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01-18 두려움의 반복 속에 임한 보호 : 닫힌 태를 여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부끄러운 선지자

by 평화의길벗 posted Jan 28, 202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창세기 20:01-18 두려움의 반복 속에 임한 보호 : 닫힌 태를 여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부끄러운 선지자

*

소돔의 멸망(19장) 이후, 아브라함은 남방 네게브 지역 그랄로 이주합니다. 그는 12장에서 애굽 왕 바로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이에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였으나,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그를 막으시고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온전함을 항변하고, 하나님은 그가 범죄하지 않도록 막으셨음을 확인해 주십니다. 아비멜렉의 책망을 들은 아브라함은 자신의 두려움 때문에 그랬음을 변명합니다. 결국 아비멜렉은 사라를 돌려보내고 재물을 주어 보상하며,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를 통해 아비멜렉 집안의 태가 열리는 치유가 일어납니다.

*

# 역사·문화적 배경 : 그랄은 블레셋 지역의 성읍이며, 아비멜렉은 당시 그 지역 통치자의 호칭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족장 시대에 유력자와의 정략결혼은 평화 조약의 일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방 땅에서 생존을 위해 아내를 누이로 소개하는 당시의 관습적(그러나 기만적인) 생존 전략을 다시 사용합니다.

# 신학적 배경 : 이 사건은 이삭 출생(21장) 직전에 위치합니다. 사라가 이방 왕의 하렘에 들어간 것은 약속의 자손(씨)에 대한 치명적인 위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성취를 위해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십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성경 최초로 ‘선지자(나비)’로 불립니다.

# 수평적 읽기 관점 : 이 관점은 아브라함을 무결점의 영웅으로 보지 않고, 두려움에 빠진 연약한 인간으로서 타자(아비멜렉)와 맺는 관계의 실패와 그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곳’이라며 세상을 정죄했지만, 정작 윤리적 잘못은 아브라함이 저지르고 이방 왕 아비멜렉이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펼쳐집니다.

*

# 1-3,7절 반복된 거짓말과 하나님의 급박한 개입 : 생존 본능으로 인해 세상과 타협한 성도와 언약을 지키기 위해 죄를 차단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움 때문에 세상 앞에서 비굴해지고 실패할 때에도, 당신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 위기 속에 직접 뛰어들어 막아주시는 절대적인 보호자이십니다.

.

아브라함이 그랄로 이주하여 아내 사라를 누이라 하므로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갑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여 “네가 죽으리라” 경고하시고, 사라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그와 그에게 속한 자가 다 죽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

창세기 12장의 실패가 20장에서 반복됩니다. 송민원 박사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위기 앞에서 쉽게 변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은 ‘수직적 믿음’(하나님 신뢰)보다 ‘수평적 처세’(거짓말)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12장과 달리 이번에는 하나님의 개입이 훨씬 즉각적이고 직접적입니다. 왜냐하면, 사라의 태는 약속의 자녀 이삭이 잉태되어야 할 거룩한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아브라함)은 선지자라”(7절)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도덕적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하신 신분과 역할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실패를 덮고 그를 당신의 대변자로 세우십니다.

.

우리는 “예수 믿고 변했다”고 하지만, 결정적인 위기가 닥치면 과거의 습관(거짓말, 타협, 회피)으로 돌아가는 ‘반복적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때 우리는 좌절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나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 때문에 우리를 지키십니다. 오늘 내가 반복하고 있는 죄의 패턴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개입하셔서 막아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실수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화할 수 없습니다.

*

# 4-6절 이방 왕의 항변과 예방적 은혜 : 세상(아비멜렉)의 도덕적 항변을 인정하시고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하나님은 믿지 않는 자들의 양심과 도덕성도 감찰하시며, 알지 못해서 짓는 죄까지도 막아주시는 세밀한 섭리의 주관자이십니다.

.

아비멜렉은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라고 항변하며, 자신은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행했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이를 인정하시며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

놀랍게도 이방 왕 아비멜렉이 ‘의(Righteousness)’와 ‘온전함(Integrity)’을 호소합니다. 수평적 읽기는 여기서 성도와 세상의 도덕적 역전 현상을 포착합니다. 믿음의 조상은 거짓말을 하고, 이방 왕은 정직을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양심을 인정해 주십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예방적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이 사라를 범하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 가정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아비멜렉이 죄를 짓고 멸망하지 않도록 보호하신 은혜이기도 합니다.

.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 중에도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이웃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무시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그들의 윤리 의식이 그리스도인보다 나을 때가 있음을 부끄럽게 인정해야 합니다(간혹 우리의 신앙 윤리를 가지고 착각하면서 다른 이들을 향해 도덕적 우위에 있는 것처럼 고자세로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경우들을 볼 때마다 참 부끄럽습니다). 또한, 내가 죄를 짓지 않은 것이 나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환경과 상황을 통해 막아주신 은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죄지을 기회가 차단된 것이 곧 축복입니다.

*

# 8-10절 세상의 책망과 성도의 수치 : 도덕적 우위를 상실한 신앙인을 향한 세상의 준엄한 꾸짖음.

하나님은 때로 세상 사람들의 입을 통해 믿음 없는 우리의 위선과 무책임을 부끄럽게 드러내시고 깨닫게 하시는 교관이십니다.

