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1:22-34 평화, 척박한 땅에 심는 영원의 나무 ; 흔들리는 세상에서 영원을 살다
.
신앙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의 우물을 파고, 당장 그늘을 볼 수 없을지라도 미래를 위해 한 그루의 에셀 나무를 심는 거룩한 인내입니다.
*
경계는 늘 긴장을 품고 있습니다. 너와 나, 내 것과 네 것이 부딪치는 지점마다 소음이 끊이지 않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풍경입니다. 아브라함이 머물던 그랄 땅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물 한 모금이 생명과 직결되는 광야에서 '우물'은 생존의 기반이자 다툼의 불씨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창세기 21장은 낯선 평화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이 군대 장관 비골을 대동하고 아브라함을 찾아온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말합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창 21:22). 아비멜렉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브라함의 도덕적 완벽함이 아니라, 그의 삶에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감지했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교회 안의 사람들보다 교회 밖의 사람들의 눈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십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부족한 그를 끝까지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두 사람은 평화 조약(Berit)을 맺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낭만적인 평화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비멜렉의 종들이 우물을 빼앗은 일을 침묵하지 않고 따끔하게 책망합니다. 참된 평화는 갈등을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직면하고 매듭을 푸는 과정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을 '브엘세바', 즉 '맹세의 우물'이라 이름 짓습니다. 칼과 창이 부딪치던 땅이 서로의 생존을 존중하는 약속의 땅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 평화의 언약 끝에 아브라함이 한 행동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는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하나님(El Olam)'의 이름을 부릅니다. 에셀 나무는 위성류(tamarisk)라고도 불리는데, 뿌리를 깊게 내리고 아주 더디게 자라는 나무입니다. 지금 심어서 당장 내가 그늘을 누릴 수 있는 나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왜 이 나무를 심었을까요?
그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비록 나는 나그네처럼 이 땅을 떠돌다 가겠지만, 나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내가 떠난 후에도 누군가 이 나무 그늘에서 쉬어가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바로 '영생'을 잇대어 사는 성도의 태도입니다.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급급했던 아브라함이 이제는 '영원(Olam)'을 내다보는 사람으로 성숙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당장의 성과가 보이지 않아 조바심 내는 벗님들.
세상은 우리에게 "빨리 열매를 내놓으라"고 재촉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서두름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누군가와 화해하고, 용서하고, 작은 선행을 베푸는 것은 척박한 땅에 에셀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당장은 초라해 보일지 모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심은 믿음의 나무는 자라나 훗날 지친 누군가에게 시원한 그늘이 되어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짧지만, 우리가 심은 사랑은 영원하신 하나님(El Olam) 안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 갈등의 땅에 평화의 묘목을 심는 여러분의 거친 손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
창세기 21:22-34 낯선 땅에서 심은 에셀 나무, 그 영원한 평화의 그늘
.
우리는 비루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드러내는 신비한 존재이며, 척박한 관계의 땅에 평화의 나무를 심어 타인에게 그늘을 내어주는 ‘영원(El Olam)’의 잇대어 사는 사람들입니다.
*
바람결에 실려 오는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오늘 하루도 저마다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내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때로 낯선 타국 땅처럼 서럽고, 생존을 위한 투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 광야처럼 막막하기만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창세기 21장의 아브라함 역시 그랄 땅이라는 낯선 곳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척박한 일상의 한복판에서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군대 장관 비골을 대동하고 아브라함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창 21:22). 이 고백은 아브라함이 대단한 도덕적 성취를 이루었거나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기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살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 속였던 비겁한 전력이 있는, 우리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실패와 연약함조차 품어 안으시고, 그의 삶을 당신의 은총으로 감싸주셨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감지했습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치부는 드러내는 순간 더 이상 치부가 아니게 된다(Monstra tuas fragilitates)”고 했습니다.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이 드러나는 그 자리야말로,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는 거룩한 ‘틈’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으며, 우물을 빼앗았던 일에 대해 책망합니다. 아브라함은 갈등을 피하기 위해 침묵하는 대신, 정직한 언어로 문제를 직면함으로써 거짓된 평화가 아닌 진정한 화해를 시도합니다. 그리고 맹세의 우물이라는 뜻의 ‘브엘세바’에서 암양 일곱 마리를 주며 평화 조약을 맺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분쟁을 끝내는 행위가 아닙니다. 나의 소유를 주장하기보다 타자와 공존하기 위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평화의 묘목’을 심는 행위입니다.
이 깊은 신앙의 신비를 우리 일상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을 베틀의 날실과 씨실같습니다. 베틀에 세로로 놓인 날실이 영원이라면, 가로로 놓인 씨실은 시간입니다. 묵상은 “영원이라는 날실을 근거로 하여 시간이라는 씨실로 직조하는 무늬”와 같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까닭은, 헝클어진 우리 삶의 날실을 가지런히 하여 하나님의 뜻이라는 아름다운 무늬를 짜내기 위함입니다. 묵상은 단순히 성경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어내도록 허락하고 내 삶을 하나님의 이야기(Narrative) 속으로 합류시키는 ‘서사적 여정’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장면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모든 협상이 끝난 후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영원하신 하나님(El Olam)의 이름을 부릅니다(창 21:33). 에셀 나무는 척박한 사막에서도 잘 자라며, 잎이 무성하여 나그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는 나무입니다. 당장의 유익이 아니라 먼 훗날 누군가가 쉴 그늘을 마련하기 위해 나무를 심는 마음, 이것이 바로 ‘영원(Olam)’을 잇대어 사는 성도의 품격입니다. 김기석 목사님은 “세상의 모든 것이 낡아지고 사라지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뢰 속에 심겨진 것들은 영원히 남는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신앙에 대한 회의가 들고, “나 같은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무력감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완벽한 영웅이 아니라, 비틀거리는 아브라함과 함께하셨듯 오늘 연약한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브엘세바입니다.
이제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우리 삶의 자리에 평화의 에셀 나무 한 그루를 심으십시오. 누군가를 환대하고, 억울함을 풀고, 작은 친절을 베푸는 그 소박한 행위들이 자라나, 훗날 지친 영혼들이 깃들 수 있는 ‘은총의 숲’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심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입니다.
성도의 삶은 맑은 날 성당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의 빛과 같습니다. 유리는 그 자체로 깨지기 쉽고 투박한 조각들에 불과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빛이 그 뒤에서 비추실 때, 우리의 상처와 얼룩조차도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고 황홀한 색채로 공간을 채우는 ‘거룩한 예술’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