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9-34 광야에서 들려오는 비움의 노래: "나는 소리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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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은 자기를 증명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우리 삶의 무대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빈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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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각인되기를 갈망합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 우리는 대개 자신의 직함이나 소유, 혹은 성취한 것들로 대답하곤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례 요한도 유대인들로부터 집요한 질문을 받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냐?", "엘리야냐?", "그 예언자냐?" 세상은 끊임없이 그를 어떤 대단한 존재의 범주 안에 가두려 합니다. 하지만 요한의 대답은 단호하고도 투명합니다. "나는 아니다."
이 짧은 부정의 고백 속에 신앙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빛'이라 말하지 않고 빛을 증언하는 자라고 말하며, 자신을 주인공이 아닌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정의합니다. 소리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순간 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운명을 지닙니다. 존재를 드러내기보다 존재의 목적에 충실한 것, 이것이 바로 세례 요한이 보여준 거룩한 자기 비움(Kenosis)의 영성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 내 존재'라고 불렀지만,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 앞의 존재'라고 말합니다. 때로 삶이 허무하고 신앙이 막막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너무 많은 '나'를 짊어지고 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신앙에 대한 회의는 어쩌면 내가 만든 하나님의 형상이 무너지는 복된 과정일 수 있습니다. 요한처럼 "나는 주인공이 아닙니다"라고 고백할 때, 비로소 우리 삶의 빈터에 참된 빛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을 향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외칩니다. 이 '지고 가다'라는 말은 단순히 죄를 대신한다는 뜻을 넘어, 우리의 비천함과 눈물, 그리고 연약함을 당신의 어깨에 고스란히 짊어지신다는 사랑의 선언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고뇌하는 예수를 그렸지만, 요한이 만난 예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머무는 평화의 현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단한 종교적 열심을 요구하시기보다, 그저 당신의 사랑이 흘러갈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의 굽은 길을 곧게 펴기를 기다리십니다.
적극적인 신앙생활이란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라진 자리에 타자의 아픔이 들어오고, 나의 목소리가 잦아든 자리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리는 경험입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비굴함이 아니라, 거룩한 분을 마주한 자가 느끼는 지극한 경외심이자 기쁨입니다.
인생의 광야를 지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져 낙심한 분이 계십니까?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소리'가 되어 사라질 때, 당신을 통해 전달된 '말씀'은 누군가의 영혼을 살리는 생명이 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무언가를 증명해냈기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베풀어지는 가없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의 강물에 몸을 맡기고, 오늘 하루도 우리 곁을 지나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조용히 응시하며 걷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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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9-34 광야의 소리로 흩어지는 기쁨, 그 빈자리에 임하는 어린 양의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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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을 성취했느냐가 아니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나를 지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소리'로 남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참된 자유와 존엄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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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하늘 아래서도 여전히 푸른 기운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겨울 나무들처럼,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오늘을 살아내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거대한 욕망의 전시장과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1장의 본문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제안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보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요 1:19). 송민원 교수는 그의 책에서 성경은 질문으로 가득 찬 책이라 했습니다. 이 질문은 단순한 신원 확인이 아닙니다. “네가 가진 자격이 무엇이냐?”, “네가 과연 우리보다 높은 권위를 가졌느냐?”라고 따져 묻는, 세상의 날 선 검문 검색과도 같습니다. 이 위압적인 질문 앞에서 요한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요 1:20).
그는 자신이 ‘무엇이다’라고 주장하기 전에 ‘무엇이 아니다’라는 것을 먼저 명확히 합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라틴어 수업』 등을 통해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의 한계와 비참함을 아는 데 있다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 요한의 위대함은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 자신이 구원자가 아님을 인정하는 그 정직한 겸손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이사야의 말을 빌려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요 1:23)라고 정의합니다.
‘소리’는 뜻을 전달하고 나면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져야 합니다. 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으면 그것은 소음이 되고, 정작 전달하려던 메시지인 ‘말씀(Logos)’을 가리게 됩니다. 이기주 작가는 “말은 나름의 귀소 본능을 지닌다”고 했습니다. 요한이 뱉은 말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 영광이 된 것이 아니라, 오직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 그분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많은 갈등과 회의는 어쩌면 내가 ‘소리’로 사라져야 할 자리에 자꾸만 ‘주인’으로 남으려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어떻게 자기를 비우고 예수를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그는 고백합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요 1:31, 33). 요한조차 처음에는 예수를 인간적으로만 알았지, 그분이 메시아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와 머무는 것을 보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이 영적 안목을 기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은 단순히 성경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귐(Fellowship)’이자 ‘관계(Relationship)’입니다. 또한 묵상은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이 나를 읽어내도록 허락하는 시간이며, 나의 일상을 하나님의 이야기 속으로 편입시키는 ‘번역(Translation)’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말씀 앞에 머물러 나의 욕망과 편견을 내려놓는 ‘관계의 묵상’을 이어갈 때, 비로소 우리 눈에 씌워진 비늘이 벗겨지고 우리 곁에 다가오신 예수님을 ‘보라’(요 1:29)고 외칠 수 있게 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향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고 선포합니다. 세상은 힘 센 사자가 되어 남을 짓밟고 올라서야 승리한다고 가르치지만, 하나님은 연약한 어린 양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가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연약함, 실패, 남모를 수치심까지도 묵묵히 짊어지신 주님의 그 멍든 어깨, 곧 ‘동고(同苦)의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고, “나는 왜 여전히 이 모양일까?” 하는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위축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고, 그분을 세상에 전하는 따뜻한 소리가 되라고 초대하십니다.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우리 존재의 빈 들에 찾아오시는 주님을 바라봅시다. 내가 사라진 그 자리에 주님의 은혜가 채워질 때, 우리의 비루한 일상은 가장 거룩한 성소가 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예수님을 비추는 맑은 거울이 되어줄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맑게 닦인 ‘투명한 유리창’과 같아야 합니다. 유리창이 얼룩덜룩하거나 화려한 그림으로 채워져 있으면, 사람들은 창밖의 풍경을 보는 대신 유리창 자체에 시선을 뺏깁니다. 우리가 자신의 자아를 맑게 비워낼수록, 우리라는 창을 통해 세상은 선명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풍경’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