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8 빛이 어둠을 만질 때 : 기억의 시원에서 부르는 생명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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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저 멀리 계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비천한 몸으로 찾아오신 그분의 빛 앞에 우리 존재를 투명하게 내어놓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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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이 '태초'는 시간의 연대기적 시작이라기보다 우리 존재가 가 닿을 수 없는 아득한 정체성의 시원(始原)입니다. 요한은 그 태초의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며, 그 말씀으로 인해 세상 만물이 지어졌다고 증언합니다. 시인 박노해가 "말의 뿌리에 흙이 묻어 있지 않은 말"을 신뢰할 수 없다고 노래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관념의 유희가 아니라 숨이 깃든 '말숨'이 되어 사건을 일으킵니다. 빛과 어둠이 나뉘고 생명의 푸른 움이 돋아나듯, 그 말씀은 세상 만물이라는 초월자의 암호 속에 고스란히 깃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원한 말씀이 돌연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창조주께서 엄마의 젖을 먹고 까무룩 잠이 드는 아기의 몸을 입으셨다는 사실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예수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희노애락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오셨습니다. 막스 에른스트의 그림 속에서 마리아에게 종아리를 맞던 아기 예수처럼, 그분은 철저히 인간의 누추한 현실에 발을 딛고 서셨습니다.
요한복음의 기자는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영광이란 번쩍이는 후광이 아닙니다. 그것은 소란한 도심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숲속의 빈터처럼 고요하여 주위 사람들조차 평화로 물들이는 존재의 충만함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은 그분 속에 가득 찬 것이 대가 없는 선물로 흘러넘쳤음을 뜻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때로 신앙이 흔들리고 하늘이 멀게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를 닦아 맑은 창이 된 사람만이 빛을 알아보듯, 우리 속에 하늘을 품은 이들만이 그분의 현존을 알아봅니다. 신동엽 시인은 "네 마음속 구름을 닦으라"고 외쳤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허물을 살피는 성찰의 눈을 뜰 때, 비로소 세상 도처에 널린 하나님의 작품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다른 이의 눈에서 '티끌'을 볼 때, 그 가슴 속에 고인 '눈물'을 보시는 분입니다. 신앙은 도덕적 개선이 아니라 새로운 근원에 속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빛 앞에 자기를 개방할 때, 우리 삶은 고역에서 축제로 변합니다.
연약한 우리를 향해 말없이 다가와 안아주시는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십시오. 비록 세상은 차갑고 냉혹할지라도, 우리 곁에는 지금도 따뜻한 불꽃 하나가 타고 있습니다. 그 빛의 어루만짐 속에서 다시금 생명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봄의 사람'이 되시기를 빕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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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18 혼돈의 비탈에 세운 사랑의 텐트, 그 따뜻한 말씀의 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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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비루하고 정돈되지 않은 삶의 한복판에 찾아오셔서 당신의 ‘체온’으로 우리를 덮어 주시는 가장 파격적인 은총의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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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하늘 아래서도 여전히 푸른 기운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나무들처럼,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오늘을 살아내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때로 거센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아서, 우리는 종종 방향을 잃고 비틀거리곤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에 대한 물음표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이 모호한 삶의 한복판에서, 요한복음 1장의 장엄한 서곡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열어 보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은 창세기의 첫 문장을 다시 씁니다. 한동일 선생은 그의 책에서 만일 이 구절이 “태초에 주먹이 있었다”거나 “태초에 돈이 있었다”로 시작되었다면 우리 존재의 근원은 비루하고 남루해졌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우리 존재의 시작은 폭력이나 우연이 아니라 ‘말씀(Logos)’, 곧 하나님의 지성과 사랑에 닿아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여도, 우리는 하나님의 그 거룩한 말씀으로부터 비롯된 존엄한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모시기에 우리 마음은 너무나 어수선하고 누추합니다. 김기석 목사님은 함석헌 선생님의 시 <님이 오신다>를 빌려 이 난감한 상황을 설명하곤 했습니다. 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방을 치우려 했으나, 깜빡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화들짝 깨어 보니 님이 이미 와 계신데, 방안에는 온갖 허섭스레기가 널려 있습니다. 그때 님은 “왜 이렇게 더럽냐”고 꾸짖는 대신,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닦으면 된다”시며 오히려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십니다.
요한이 말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라는 고백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여기서 ‘거한다’는 말은 원어적으로 ‘장막(텐트)을 쳤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게 정돈된 성전을 지어놓기를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실패와 좌절, 남들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혼돈의 한복판에 친히 텐트를 치고 들어오셨습니다. 이기주 작가는 “말에는 나름의 온도가 있다”고 했습니다. 차가운 법 조항이 아니라, 따뜻한 피가 흐르는 ‘육신’이 되어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가 겪는 추위와 외로움을 당신의 온기로 덮어 주십니다.
이 놀라운 은총을 우리 삶의 결로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은 단순히 성경 지식을 쌓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화’이자 ‘관계 맺기’입니다. 또한 묵상은 하늘의 언어를 나의 일상 언어로 바꾸는 치열한 ‘번역(Translation)’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묵상한다는 것은, 텍스트 속에 갇혀 있던 예수님을 나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 나의 고민과 아픔 속으로 초대하여 그분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그때 묵상은 관념이 아니라 내 삶을 변화시키는 ‘참여’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신앙에 대한 회의가 안개처럼 밀려오고,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은혜를...” 하며 뒷걸음질 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위축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습니다(요 1:17). 율법은 ‘자격’을 묻지만, 은혜는 ‘존재’를 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되”(요 1:18)라는 말씀처럼, 그분은 우리의 이성을 초월해 계십니다. 그러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그분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심판자가 아니라, 탕자를 기다리며 동구 밖을 서성이는 아버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무거운 종교적 의무감이나 완벽주의의 강박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있는 모습 그대로, 텐트를 치고 우리 곁에 머무시는 주님께 기대십시오. 우리의 누추한 일상 속에 찾아오신 그 말씀의 빛이 우리의 어둠을 몰아내고, 마침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빚어 가실 것입니다. 이 믿음을 안고, 비틀거리는 걸음일지라도 주님과 함께 뚜벅뚜벅 걸어가는 한 주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사건은, 마치 사랑하는 이가 보낸 ‘육필(肉筆) 편지’와 같습니다.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로는 전해지지 않는, 꾹꾹 눌러 쓴 글씨 자국마다 글쓴이의 숨결과 체온이 배어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텍스트 너머에 있는 ‘사랑의 실체’를 떨리는 가슴으로 만지게 하는 법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