.

아비멜렉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신하들을 불러 일을 알리고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불러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네가 나와 내 나라에 큰 죄를 불러들일 뻔하였다”고 책망하며, “네가 무슨 뜻으로(무슨 꿍꿍이로) 이렇게 하였느냐”고 묻습니다.

.

이것은 창세기에서 가장 민망한 장면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이방 왕에게 공개적인 문책을 당합니다. 아비멜렉의 질문(“네가 어찌하여”)은 죄를 범한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질문과 닮아 있습니다. 송민원 식의 해석으로 보면, 이것은 수평적 관계의 신뢰가 깨어진 현장입니다. 아브라함의 거짓말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웃 공동체(그랄)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사회적 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신뢰를 잃으면, 복음의 통로가 막히고 오히려 세상의 근심거리가 됩니다.

.

오늘날 한국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듣는 비판과 조롱이 바로 아비멜렉의 책망과 같습니다. “교회가 왜 그래? 너희 때문에 우리가 더 힘들다.” 우리는 이 소리를 흘려듣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부정직함, 이기심, 배타성이 세상에 해를 끼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책망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잃어버린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겸손히 회개해야 합니다.

*

# 11-13절 아브라함의 변명 - 두려움의 뿌리 (20:11-13): 세상에 대한 편견(“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과 자기방어 기제로 합리화하는 인간의 연약함.

하나님은 우리의 깊은 불신과 두려움(“나를 죽일까 하여”)이 낳은 구차한 변명까지도 다 들으시고, 그 연약함조차 품으시는 긍휼의 아버지이십니다.

.

아브라함은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했다”고 답합니다. 또한 사라는 실제로 이복누이이며, 하나님이 자기를 떠나게 하실 때에 이렇게 하기로 서로 약속했다고 변명합니다.

.

아브라함의 변명은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두려움’과 ‘편견’을 드러냅니다. 그는 “이곳(세상)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고 단정했습니다. 이것은 독선적인 신앙관입니다. 그는 세상은 모두 악하고 자신만이 옳다는 착각 속에 빠져,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거짓을 정당화했습니다. ‘떠돌이 삶’(13절)에 대한 불안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수평적 읽기는 아브라함이 타자를 ‘잠재적 적’으로만 규정함으로써 진정한 소통과 관계 맺기에 실패했음을 보여줍니다.

.

우리는 세상과 직장을 ‘하나님이 없는 곳’, ‘정글 같은 곳’으로 규정하고,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적당한 거짓과 타협은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나를 해고할까 봐”, “왕따 당할까 봐” 신앙 양심을 숨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곳에도 계시며, 우리가 적으로 생각하는 그 사람들의 양심 속에도 일하고 계십니다. 두려움은 편견을 낳고, 편견은 죄를 낳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십시오.

*

# 14-18절 회복과 중보 - 선지자의 사명 : 수치를 덮어주시는 은혜와 부족한 자의 기도를 통해 세상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역설적 방법.

하나님은 실패한 아브라함을 다시 ‘선지자’의 자리에 세우시고, 그의 기도를 통해 세상의 닫힌 문(태)을 여시는 회복과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

아비멜렉은 양과 소, 종들을 주고 사라를 돌려보내며 땅에 거주할 권리를 줍니다. 사라에게 은 천 개를 주어 수치를 가리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사래의 일로 그 집의 태를 닫으셨기 때문입니다.

.

결말은 은혜롭고 역설적입니다. 피해자인 아비멜렉이 가해자인 아브라함에게 보상(사라의 수치를 가리는 은혜)을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아브라함 자신은 아내가 없어(불임) 고통받는데, 남을 위해 태를 열어달라고 기도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도덕적으로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를 ‘복의 통로’(12:3)로 부르셨기에 그 직분을 수행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로 이방인의 태가 열리는 것은, 장차 이삭을 통해 열방이 복을 받게 될 것의 예표입니다.

.

우리의 자격이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고 실수투성이지만, 세상은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나도 내 코가 석 자인 상황(경제적 어려움, 질병 등)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을 위해, 나라를 위해, 직장 동료를 위해 축복하며 기도하십시오. 내가 남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나의 문제(닫힌 태)도 해결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의 영광입니다.

*

# 거둠의 기도

연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며, 

실패한 자를 다시 세워 복의 통로로 삼으시는 은혜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브라함의 비겁한 변명과 두려움이 

바로 저의 모습임을 고백합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인간적인 처세술과 거짓을 의지했습니다. 

세상은 악하고 나는 의롭다는 교만에 빠져,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윤리 의식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했음을 회개합니다.

주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위기의 순간마다 막아주시는 ‘예방적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나의 실수가 하나님의 언약을 폐하지 못함을 믿습니다. 

이제는 두려움 때문에 세상을 적으로 돌리지 않게 하시고, 

세상의 양심을 존중하며 정직하게 행하는 담대함을 주시옵소서.

비록 우리는 부족하여도 우리에게 맡기신 ‘선지자의 사명’을 기억합니다. 

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고통받는 이웃과 세상을 위해 중보의 손을 들게 하옵소서. 

우리의 기도를 통해 닫힌 태가 열리고, 

막힌 관계가 뚫리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 되시며, 

우리의 수치를 가려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