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1-15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절망의 베데스다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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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누군가 물에 넣어주길 기다리는 수동적 체념에서 벗어나, 나를 일으키시는 주님의 음성에 응답하여 스스로의 자리를 들고 일어서는 생명의 도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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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양문 곁,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불리는 못이 있습니다. '자비의 집'이라는 그 이름의 화사함 뒤편에는,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뛰어들어야만 나을 수 있다는 잔인한 경쟁의 논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곳은 자비의 공간이 아니라, 타인의 불행을 딛고서라도 내가 먼저 살아야 하는 '결핍의 각축장'이었습니다. 그 그늘진 복도 한구석에 38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절망을 이불 삼아 누워 있던 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삶의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누군가 나를 '물에 넣어주지 않음'을 탓하며 살아갑니다.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 5:7). 이 탄식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초상이기도 합니다. 환경을 탓하고, 시대를 원망하며, 누군가 기적의 마중물을 부어주기만을 기다리는 영적 무기력증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에게 다가가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은 단순히 병의 치유를 묻는 것이 아니라, 네 영혼 속에 아직 '삶을 향한 의지'와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살아 있느냐는 준엄한 물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물로 밀어 넣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신앙은 '상황의 변화'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권능'에 의지해 지금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가 38년 동안 자신을 옭아매던 절망의 요(자리)를 들고 일어섰을 때, 베데스다는 더 이상 경쟁의 장소가 아닌 은총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이 겪는 불안과 허무를 극복하는 길은, 오직 우리를 부르시는 절대자의 음성에 응답하는 순명(順命)뿐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도 38년 된 병자처럼 '어떤 조건'이 갖춰지기만을 기다리며 영적인 침상에 누워 계시지는 않습니까? 신앙에 대한 회의가 깊어질 때, 혹은 열정이 식어버려 그저 관성대로 종교생활을 이어갈 때, 우리 곁에 오셔서 말을 건네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은혜는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연약하고 비참한 자리에 있을 때 먼저 찾아오는 하나님의 '무모한 사랑'입니다.
이제 더 이상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며 타인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이미 여러분의 생명의 물결을 흔들고 계십니다. 낡은 습관과 원망의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오늘이라는 눈부신 생명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십시오. 우리가 말씀을 따라 한 걸음을 내디딜 때,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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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1-15 오래된 핑계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용기, 그 낯선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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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무기력과 핑계의 자리에 누워 있는 우리에게, 주님은 경쟁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일어나 걸으라”는 말씀으로 찾아오사 우리 내면의 ‘존재의 용기’를 북돋우시는 은총의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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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웅크렸던 생명들이 저마다의 몸짓으로 대지를 깨우는 계절입니다. 저마다의 사연과 무게를 짊어지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 속에서 여전히 길을 찾고 계신 모든 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때로 거대한 병동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의 한숨과, 남들보다 앞서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공기처럼 떠다니는 곳,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연못가가 바로 그런 풍경이었습니다.
베데스다, ‘자비의 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지만, 그 실상은 참혹한 경쟁의 투기장이었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단 한 사람만이 치유를 얻는다는 전설, 그 희박한 확률에 목숨을 건 수많은 병자가 그곳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무려 38년 동안이나 병을 앓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38년이라는 세월은 그가 겪었을 절망의 깊이를 가늠케 합니다. 그는 아마도 스스로 일어설 의지조차 상실한 채, 타인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젖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6). 송민원 교수는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듣고 싶은 대로 읽으려는 욕망을 비워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질문은 단순히 병이 낫기를 원하느냐는 의학적 문진이 아닙니다. “너는 정말 너의 삶을 변화시키기를 원하느냐?”, “이 지긋지긋한 패배의 자리에서 벗어날 의지가 남아 있느냐?”라고 묻는, 우리 존재의 밑바닥을 뒤흔드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병자의 대답은 동문서답에 가깝습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 5:7).
그는 낫고 싶다는 열망 대신 핑계를 댑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세상이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아서, 경쟁에서 졌기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다고 항변합니다. 이것은 남 탓이자 환경 탓입니다. 어쩌면 우리 역시 이 병자처럼 “조건이 갖춰지면”, “누군가 나를 도와주면” 신앙생활도 잘하고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며 삶을 유예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늘 베데스다의 물이 동하기만을, 요행수가 터지기만을 기다리며 소중한 오늘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은 그의 핑계를 듣고도 그를 책망하거나 논쟁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아주 단호하게 명령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요 5:8). 주님은 경쟁의 시스템인 연못으로 그를 밀어 넣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가 의지하고 있던 낡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한동일 교수는 그의 책에서 “일어나 가자(Surgite, eamus)”라고 말하며, 주저앉고 싶은 순간에도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힘은 내 의지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임을 역설합니다. 38년 된 병자를 일으킨 것은 그의 노력이 아니라, 그에게 찾아와 말을 건네신 예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였습니다.
이 놀라운 은총을 우리 삶의 결로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우리는 흔히 묵상을 조용히 앉아 있는 정적인 시간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묵상을 다시 생각하다』의 저자들은 묵상에 대해 훨씬 역동적인 정의를 내려줍니다. 김기현 목사는 “묵상은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저항”이라 했고, 박영호 목사는 “묵상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참여”라고 했습니다. 또한 권연경 교수는 “묵상은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정의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베데스다의 경쟁 논리에 길들여진 나의 내면에 저항하고, 나를 찾아오신 주님과 대화하며, “너는 패배자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내 삶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참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나는 왜 여전히 이 모양일까?” 하는 회의가 들고, 반복되는 실패 앞에 무력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가장 비참하고 소외된 자,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기는 그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정해놓은 방식(연못에 선착순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방식(말씀에 순종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기주 작가는 “말은 나름의 귀소 본능을 지닌다”고 했습니다. 병자가 내뱉은 불평의 말은 그를 주저앉게 만들었지만, 예수님이 건네신 생명의 말씀은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이제 우리도 낡은 자리를 걷어차고 일어나야 합니다. 한동일 교수의 고백처럼 “나는 은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라는 자각을 가지고, 우리를 옭아매던 무기력의 멍에를 벗어버리십시오.
여러분이 서 있는 곳이 가정입니까, 일터입니까, 아니면 고독한 병상입니까? 그 어디든 주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이 바로 기적의 현장입니다. 물이 동하기를 막연히 기다리는 수동적인 삶에서 벗어나, 이미 우리 곁에 오셔서 손 내미시는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그리하여 이번 한 주간, 핑계와 원망 대신 감사의 자리를 들고 힘차게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신앙은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던 배가 마침내 ‘바람’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노를 젓다 지쳐버린 내 팔의 힘을 빼고, 불어오는 성령의 바람에 돛을 펼칠 때, 배는 내가 알지 못하던 새로운 항로를 향해 미끄러지듯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내가 하려고 했던 아등바등함을 멈추고(Stop), 주님이 불어넣으시는 생명의 바람에 나를 맡기는 것, 그것이 바로 ‘일어남’의 비결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