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9:1-9 어둠을 베는 찬양, 그 거룩한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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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은 비루한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에 잇대어 절망을 베어내는 영혼의 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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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는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편의 말씀이 여러분의 굳어진 마음을 깨뜨리는 거룩한 도끼가, 아니 예리한 검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시편 149편은 충격적인 이미지로 가득합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다른 한 손에는 두 날 선 칼이 들려 있습니다(6절). 춤과 칼, 노래와 심판. 이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발 딛고 선 세상은 중력의 법칙이 지배합니다. 광양의 거친 산업 현장에서, 혹은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 속에서 우리의 어깨는 자주 쳐집니다. ‘나’라는 존재가 거대한 기계 부품처럼 느껴질 때, 신앙조차 내 삶의 무게를 덜어주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밤이 되면 침상은 안식의 자리가 아니라, 불면과 근심이 뒤척이는 고통의 자리가 되곤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바로 그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하라(5절)고 도전합니다. 현실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선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본문 4절은 그 이유를 가슴 벅차게 증언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우리는 자주 자신의 자격을 묻습니다. ‘내가 뭐라고, 내 꼴이 이런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자격 유무를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 즉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빈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는 이들을 ‘기뻐하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아름답게 하신다’는 말은 덧입혀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초라한 내면 위에 하나님은 ‘구원’이라는 가장 화려한 옷을 입혀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해내서가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기뻐하시기에 우리의 존재는 비로소 빛이 납니다.
그렇다면 우리 손에 들린 ‘두 날 선 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타인을 향한 정죄의 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짓누르는 절망과 무기력, 세상이 강요하는 거짓된 가치들을 베어버리는 ‘영적인 기개’입니다. 세상은 힘없는 자를 조롱하고, 돈과 권력이 없으면 실패한 인생이라 속삭입니다. 이때 성도는 찬양을 부르며 그 거짓된 속삭임에 저항합니다. “아니오, 나의 가치는 세상의 평가에 있지 않고 오직 나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악들의 목을 매는 사슬이자 결박입니다(8절).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의 길 위에서 회의하고 흔들리는 여러분.
신앙은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끝내 하나님 쪽으로 중심을 잡으려는 몸부림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화려한 성취보다, 상한 마음으로 드리는 진실한 노래를 더 기뻐하십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의 삶이 조금은 남루해 보일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을 기쁨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 벅찬 사랑을 기억하며, 절망의 중력을 털고 일어나 영혼의 춤을 추십시오. 여러분의 삶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부르시는 가장 아름다운 새 노래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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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9:1-9 비루한 일상을 깨우는 새 노래, 그 거룩한 파토스(Pathos)
진정한 찬양은 종교적 형식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보석처럼 빚으시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총에 응답하여 우리 삶의 ‘침상’에서부터 ‘정의의 칼’을 뽑아 드는 명랑한 순례의 발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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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저마다 성공과 풍요라는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며 달려가지만, 정작 우리 영혼은 부박(浮薄)한 소음 속에 유폐되어 길을 잃곤 합니다. 시편 149편의 시인은 이런 우리에게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라”고 요청합니다. 여기서 ‘새 노래’란 단순히 새로운 선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낡은 자아의 껍질을 깨뜨리고, 우리 삶의 날실과 씨실을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기준음에 맞추어 다시 직조해내는 ‘존재의 도약’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크다 자부하는 이들이 아니라, 세상의 변방으로 밀려나 “숨을 쉴 수 없다”고 호소하는 ‘겸비한 자(the humble)’들에게 승리를 안겨 주십니다(4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무너진 그 폐허의 자리까지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끙끙 앓으시는’ 분입니다. 히브리어로 긍휼을 뜻하는 ‘라훔’이 어머니의 자궁을 뜻하는 ‘레헴’과 어원이 같듯, 주님은 우리의 상처 입은 자궁 같은 현실 속에서 우리를 다시 빚어내십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혹 신앙에 대해 회의를 느끼거나 “이게 아닌데”라는 탄식 속에 계십니까? 시인은 성도들이 “그들의 침상에서 즐거워하라”고 노래합니다(5절). 침상은 우리가 가장 무력해지는 고독의 자리이자, 하나님의 현존을 깊이 경험하는 ‘안식의 성소’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거운 종교적 의무를 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자가 먹이를 앞에 두고 으르렁거리듯(Hagah, 묵상) 말씀을 온몸으로 씹어 소화하며, 우리 영혼을 그분의 세미한 음성에 조율하는 것입니다.
이 묵상의 끝에서 우리는 손에 ‘두 날 칼’을 쥐게 됩니다(6절). 이 칼은 타자를 해치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우리 내면의 이기적인 욕망을 도려내고 세상의 불의에 저항하는 ‘정의의 도구’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빚어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기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우리의 깨진 가슴 조각들을 모아 당신의 사랑을 증언하는 ‘삶의 메시지’로 삼으실 뿐입니다.
이제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라는 강박을 내려놓고, 우리를 존재 자체로 긍정하시는 주님의 가없는 자비에 몸을 맡깁시다. 그 압도적인 은총의 부력(浮力)을 신뢰할 때, 비로소 우리는 고단한 일상 속에서도 탬버린을 치며 춤추는 명랑한 순례자가 될 것입니다(3절).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찬연히 피어나는 ‘새 노래’의 발원지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