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5:1-32 죽음의 행렬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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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5장의 족보는 죽음의 나열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형상을 우리 속에 이어가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생명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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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교우 여러분, 그리고 생의 고단함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벗님들, 평안하신지요.
성경을 읽다 보면 때로 높은 벽을 마주하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창세기 5장이 바로 그런 순간입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몇 세를 살다가 죽었더라”는 단조로운 문장이 지루한 비트처럼 반복됩니다. 이 건조한 이름들의 나열 앞에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도대체 이 낡은 족보가 오늘 나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송민원 교수님의 세밀한 안내를 따라 이 텍스트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곳에서 뜻밖의 경이로운 풍경과 마주하게 됩니다. 흔히 우리는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전적 타락’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셋을 낳을 때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창 5:3)는 구절을 두고, 이제 신성(神性)은 사라지고 죄된 본성만 남았다고 탄식하곤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습니다. 홍수 이후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6)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비록 에덴에서 쫓겨났을지언정, 우리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은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아담에서 셋으로, 셋에서 에노스로 이어지는 생명의 릴레이는 죄의 확산 과정이 아니라, 흙으로 빚어진 연약한 그릇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은총의 계승’입니다.
이 족보가 우리에게 건네는 더 큰 위로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덴에서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엄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날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려 930년을 살며 자녀를 낳고 생명을 이어갔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말씀을 바꾸신 것이냐고 따져 물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송민원 교수님은 여기서 하나님의 ‘인테그리티(Integrity, 무결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권위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죄인을 즉결 처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당신의 말씀이 문자 그대로 실현되는 것보다, 비록 죄인일지라도 우리와 관계를 맺고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죽었더라”는 후렴구는 절망의 조종(弔鐘)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엄혹한 운명 앞에서도 기어이 생명을 피워 올리고, 다음 세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물려준 인간 승리의 기록이자, 그 삶을 지탱해주신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때로 “낳고 죽었더라”는 한 줄 요약처럼 허무해 보일 수 있습니다. 특별한 영웅적 서사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그 평범한 생존 자체가, 죽음의 세력을 거스르며 하나님의 형상을 이 땅에 실어 나르는 거룩한 투쟁입니다.
오늘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누군가의 ‘지키는 자’로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 속에 태초부터 이어져 온 그 생명의 숨결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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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5:1-32 죽음의 계보 속에 흐르는 생명의 선율, 그 끈질긴 은총의 이어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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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이 비록 ‘태어나고 죽는’ 덧없는 반복처럼 보일지라도, 대를 이어 흐르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연속된 은총’을 발견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고단한 노동을 넘어선 참된 안식에 당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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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시간의 파고를 넘어 기적처럼 우리 앞에 당도한 새해의 여덟째 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창세기 5장은 언뜻 보면 지루한 이름들의 나열이자, “살고 아들을 낳았으며 죽었더라”는 문장이 반복되는 ‘죽음의 연대기’처럼 읽힙니다. 하지만 송민원 교수의 일깨움처럼, 이 장은 단순한 계보가 아니라 창조와 타락, 그리고 그 너머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 주는 장엄한 서사적 장치입니다.
우리는 흔히 아담의 불순종 이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며 자책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이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하면서도, 동시에 인류가 여전히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 받은 존재임을 선언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는 우리가 아무리 남루하고 연약한 실존일지라도, 우리 안에 깃든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정체성은 결코 소멸되지 않고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는 은혜의 연속성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한동일 선생은 삶이란 “내가 원하지 않고 내 의지와 무관하게 물려받은 것들을 원만하게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창세기 5장의 인물들 역시 죽음이라는 운명을 물려받았지만, 그들은 그 허무의 심연 속에서도 자녀를 낳고 이름을 지으며 생명을 이어 갔습니다. 특히 그 흐름 속에서 빛나는 존재가 바로 에녹입니다. 그는 단순히 생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에녹의 삶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그저 살아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누군가와 함께 걷고 있습니까?”
이 동행의 비결은 바로 ‘말씀 묵상’에 있습니다. 박대영 목사님은 묵상을 ‘동물적’인 것이라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단정하게 앉아 있는 정적인 행위가 아니라, 마치 사자가 먹이를 앞에 두고 으르렁거리듯 말씀을 온몸으로 씹고 맛보며 내 존재의 일부로 만드는 치열한 소통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이렇게 이드거니 씹어 소화할 때, 비로소 세속적 욕망에 구부러진 우리 마음이 펴지고 주님의 마음이라는 기준음에 우리 영혼이 조율(Tuning)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에 대한 회의가 안개처럼 밀려오고 일상이 적막강산처럼 느껴질 때 기억하십시오. 이기주 작가는 “사랑은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라는 이름을 통해 우리에게 ‘안식(Rest)’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아들이 우리를 위로하리라”는 고백은, 수고로운 노동과 고단한 삶의 현장 속에 하나님이 당신의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새해 첫날, 무언가를 성취해 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으십시오. 우리는 대단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존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빛과 같습니다. 별 하나는 미약해 보일지라도, 대를 이어 흐르는 그 빛의 행렬을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의 골짜기를 넘어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나아가는 명랑한 순례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친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의 ‘닻’과 같습니다. 파도는 끊임없이 배를 흔들고 멀미를 일으키지만,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 닻을 내리고 있는 한 배는 결코 방향을 잃지 않고 마침내 고요한 안식의 항구에 당도하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