께 있지만 자신은 곧 떠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편, 예수님 때문에 나사로를 보러 많은 유대인이 베다니로 몰려들자, 대제사장들은 나사로도 함께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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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문화적 배경 : 유월절 엿새 전 : 이는 예수님의 수난 주간의 시작, 즉 종려주일 6일 전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시간적 배경이며,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예비되기 시작합니다. / 나드 향유 : 당시 매우 귀하고 값비싼 향유로, 인도 등 먼 지방에서 수입되었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의 거의 1년 치 임금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이 향유는 주로 결혼식이나 장례식과 같은 특별한 의식에 사용되었습니다. 마리아의 행위는 '평생의 재산'을 바치는 것 이상의 극진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존경의 표현이었습니다. / 발에 부음 : 전통적으로는 손님에게 머리에 기름을 발라 환영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은 것은 극도의 겸손과 헌신, 그리고 섬김을 상징합니다. 그녀의 행동은 종의 역할을 자처하는 파격적인 행위였습니다.

# 신학적/정경적 배경 : 구속사적 예비 :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자신의 장례를 위한 예비'라고 해석하십니다. 마리아 자신은 정확히 알지 못했을지라도, 성령의 감동으로 행한 그녀의 헌신은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표하고 준비하는 구속사적 의미를 지닙니다. / 가룟 유다의 대비 : 마리아의 순수한 헌신과 가룟 유다의 이기적인 계산(도둑질)은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요한복음은 이 대비를 통해 참된 제자도란 이익을 따지는 계산적 믿음이 아닌,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의 헌신임을 강조합니다. 가룟 유다의 비판은 예수님을 향한 세상의 비판과 불신앙을 대변하며, 그의 탐욕은 최종적인 배신(예수님을 팔아넘김)의 동기를 예고합니다.

# 철학적/인문학적 의의 : 낭비의 미학 대 공리주의 : 유다의 비판은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공리주의적이고 실용적인 계산의 논리입니다. 반면, 마리아의 행위는 '낭비'로 보일지라도, 사랑과 존경의 대상에게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바치는 헌신적이고 비합리적인 사랑의 가치입니다. 이 본문은 인간의 삶에서 모든 것을 효용과 효율로만 따질 수 없는, 초월적인 가치(사랑, 헌신)의 중요성을 철학적으로 성찰하게 합니다. / 생명과 죽음의 대비 : 베다니 집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나사로가 함께 있는 곳이며, 동시에 '곧 죽으실' 예수님을 위한 장례 준비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이 공간은 생명(나사로)과 죽음(예수님의 십자가)이 공존하며, 예수님의 사역의 최종 목적이 부활을 통한 생명의 승리임을 문학적으로 암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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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성자 하나님은 지극한 사랑과 헌신으로 당신의 사역을 완성할 제자들의 예배를 받으시는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유월절 명절이 시작되기 엿새 전에 예수님은 베다니로 오셨는데, 이 마을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위한 저녁 식사가 마련되었는데, 마르다가 음식을 대접하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값비싼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습니다. 그 지극 정성으로 인해 향유의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 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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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이 단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생명을 불러내시는 권능을 가지셨으며, 그분은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지극한 사랑의 헌신(예배)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만물의 주인이심을 증거합니다.

"순전한 나드"는 '믿을 만한 나드' 혹은 '진짜 나드'라는 뜻으로, 최고 품질의 진귀함을 강조합니다. 3절의 "머리털"은 여성에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를 발 닦는 데 사용한 것은 자존심과 모든 것을 내려놓는 극도의 겸손과 헌신을 상징합니다.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 찼다'는 것은 마리아의 헌신이 숨겨지지 않고 모든 이에게 공표되었음을 의미하며, 이는 공동체 전체에 미치는 예배의 파급력을 보여줍니다.

이 식사 자리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직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가 '곧 죽으실'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은 모습은 부활과 십자가의 구원이 한 식탁 위에서 기념되는 상징적 장면입니다. 마리아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깊은 이해(죽음을 이기신 능력)와 다가올 수난에 대한 사랑의 공감에서 비롯된 참된 예배의 모범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에 자신의 가장 귀한 가치를 묻어 드렸으며, 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드리는 헌신적 제자도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구약에서 다윗 왕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올 때, 왕복을 벗고 춤을 춘 행위(삼하 6:14)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신분의 높낮이를 막론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드리는 예배의 자세와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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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그리스도인의 헌신과 예배는 종종 '시간'이나 '남는 물질'을 드리는 계산적인 행위에 머무르기 쉽습니다. 마리아의 향유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것(시간, 재능, 물질, 명예)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릴 때, 진정한 사랑과 헌신이 완성됨을 가르칩니다. 개인의 가장 소중한 가치를 그리스도를 위해 내려놓는 '낭비하는 예배'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가정 내에서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머리털로 닦는' 것과 같은 가장 낮은 자세와 지극한 정성으로 표현하며, 가정 전체가 '향유 냄새'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득한 거룩한 공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마리아의 헌신을 기념하며, 예배의 진정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형식적인 의식이나 효율성을 따지는 프로그램 기획에 매몰되지 않고, 아낌없는 사랑과 겸손으로 그리스도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예배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와 같은 이들(삶이 회복된 이들, 간증하는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처럼, 복음으로 회복된 이들을 공동체 안에서 환영하고 함께 교제하는 장(場)을 마련해야 합니다.

