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14-24 지식의 겉치레를 넘어, 진리의 심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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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은 문자의 해박함이나 인간의 인정을 구하는 지적 유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겸비한 마음으로 그분의 영광에 접속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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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 중반에 접어들 무렵, 예루살렘 성전은 종교적 열기와 세속적 욕망이 뒤섞여 술렁입니다. 그때 예수가 성전에 올라가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당대 지식인들이라 자부하던 이들을 당혹게 했습니다. 정규 교육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이 나사렛 사내의 깊이를 이해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묻습니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요 7:15). 그들의 질문 속에는 출신과 배경으로 진리를 재단하려는 얄팍한 선입견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아는 것'과 '믿는 것'을 혼동합니다. 신학적 지식을 쌓고 유려한 종교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곧 신앙의 깊이라 착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지식의 근원을 말씀하십니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6). 진정한 권위는 자신을 드러내려는 허영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분의 뜻에 온전히 침잠할 때 흘러나옵니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소유적 인간은 지식을 '축적'하지만, 존재적 인간은 진리 앞에 자신을 '개방'한다고 했습니다. 신앙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이들은 어쩌면 하나님을 정보로만 소유하려 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진리를 분별하는 시금석으로 '의지'를 거론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알리라"(요 7:17). 신앙은 안락의자에 앉아 궁구하는 이론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살아낼 때' 비로소 열리는 신비입니다. 적극적인 신앙생활이 버거운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단 한 구절의 말씀이라도 삶으로 번역해 보려는 정직한 시도입니다. 나를 드러내려는 '자기 영광'의 눈을 감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참된 영광'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고 하나님마저 우리 기준에 끼워 맞추려 합니까?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예수를 정죄하던 이들은 율법의 문자는 지켰을지언정, 율법의 심장인 '자비'는 잃어버렸습니다. 연약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규범의 틀에 갇히지 않습니다. 할례의 전통보다 귀한 것은 한 인간이 온전하게 회복되는 생명의 사건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준엄하게 명하십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요 7:24).
하나님은 우리가 지식의 껍데기에 안주하기보다 진리의 알맹이를 맛보길 원하십니다. 거창한 신앙의 논리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 내 곁에 있는 작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내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를 보내신 분의 숨결에 우리 인생의 돛을 맡깁시다. 그분의 뜻을 행하려는 가난한 마음들이 모일 때, 우리 일상의 성전은 비로소 하늘의 지혜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그 거룩한 배움의 길을 우리 함께 뚜벅뚜벅 걸어갑시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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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14-24 차가운 잣대를 꺾고 생명의 틈을 여는, 끙끙 앓는 사랑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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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겉모양이라는 차가운 잣대로 타인을 재단하고 정죄하는 종교적 허영을 버리고, 율법의 문자 너머에서 생명을 온전케 하시는 주님의 맹렬한 은총에 접속하여 우리 내면의 거룩한 '혁명'을 이루어내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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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섭던 겨울의 칼바람이 잦아들고,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기어코 연둣빛 새싹이 돋아나는 경이로운 봄의 길목입니다.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당연히 올 봄이 아니라 오지 않을 수도 있었던 봄이 무사히 당도하는 이 기적 같은 계절에, 저마다의 무거운 짐을 지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 속에서 여전히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스펙’과 ‘자격’을 요구합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학벌, 지위, 소유의 크기를 잣대 삼아 타인을 쉽게 평가하고 줄을 세웁니다. 놀랍게도 2천 년 전 예루살렘 성전의 풍경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7장의 본문은 명절의 중간쯤에 성전에 올라가 가르치시는 예수님과, 그분을 겉모양으로만 재단하려는 사람들의 충돌을 보여줍니다.
