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18 편견의 담장을 넘으시는 파격의 은총 ; 반복되는 실패, 변함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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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단정한 나의 좁은 편견이 깨어지는 자리에서,
부끄러운 나의 실패조차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파격을 만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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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참으로 잊어버리는 존재입니다. 혹은, 참으로 변하지 않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20장의 아브라함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소돔의 멸망을 목격하고 그랄 땅으로 이주한 그는, 또다시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애굽 왕 바로 앞에서 보였던 그 비겁한 생존 본능이 수십 년의 세월과 숱한 은혜의 체험 뒤에도 여전히 그의 내면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의 연조가 깊어지면 인격도 성숙해질 것이라 기대하지만, 위기의 순간 튀어나오는 것은 여전히 ‘지질한’ 옛 자아일 때가 많습니다.
아비멜렉 왕이 사라를 취하려 할 때, 하나님은 꿈에 나타나 그를 막으십니다. 놀랍게도 이방 왕 아비멜렉은 하나님 앞에서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창 20:4)라며 자신의 온전함을 항변합니다. 송민원 목사는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에서 이 장면의 기막힌 아이러니를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이방인이라 여겨졌던 아비멜렉은 도리어 정직과 공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도덕적 우위가 완전히 역전된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추궁 앞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속내를 들킵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창 20:11). 이것이 아브라함의 결정적 오판이었습니다. 그는 ‘내 경계 밖’의 세상, 즉 이방 땅 그랄에는 하나님이 안 계시거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영성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 오만이 빚어낸 편견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의 신학적 울타리 안에 가두려 했으나, 하나님은 이미 그가 ‘없다’고 생각한 그곳에서, 그가 ‘이방인’이라 규정한 사람들의 양심 속에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반복되는 자신의 허물 때문에 신앙의 자리를 떠나고 싶은 벗님들.
이 사건의 결말은 더욱 충격적인 은혜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쟁이 아브라함을 책망하여 내치시는 대신, 그를 ‘선지자’(창 20:7)라 칭해주십니다. 그리고 그가 기도해야만 아비멜렉의 집이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고는 아브라함이 쳤는데, 수습과 축복의 권한을 다시 그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언약을 무효화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파격적인 은총입니다. 우리는 자주 세상 사람보다 못한 도덕성으로 손가락질받곤 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더 하더라”는 말에 고개를 들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부끄러움조차 덮으시고, 기어이 우리를 세상의 치유를 위한 기도의 도구로 세우십니다.
신앙은 “나는 옳고 세상은 틀렸다”는 오만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도 계시지만, 우리가 함부로 판단했던 세상의 낯선 이웃들 속에서도 생생히 살아계십니다. 오늘, 나의 좁은 편견을 깨뜨리시고, 실수투성이인 나를 들어 다시금 ‘복의 통로’로 삼으시는 그 뻔뻔할 정도로 넉넉한 은혜 앞에 감사함으로 엎드릴 뿐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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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1-18 두려움의 그늘을 걷어내는 은총의 새벽, 그 ‘염치없는’ 희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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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섣부른 판단과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 비루한 현실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마침내 타자를 위한 기도의 자리에 서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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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무게를 견디며 고단한 삶의 순례길을 걷고 계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때로 짙은 안개 속처럼 막막하여,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과연 이 길 끝에 희망은 있는지 묻게 만듭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창세기 20장의 아브라함도 그러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그가 또다시, 마치 오래된 습관처럼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 속입니다. 애굽에서의 실패를 답습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숭고한 성자가 아닌, 생존을 위해 허둥거리는 나약한 인간의 민낯을 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 장면을 두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자신의 ‘이성’과 ‘신중함’을 의지했기에 발생한 일이라고 진단합니다. 아브라함은 나름대로 치열하게 고민했을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창 20:11). 이것은 단순한 핑계가 아닙니다. 송민원 교수는 이 본문을 ‘수평적 읽기’로 해석하며, 당시 그랄 사회가 낯선 이(stranger)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곳이었는지를 지적합니다. 외부인을 죽이고 소유를 빼앗아도 아무런 법적 제재를 받지 않는 사회, 즉 ‘환대가 사라진 사회’에서 아브라함이 느꼈을 공포는 실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비극은 두려움 그 자체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괄호 치고 내 방식대로 생존을 도모할 때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의 ‘처세술’은 결국 아내를 위험에 빠뜨리고, 이웃 아비멜렉에게도 죄를 짓게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데 있다(Hominum miseria)”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비참함과 연약함을 하나님께 맡기기보다, 스스로의 꾀로 모면하려다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아브라함이 실패한 그 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를 ‘선지자’라 칭하시며, 아비멜렉에게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라고 말씀하십니다(창 20:7). 이것은 아브라함이 잘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당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가시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총’ 때문입니다. 김기석 목사님은 이를 두고 하나님은 우리의 오물 같은 현실 속에 풍덩 뛰어드셔서 우리를 건져내시는 ‘동고(同苦)의 사랑’을 지닌 분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꾸짖기보다, 그 실패의 현장에 개입하셔서 상황을 반전시키시고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토록 끈질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내면에 깊이 새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은 “거울 속에 있는 나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나를 보는 일”, 즉 “생각을 생각하는 일”입니다. 또한 묵상은 몸에 밴 관성을 거슬러 하나님 앞에 멈춰 서는 ‘혁명’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랄 땅에 들어설 때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두려움을 묵상했더라면, 그는 "이곳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단정 짓는 대신 "여기에도 하나님은 계신다"는 믿음의 혁명을 이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내 안에 똬리 튼 두려움의 실체를 마주하고,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크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결말은 더욱 감동적입니다. 비겁했던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십니다(창 20:17). 이기주 작가는 “타인의 세계를 존중할수록 내 세계도 깊어진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타인을 속였던 자리에서, 이제 타인의 생명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자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부끄러운 실패를 딛고 일어선 자만이 드릴 수 있는 가장 진실한 기도입니다. 한동일 변호사가 말했듯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길의 시작"이며, 그 부끄러움을 안고 타인을 위해 엎드릴 때 우리는 비로소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납니다.
때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반복되는 죄와 연약함 때문에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염치로..." 하며 뒤로 물러서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이 아니라, 우리의 깨어짐 사이로 당신의 빛을 비추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실패는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오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자책의 감옥에서 걸어 나오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비루함마저 끌어안으시는 주님의 옷자락을 붙드십시오. 우리가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누군가를 위해 축복의 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삶은 ‘염치없는 희망’으로 다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서툰 목수가 지은 ‘비틀린 집’과 같습니다. 기둥은 휘고 문짝은 삐걱거리지만, 그 틈새로 햇살이 스며들고 바람이 통하기에 그 집은 비로소 숨을 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듯하지 못한 삶의 틈새를 당신의 은혜라는 회반죽으로 메우시며, 그곳을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안전한 ‘피난처’로 완성해 가십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