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37-52 갈증의 시대, 가슴에서 흐르는 생수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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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은 내면의 결핍을 채우려는 이기적 욕망을 넘어, 우리 안에 깃든 성령의 은총으로 타자의 마른 가슴을 적시는 생명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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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막절의 축제가 절정에 이른 마지막 날, 예루살렘 성전에는 팽팽한 긴장과 환희가 교차합니다. 제사장이 실로암 못에서 길어온 물을 제단에 부으며 비를 기원하는 의식을 행할 때, 예수는 그 소란을 뚫고 사자후처럼 외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이 외침은 단순한 초대가 아니라, 종교적 형식주의에 갇혀 영혼의 가뭄을 겪고 있던 이들을 향한 절박한 생명의 선언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에 목말라 있습니다. 소유와 명예, 혹은 타인의 인정이라는 우물을 파보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은 더해만 갑니다. 신앙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이들은 대개 '종교적 의무'라는 마른 빵을 씹으며 영적 허기를 견디고 있는 이들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배'는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 즉 실존의 중심을 뜻합니다. 신앙은 외부의 것을 끌어와 나를 채우는 '포획'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의 빛이 밖으로 흘러넘치는 '방출'입니다.
예수를 향한 세상의 시선은 여전히 분분합니다. 어떤 이는 그를 선지자라 하고, 어떤 이는 그리스도라 하지만, 기득권의 자리에 앉은 이들은 "갈릴리에서 무슨 선지자가 나겠느냐"며 출신과 지식의 잣대로 그를 재단합니다. 문학가 도스토옙스키는 "지옥이란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고통"이라 했습니다. 율법의 문자에 갇혀 눈앞의 생명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예수는 미혹하는 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처럼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며 조심스럽게 진리의 편에 서는 이들이 있습니다. 적극적인 신앙이란 대중의 수군거림에 휩쓸리지 않고, 내 영혼을 적시는 그 생수의 근원을 끝까지 응시하는 용기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삶이 팍팍하고 마음이 사막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메마른 채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연약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 내면에 생명의 샘을 파놓으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분께 나아가 목마름을 고백하는 것뿐입니다. 은혜는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내가 비워질 때, 비로소 내 안에서 시작된 생수의 강이 나를 넘어 상처받은 이웃과 이 무정한 세상을 적시게 됩니다.
비난과 조롱의 화살이 난무하는 예루살렘 성전 한복판에서도 주님은 당당히 생명을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세상의 냉소와 자신의 연약함에 굴하지 말고, 우리 가슴 속에 흐르는 하늘의 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입시다. 우리가 그 은총의 리듬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가 딛는 모든 땅은 비로소 꽃이 피고 열매 맺는 하나님의 정원이 될 것입니다. 그 눈부신 생명의 여정에 기쁘게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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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37-52 메마른 축제의 끝자리에서 터져 나온 생수, 그 은총의 바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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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세상의 축제 끝에서 여전히 근원적 갈증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주님은 당신 자신을 ‘마르지 않는 생수’로 내어주시며, 그 아픈 사랑의 부름에 응답하여 낡은 편견의 울타리를 넘어설 때 비로소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영원한 생명이 흐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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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화려한 조명과 소음으로 가득 찬 거대한 축제장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소란스러움이 끝난 뒤에 홀로 남겨질 때면, 우리는 예외 없이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헛헛함과 근원적인 갈증을 마주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7장의 예루살렘 풍경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인 초막절, 사람들은 일주일 내내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 제단에 붓는 의식을 행하며 풍요를 기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의식도 사람들의 영적 목마름을 진정으로 해갈해주지는 못했습니다. 명절의 가장 큰 날, 곧 축제가 끝나갈 무렵의 그 허무한 끝자리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
주님은 단순히 타는 목을 축일 시원한 물을 주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온전히 쏟아부어 주시겠다는 거룩하고도 비장한 선언입니다. 주님의 이 외침은, 엉뚱한 우물을 파며 욕망의 늪에서 허덕이는 우리를 향해 터져 나온 하나님의 그 뜨겁고 아픈 사랑의 파토스(Pathos)입니다.
이 압도적인 사랑의 선포 앞에서 무리들은 수군거리며 분열합니다(요 7:40-43).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릴까 두려워 예수를 잡으려고 성전 경비병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를 체포하러 갔던 살기등등한 경비병들이 빈손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왜 잡아오지 않았느냐는 다그침에 그들은 넋을 잃은 사람처럼 대답합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
바리새인들의 말은 사람을 옭아매고 정죄하는 차가운 얼음장 같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는 상처 입고 목마른 영혼들을 살려내려는 펄펄 끓는 ‘사랑의 온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명령에 죽고 사는 경비병들이었지만, 그들 역시 내면 깊은 곳에서는 참된 사랑과 진리에 목마른 영혼들이었기에, 생수처럼 흘러나오는 주님의 그 따뜻한 말씀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장해제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교리와 편견의 감옥에 갇혀 진리를 외면합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날 수 없다는 알량한 지식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재단하려 했습니다.
그 서슬 퍼런 정죄와 혐오의 현장에서,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입을 엽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몰래 찾아왔던 니고데모입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요 7:51). 그는 광기에 휩싸인 군중의 논리를 거슬러, 진리의 편으로 조심스럽게 한 걸음 내디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의 거센 물결 속에서 니고데모처럼 낡은 틀을 깨고 진리를 향해 닻을 내리기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을 통해 우리는 목마름을 채우려 세상의 헛된 우물가를 기웃거리던 발걸음을 돌려, 내 안에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주님의 생수에 우리 자신을 푹 담그게 됩니다.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내 안의 목마름이 가시지 않아 회의를 느끼고 계십니까?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과 연약한 내 모습 때문에 자책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완벽해서, 혹은 남들보다 훌륭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목말라 쓰러져 가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당신의 십자가로 생수의 강을 내어주신 그 맹렬한 은혜가 오늘 우리를 품고 있습니다.
이제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의 짐을 내려놓고, 주님이 흘려보내시는 생수의 강물로 깊이 들어가십시오. 여러분의 일상이 비록 척박한 광야 같을지라도,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성령의 생수가 여러분을 넉넉히 적시고, 마침내 우리 이웃들의 타는 목마름까지 해갈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참된 신앙은 단단한 암반 아래를 도도하게 흐르는 깊은 ‘수맥(Underground River)’을 품는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바짝 메마른 황무지 같고 뜨거운 태양 아래 모든 것이 시들어가는 듯 보여도, 묵상을 통해 영혼의 깊은 수맥에 뿌리를 닿은 나무는 결코 메마르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 흔들림 없는 뿌리로 시원하고 맑은 은총의 물을 길어 올려, 가장 혹독한 계절에도 기어코 세상에 그늘을 내어주는 푸른 생명의 잎사귀를 틔워내고 맙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