성전에서 울려 퍼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유대인들은 놀랍게 여겼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온 반응은 찬탄이 아니라 의심과 조롱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요 7:15). 그들의 눈에 비친 예수는 정규 랍비 교육을 받지 못한 변방 갈릴리 출신의 촌부에 불과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세워 놓은 ‘종교적 엘리트주의’라는 편견에 갇혀, 눈앞에서 생명의 샘물을 길어 올리시는 참된 진리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편협한 시선 앞에서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6). 그리고 그들이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정작 율법의 참된 정신인 '생명 살림'을 외면하고 있음을 폭로하십니다. 안식일에 할례를 베푸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 여기면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온전하게) 고쳐주신 일에는 왜 분노하느냐고 꾸짖으십니다(요 7:22-23).
군중들은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요 7:20)라며 사람을 찌르고 죽이는 차가운 얼음장 같은 언어를 던졌지만, 예수님의 행위와 말씀에는 율법의 문자에 갇혀 죽어가는 영혼을 기어코 살려내시려는 펄펄 끓는 ‘사랑의 온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예수님은 우리 신앙의 심장을 찌르는 거룩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요 7:24).
이 주님의 음성을 우리 삶의 자리로 온전히 모셔 들이기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을 다시 생각하다』의 저자들은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태도를 아프게 꼬집습니다. 우리는 종종 성경을 읽으면서도 내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하여 내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는 ‘해석학적 우상숭배’에 빠지곤 합니다. 묵상은 내가 원하는 답을 성경에서 찾아내어 나를 합리화하는 지적 유희가 아닙니다.
참된 묵상이란, 남을 함부로 재단하고 내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려던 구습에 젖은 일상에 ‘혁명’을 일으키는 일입니다. 거룩한 묵상을 통해 우리는 겉모양으로 사람을 나누고 배제하던 차가운 잣대를 꺾어버리고, 타인의 고통과 아픔의 자리로 주저 없이 내려가시는 하나님의 완전한 정의(공의)에 참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신앙의 길을 걸으면서 “나는 왜 이렇게 흠결이 많을까?”, “세상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내 삶과 신앙은 너무 초라한 것 아닐까?” 하며 깊은 회의와 자책감에 빠질 때가 있습니까? 더 뜨겁게 헌신하지 못하고 늘 제자리걸음인 것 같은 자신의 모습에 위축되어 계십니까?
그러나 억지로 자기를 합리화하거나 포장하려 하지 말고 텅 빈 내면 그대로의 모습을 진솔하게 마주할 때 비로소 은총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양, 즉 화려한 업적이나 도덕적 완벽함이라는 ‘외모’를 보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저 멀리 높은 보좌에서 우리의 성적표를 매기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오물 같고 비루한 현실 속에 풍덩 뛰어드셔서 우리를 위해 ‘끙끙 앓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내거나 자격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상처 입고 병든 우리를 온전하게 고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살을 찢으신 그 맹렬한 사랑 덕분입니다.
이제 겉모양으로 나 자신과 타인을 평가하던 낡은 저울을 십자가 앞에 내던지십시오. 완벽해져야 한다는 강박의 무거운 짐도 벗어버리십시오. 율법의 조문으로 우리를 옭아매는 세상의 소음에 귀를 닫고,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에 영혼의 주파수를 맞추십시오.
이번 한 주간, 우리를 얽매던 잣대들을 내려놓고, 겉모습 너머에 있는 생명의 고귀함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따뜻한 눈길로 서로를 환대하며 걸어가는 복된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메마른 나뭇가지를 어루만지는 ‘봄바람’과 같아야 합니다. 겨울을 난 나무의 겉모습은 볼품없이 거칠고 딱딱하며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봄바람은 그 앙상한 ‘외모’를 탓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다가가 따스한 숨결을 불어넣어, 나무의 깊은 내면에 잠들어 있던 생명을 깨워 마침내 찬란한 꽃을 피워냅니다. 우리 역시 정죄의 시선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은총의 봄바람을 머금고 살아갈 때, 서로의 얼어붙은 삶에 꽃을 틔워내는 생명의 기적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