직장과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재능과 시간(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가치)을 개인의 성공만을 위해 사용하는 대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이웃 사랑을 위해 아낌없이 '낭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직장에서의 윤리적 헌신, 이웃을 향한 섬김, 혹은 주말 시간을 구체적인 봉사에 드리는 것과 같이, 세상의 계산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비효율성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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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절 성령 하나님은 인간의 탐욕과 불순종을 진리의 빛으로 드러내시는 분별의 영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이자 후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가룟 유다가 이 상황을 보고 비난하며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느냐?" 그러나 사도 요한은 유다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니라, 그는 돈궤를 맡고 있으면서도 도둑질하는 탐심 때문에 한 말이었음을 분명히 밝혀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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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성령 하나님께서 가룟 유다의 위선적 탐욕을 드러내심으로써, 참된 헌신과 이기적인 계산을 분별하게 하시는 진리의 영이심을 증거합니다.

5절에서 유다가 말한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구체적인 금액은 그의 마음이 오직 물질적인 가치에만 사로잡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6절의 "도둑"이라는 단어는 유다의 행위를 단순한 재정 관리의 실수나 비판이 아닌, 근본적인 도덕적 결함과 탐욕으로 규정하며, 그의 최종적인 배신(예수님을 은 삼십에 판 행위)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줍니다.

가룟 유다의 비판은 겉으로는 '가난한 자를 위한 사랑'이라는 정의로운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 동기는 개인의 탐욕과 이익이었습니다. 이는 모든 시대에 나타나는 종교적 위선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사도 요한의 기록을 통해 유다의 위선을 폭로하시는데, 이는 우리의 모든 행위가 겉으로 드러난 모습뿐만 아니라, 동기(마음의 중심)에 의해 평가됨을 보여줍니다. 참된 제자도와 헌신은 유다처럼 이익과 효율을 계산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처럼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에서 비롯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택하실 때,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항상 외형적인 행위보다 그 행위의 동기와 마음의 순수함을 평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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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삶에서 '선한 일'을 할 때라도, 그 동기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또는 '나에게 돌아올 이익을 위해서'라는 유다의 탐심이 숨어있을 수 있음을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은밀한 탐욕과 위선을 성령의 빛으로 끊임없이 비춰보고 정직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사랑한다', '잘해준다'는 말 뒤에 상대방을 통제하거나 나의 필요를 채우려는 이기적인 동기가 숨어있지 않은지 점검해야 합니다. 참된 사랑은 마리아처럼 계산 없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사회봉사나 구제 활동을 할 때, 그 동기가 '교회의 명성을 높이거나 재정적 이익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유다의 논리처럼, 효율성과 실용성이라는 이름으로 진정한 헌신이 비난받거나 가려지는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교회는 재정 관리의 투명성과 청지기 정신을 철저히 확립하여, 가룟 유다와 같은 탐욕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직장과 세상에서는 '정의'와 '공익'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개인의 탐욕이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위선적인 리더십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직장 내에서 말과 행동의 일치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주자"는 유다의 말이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금액에 집착하며 도둑질로 귀결되었듯이, 화려한 명분이나 구호에만 그치지 않고, 진정한 사랑과 윤리를 실천하는 동기의 순수성을 견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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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절 성자 하나님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영원한 구원을 이루시고, 가난한 자를 향한 사랑을 실천하게 하시는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향한 가룟 유다의 비난을 막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녀를 그대로 두어라. 나의 장례 날을 위하여 이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사람들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만,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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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곧 십자가에서 죽으실 메시아임을 선언하시며, 그 죽음은 일회적이고 가장 중요한 구속 사건으로서, 가난한 자를 향한 지속적인 사랑의 실천을 명령하는 근거가 됨을 증거합니다.

7절의 "간직하게 하라"는 '지키다', '보존하다'는 뜻으로, 마리아의 행위가 예수님의 장례라는 구속사적 목적을 위해 예비된 것임을 재확인합니다. 8절의 "항상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는 예수님의 임박한 육체적 부재(십자가와 승천)를 예고하며, 이는 마리아의 헌신이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음을 강조합니다.

이 말씀은 마리아의 헌신을 단순히 '선행'이 아닌 구속사적 예비로 승격시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이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올 단 한 번의 사건임을 선언하며, 이 일회적인 구속 사역의 중요성이 가난한 자를 향한 일상적인 구제 활동보다 우선함을 명시합니다. 그러나 이는 가난한 자를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향한 사랑의 실천은 언제나 지속되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사명임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셨고, 이 구원을 받은 자들은 이제 그 사랑을 힘입어 세상 속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섬겨야 합니다.

