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7:1-27 몸에 새겨진 약속, 지워지지 않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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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우리의 불가능한 현실에 갇힌 냉소적인 웃음조차, 기어이 참된 기쁨의 웃음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을 몸으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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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때로 말보다 더 무거운 짐이 됩니다. 창세기 16장의 하갈 사건 이후, 17장이 열리기까지 무려 13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브람의 나이 구십구 세. 이 긴 침묵의 시간 동안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그는 자신의 인생을 ‘이만하면 되었다’고 타협했을지 모릅니다. 이스마엘이라는 현실적인 아들이 있으니, 더 이상의 기적은 필요 없다고, 꿈꾸는 것은 부질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을 것입니다. 늙어버린 육체와 식어버린 열정, 그것이 아브람이 마주한 건조한 현실이었습니다.
바로 그 황혼의 시간에 하나님이 침묵을 깨고 나타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El Shaddai)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송민원 목사는 그의 책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에서 이 장면을 매우 극적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실패와 타협을 질책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가능성이 완전히 소진된 그 시점에, 당신의 약속이 여전히 유효함을 선포하러 오신 것입니다. ‘완전하라’는 말은 도덕적 결벽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너의 존재를 온전히 통합하라는 초청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바꾸십니다. 한 부족의 조상에서 ‘열국의 아비’로, 존재의 지평을 넓혀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요구하신 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남자의 가장 은밀하고 생명과 직결된 부위에 칼을 대어 흔적을 남기는 행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 생명의 근원이 너의 육체적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언약에 있음을 뼈와 살에 새겨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사랑받는 존재는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할례는 “너는 내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지워지지 않는 사랑의 낙인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반응은 뜻밖입니다. 그는 엎드려 웃었습니다.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창 17:17). 이것은 기쁨의 웃음이 아니라, 불가능한 현실을 꿰뚫어 보는 씁쓸한 냉소였습니다. “하나님, 이스마엘이나 잘 살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솔직한 우리의 심정 아닙니까?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냉소를 품을 때가 많습니다. “기적은 무슨, 그냥 별일 없이 사는 게 복이지.”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그 냉소적인 웃음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웃음을 받아 “그래,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이삭(웃음)이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의 그 허탈한 ‘비웃음’을 내가 진짜 생명의 ‘웃음’으로 바꾸어 주겠다는 선언입니다. 인간의 불신앙조차 품어 안으시고 약속의 재료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넉넉한 유머와 여유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건조함 속에 갇혀 더 이상 기적을 기대하지 않는 벗님들.
혹시 여러분의 몸과 마음에 패배감의 흔적이 깊게 배어 있지는 않으십니까? 늙고 지쳐버린 아브라함처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다시 시작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은 내 몸에 새겨진 세상의 상처를, 하나님이 새겨주신 은총의 흔적으로 덮어가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냉소조차 춤이 되게 하시는 그분 앞에서, 다시 한번 믿음의 옷깃을 여미십시오. 99세의 절망 앞에서도 “너는 열국의 아비다”라고 불러주시는 그 음성이, 오늘 당신을 다시 살게 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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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7:1-27 몸에 새긴 언약, 그 지독한 사랑의 기억법
일상의 관성에 젖어 ‘이만하면 되었다’고 안주하려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몸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시면서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어코 당신의 거룩한 꿈에 동참시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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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세월의 무늬가 우리네 얼굴과 마음에 켜켜이 쌓여가는 계절입니다. 별일 없이 사느냐는 인사가 무색할 만큼, 우리는 저마다의 무게를 견디며 오늘이라는 시간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비루함 속에서도 여전히 신앙의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창세기 17장의 시간은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입니다.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지 13년이라는 침묵의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이제 더 이상 기적을 바라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s 17:18)라는 그의 대답처럼, 그는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안주(安住)의 삶에 익숙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침묵을 깨뜨리며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El Shaddai)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김기석 목사님은 이 장면을 두고 하나님께서 마치 잊으신 것처럼 약속의 실현을 지연시키시다가, 인간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절망의 끝자락에서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는 역설을 포착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굳어버린 일상을 흔들어 깨우십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그의 ‘이름’을 바꾸십니다. ‘고귀한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람에서 ‘열국의 아비’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바꾸십니다. 송민원 교수는 성경에서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단순한 호칭의 변화나 명성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생명이 이어지는 ‘존재의 지속*과 공동체의 정체성이 새로워지는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개인의 안락한 삶 속에 가두지 않으시고, 뭇 생명을 살리는 거대한 생명의 통로로 확장시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기주 작가는 “말과 글에는 나름의 온도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새 이름을 주셨을 때, 그 이름 안에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기대와 사랑의 온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너는 이제 너 혼자 잘 먹고 잘사는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존재를 품고 살려내야 할 ‘열국의 어미’요 ‘아비’라는 선언입니다. 이 새로운 정체성을 망각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왜 하필 몸에 흔적을 남기는 할례였을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살을 베어냄으로써, 그가 화장실을 갈 때마다, 몸을 씻을 때마다 “나는 내 힘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빚진 존재다”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형벌이 아니라, 망각하기 쉬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지독한 사랑의 기억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고, 내 삶이 하나님의 거대한 약속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희망을 가진 이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Qui spem habet, aliter vivit)”고 했습니다. 99세의 아브라함처럼 모든 가능성이 닫힌 것 같은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와 “너는 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성령의 인침을 남기십니다.
우리는 완벽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었듯(창 17:17), 우리의 믿음 없음과 냉소조차도 하나님은 품어 안으십니다. 묵상은 바로 이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고, 내 삶의 비루함을 그분의 은총 안에 통합시키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와 연약함, 그 ‘지나간 시간의 얼룩’조차도 당신의 구원 드라마를 완성하는 소중한 재료로 사용하십니다.
이제 익숙한 절망과 관성을 떨치고 일어나십시오. 우리 몸과 마음에 새겨진 그분의 흔적을 어루만지며, 다시 ‘열국의 아비’로, ‘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가 온몸으로 살아낸 흔적을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몸과 영혼에 새기신 언약은 늙은 나무의 몸통에 박힌 ‘옹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한때 가지가 잘려 나간 아픔의 흔적이고 상처였지만, 세월이 흘러 나무의 가장 단단하고 아름다운 무늬가 되어, 거센 비바람에도 나무가 썩거나 부러지지 않게 지탱해 주는 가장 강인한 중심이 되어줍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