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3:1-18 넉넉한 품으로 빈 들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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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눈에 보이는 풍요를 좇는 욕망의 질주를 멈추고, 기꺼이 타자를 위해 나의 권리를 비워내는 거룩한 넉넉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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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저마다 가슴속에 바벨탑 하나씩을 품고 살아갑니다. 더 높이 오르고 싶고, 더 많이 소유해야 안전할 것 같은 불안이 우리를 채찍질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결핍의 마음(scarcity mindset)'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타자는 나의 몫을 빼앗아 가는 잠재적 적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인 창세기 13장의 아브람과 롯의 갈등도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애굽에서 돌아온 그들의 소유는 넉넉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창 13:6)습니다. 물질은 늘어났으나 관계는 비좁아진 것입니다.
이 위기의 순간, 아브람은 롯에게 놀라운 제안을 건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 장면은 수직적 욕망에서 수평적 연대로의 전환입니다. 바벨탑의 사람들이 신이 되기 위해 수직으로 상승하려 했다면, 아브람은 이웃과 공존하기 위해 수평으로 물러섭니다. 그는 '누가 더 좋은 땅을 차지할 것인가?'라는 생존의 질문을 멈추고, '우리가 어떻게 한 형제로서 함께 살 것인가?'라는 공존의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중요했던 것은 '땅(소유)'이 아니라 '사람(관계)'이었습니다.
롯은 눈을 들어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요단 지역을 선택합니다. 화려하고 풍요로운 곳, 욕망이 즉각적으로 충족되는 곳입니다. 반면 아브람은 빈 들에 남겨집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는 패배자요, 실속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빈손'이 된 순간,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롯은 욕망의 눈을 들어 땅을 보았지만, 아브람은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이 주시는 지평을 봅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경쟁에 지쳐 신앙의 길을 회의하는 벗님들.
때로는 양보하고 손해 보는 삶이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당장 내 손에 쥐어지는 것이 없어 불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움켜쥐었던 손을 펼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 빈손을 당신의 은혜로 채우십니다. 신앙은 내가 쟁취한 전리품으로 내 성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형제를 얻고, 그 빈자리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자꾸만 눈에 보이는 소돔 땅을 기웃거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책망하기보다, 실수투성이인 우리 삶의 자리까지 찾아오셔서 "두려워 말라" 말씀하시며 더 넓은 땅, 영원한 본향을 약속해 주십니다. 부디 눈앞의 이익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기를, 척박한 빈 들에서도 넉넉한 품으로 서로를 안아주는 '복의 통로'가 되기를 빕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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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3:1-18 욕망의 소란을 잠재우는 '거룩한 물러섬', 그 빈자리에 채워지는 은총
갈등의 현장에서 기득권을 내려놓고 타자를 위해 기꺼이 물러설 때, 그 텅 빈 여백 속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눈을 들어 약속의 땅을 보게 하시는 놀라운 은총을 채워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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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분주한 걸음을 잠시 멈추고, 영혼의 고요를 찾아 묵상의 자리에 있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흡사 거대한 전쟁터와 같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갖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우리는 서로를 밀치며 아귀다툼의 현장을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창세기 13장의 풍경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애굽에서 돌아온 아브람과 롯은 소유가 많아져 더 이상 함께 거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목자들 사이의 다툼은 단순한 말싸움이 아니라, 생존을 건 치열한 ‘생존 투쟁’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가인과 아벨 사이에 있었던 형제간의 비극적 폭력이 재현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로 진단할 수 있습습니다. 한정된 자원을 두고 벌어지는 갈등 앞에서 아브람은 놀라운 선택을 합니다. 그는 손윗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양보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 이것은 단순히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타협이 아닙니다. 갈등이 폭력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거룩한 물러섬’이자, 타자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는 ‘성숙한 어른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결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치열한 ‘말씀 묵상’의 힘입니다. 아브람이 눈앞의 이익보다 관계의 평화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롯은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곳은 물이 넉넉하여 마치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아 보였습니다(창 13:10). 롯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가장 좋은 시간과 공간을 선점했지만, 아브람은 롯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건네주었습니다. 겉보기에 아브람은 손해 본 사람처럼 보입니다. 척박한 산지에 남겨진 패배자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동일 변호사가 라틴어 수업에서 인용한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Verumtamen oportet me hodie et cras et sequenti ambulare)"라는 말처럼, 아브람은 묵묵히 믿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롯이 떠난 후,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창 13:14). 롯이 욕망의 눈으로 땅을 바라보았다면, 아브람은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시선으로 약속의 땅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움켜쥔 손을 펴서 타자에게 양보할 때, 그 빈손에 하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더 큰 것으로 채워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는 세상의 셈법으로 살지 않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고, 신앙 때문에 손해 보는 것 같아 회의가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비워낸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공간입니다. 내가 억지로 쟁취하지 않아도, 주님은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우리 삶을 가장 아름답게 빚어 가십니다. 우리는 완벽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그 ‘끙끙 앓으시는’ 사랑 때문에 존귀한 자들입니다.
이제 무거운 경쟁의 짐을 내려놓고, 서로에게 조금 더 너그러운 곁을 내어줍시다. 아브람이 헤브론에 이르러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듯(창 13:18), 우리의 삶의 자리마다 양보와 섬김의 제단을 쌓아 올립시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일상의 순례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동양화의 ‘여백(餘白)’과 같습니다. 빽빽하게 채워진 그림보다 비어 있는 공간이 더 깊은 울림을 주듯이, 우리가 욕심으로 채우려던 것을 비워내고 남겨둔 그 자리에 하나님은 비로소 당신의 뜻을 그려 넣으시며 우리 인생을 가장 격조 높은 예술 작품으로 완성해 가십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