공관복음의 '과부의 두 렙돈 헌금' 이야기(막 12:41-44)에서 예수님은 그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고 평가하십니다. 이는 마리아의 행위처럼 금액의 많고 적음을 넘어, 자기 전부를 드리는 헌신의 중요성을 가르칩니다. 또한, 신명기에서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신 15:11)는 말씀은, 가난한 자를 향한 지속적인 섬김의 사명이 구약에서부터 이어진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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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서 '지금 아니면 안 되는' 구속사적 순간(The Kairos)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가장 귀한 것을 드릴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미루지 않고, 현재의 삶에서 주님께 최고의 가치를 드릴 수 있는 헌신의 시기를 분별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돕는 일'은 우리의 삶이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음을 고백하는 지속적인 사명입니다. 가정 내에서는 '사랑의 말'이나 '용서'를 다음으로 미루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아낌없이 실천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구속사의 중심임을 끊임없이 선포하며, 이 진리를 훼손하려는 모든 세속적인 도전(유다의 공리주의)에 맞서야 합니다. 동시에,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지속적이고 실질적인 구제와 봉사를 통해 지역사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복음 전파(일회적 구속 사건의 선포)와 사회 봉사(지속적 사랑의 실천)의 균형을 통해 예수님의 뜻을 이행해야 합니다.

직장과 세상 속에서 발생하는 빈곤, 불평등, 소외와 같은 문제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함께 있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단발성 기부나 일회성 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요합니다. 이는 직장에서의 윤리적 리더십, 불공정한 관행에 대한 문제 제기, 혹은 공정한 임금 체계 확립 등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돕는 실질적인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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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1절 성부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표적을 통해 믿는 자에게는 생명을 주시고, 불신하는 자에게는 심판의 기회를 주십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베다니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왔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 종교 지도자들(대제사장들)은 나사로마저 죽이기로 모의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고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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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나사로의 부활)은 인간의 마음을 두 길(믿음과 불신)로 나누는 구원과 심판의 기준점이며, 성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방해하려는 인간의 악한 음모는 반드시 실패함을 증거합니다.

9절의 "많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표적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보여줍니다. 11절의 "나사로 때문에"는 나사로의 부활 자체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입증하는 움직이는 증거였음을 강조합니다. "많은 유대인이 떠나 예수를 믿음이러라"는 구절은 나사로의 존재가 대중의 신앙 결단을 촉발했음을 보여줍니다.

나사로는 죽음에서 살아난 부활의 산 증인입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강력한 표적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를 죽이려 한 행위는 진리의 빛을 보고도 그것을 거부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표적 자체를 제거하려는 극단적인 불신앙과 어리석음을 상징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와 같은 맥락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통해 생명을 주시고자 하시지만, 인간은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그 생명 자체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악한 음모는 나사로가 이미 살아났다는 사실 앞에서 무력하며,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베드로가 일으킨 앉은뱅이(행 3:1-10)가 살아있는 증거가 되어 수많은 사람이 주께 돌아왔고, 이로 인해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협박했으나(행 4:18), 복음의 확산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생명 역사를 막으려는 모든 시도가 결국 좌절됨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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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나사로와 같은 살아있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가 될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돌아설 수 있습니다. 개인은 삶의 고난과 위기를 통해 회복된 자신의 모습을 숨기지 않고 간증함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움직이는 표적'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가정 내에서도 부부, 부모-자녀 관계가 예수님 안에서 회복된 모습을 통해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능력을 증거해야 합니다.

교회는 나사로를 죽이려 했던 대제사장들의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살아있는 증거'가 되는 성도들의 간증, 혹은 교회를 통해 회복된 공동체의 선한 영향력을 시기하거나 억압하는 대신, 이들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주님께 돌아오도록 격려하고 지지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비판과 조롱에 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진리를 담대하게 증거해야 합니다.

직장과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증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세상은 때때로 우리가 보여주는 정직함, 사랑, 희생과 같은 그리스도인의 가치를 불편해하며 제거하려고(불이익을 주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산 증인임을 기억하고, 어떠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의 능력을 삶으로 보여주는 굳건한 믿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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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가장 귀한 헌신을 기쁘게 받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요한복음 12장 본문을 통해 마리아의 지극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그 사랑을 당신의 장례를 위한 예비로 받아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묵상합니다. 

저희의 삶의 가장 소중한 가치(삼백 데나리온)를 

계산 없이 주님께 바치는 '낭비하는 예배'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 안에 숨어있는 가룟 유다의 탐심과 위선, 

그리고 효율과 이익만을 따지는 세상의 논리를 

성령의 빛으로 드러내 주시옵소서. 

저희의 모든 행위가 겉모습이 아닌, 

주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동기에서 비롯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음을 믿으며, 

이제는 저희가 이 구원의 은혜를 힘입어 

'항상 함께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사랑을 아낌없이 실천하는 지속적인 섬김의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세상의 불신과 핍박 속에서도 

나사로와 같이 부활의 살아있는 증인이 되어, 

저희의 삶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 역사를 보게 하옵소서.

저희의 모든 헌신을 기쁘게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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