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 2:1-13 탐욕의 침상을 넘어, 우리를 모으시고 앞서 행하시는 목자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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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 2장은 권력을 이용해 가난한 이들의 생계 수단인 토지와 집을 밤낮으로 탈취하는 지도층의 탐욕을 고발하며 시작됩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거짓 평화와 번영의 예언에만 매달리며 참된 선지자의 경고를 거부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불의를 심판하시어 그들이 의지하던 땅에서 쫓겨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엄중한 심판의 끝은 절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흩어진 '남은 자'들을 양 떼처럼 다시 모으시고, 친히 왕이 되어 앞서 행하시며 구원의 길을 여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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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미가는 주전 8세기 후반 유다 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했습니다. 당시 신앗수르 제국의 팽창으로 북이스라엘이 멸망(주전 722년)하고 남유다 역시 풍전등화의 위기를 겪던 긴박한 시기였습니다. 상업 경제의 발달로 빈부 격차가 심화되었으며, 권력자들이 율법의 토지 보존 원칙을 무시하고 소농들의 기업을 독점하던 도덕적 타락기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수호자로서 공의를 실현하시는 재판장이시며, 동시에 자기 백성을 아끼시는 긍휼의 목자이십니다. 미가서는 아모스의 사회 정의와 이사야의 메시아 소망을 조화롭게 통합하여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를 예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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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절 탐욕의 계획과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
하나님은 우리가 홀로 잠드는 침상에서의 은밀한 계획까지 살피시며, 약자의 눈물을 닦으시기 위해 악인의 경영을 무너뜨리는 공의의 재판장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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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상에서 악을 꾀하고 날이 밝자마자 권력을 이용해 가난한 이들의 밭과 집을 강탈하는 자들에게 '화'가 선포됩니다. 이들이 이웃의 유업을 빼앗았기에, 하나님께서도 재앙을 계획하시어 그들이 의지하던 땅의 분깃을 침략자들에게 넘겨주어 다시는 제비를 뽑아 땅을 나눌 수 없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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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는 '화 있을진저'(호이)라는 장례식의 애곡 어휘를 빌려와 탐욕에 눈먼 지도자들의 영적 죽음을 고발합니다. 인간의 '계획'(하샤브)에 맞서 하나님이 재앙을 '계획'하신다는 대조적 표현은 역사의 주권자가 누구인지를 선명히 보여줍니다. '산업'과 '유산'은 단순한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는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뜻합니다. 이를 침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직접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이는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탈취한 사건과 맥을 같이하며, 야고보서 5:1-6에서 부한 자들에게 임할 고생을 경고하는 사도적 가르침으로 연결됩니다. 정직하지 못한 성공은 하나님의 '재앙의 때'를 앞당길 뿐이며, 진정한 소유는 오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만 보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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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밤잠을 설치며 고민하는 계획이 혹시 타인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것은 아닌지 부드럽게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가정의 경제 원칙이 세상의 약육강식이 아닌 나눔과 자족에 있는지 살피는 성숙함이 필요합니다.
부동산 투기나 자본의 폭주를 '하나님의 복'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구조적 불의에 신음하는 이들의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하며, 성공 지상주의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이 되지 않도록 서로를 격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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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1절 진리의 거부와 거짓 안식에 대한 경고
하나님은 달콤한 거짓 평화보다 아프지만 생명을 살리는 진실의 말씀을 선포하시며, 우리 삶의 기초를 정결케 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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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선지자들은 심판의 예언을 막으며 하나님은 인내하시는 분이니 재앙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미가는 그들이 평화로운 여행자의 옷을 벗기고 부녀와 아이들을 보금자리에서 쫓아내는 현실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오직 포도주와 독주를 약속하는 거짓말쟁이만을 선지자로 삼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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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영이 성급하시냐"는 반문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범죄를 덮는 방패로 악용하는 위선을 드러냅니다. '포도주와 독주'는 육체적 쾌락과 번영에 매몰된 감각적 종교성을 상징합니다. 미가는 하나님의 말씀이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만 유익하다는 원리를 세웁니다. 죄를 지적하는 말씀이 괴롭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말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영적 상태가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4:3은 사람들이 자기 사욕을 채우기 위해 가려운 귀를 긁어 줄 스승을 많이 두는 현상을 경고하는데, 이는 미가 당시의 상황과 닿아 있습니다. 안락한 거짓 평화에 머무는 것은 파멸로 가는 길이며, 하나님의 책망은 우리를 참된 안식의 땅으로 다시 부르시는 사랑의 초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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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칭찬해 주는 말에만 귀를 열고, 나의 허물을 찌르는 진리의 말씀에는 마음을 닫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 묵상의 시간이 단순한 위로를 넘어 내 삶의 구체적인 불의를 도려내는 수술의 시간이 되도록 마음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오늘날 강단이 성도들의 취향에 맞춘 '번영 신학'이나 '마약 같은 위로'로 채워지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니라, 세상이 반드시 들어야 할 하나님의 공의를 전하는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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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3절 남은 자의 소집과 성문을 여시는 왕
하나님은 심판의 잿더미 속에서도 남은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가로막힌 성문을 깨뜨리고 우리를 광명으로 인도하시는 선두에 서신 왕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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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야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반드시 모으시고, 보스라의 양 떼처럼 안전한 우리에 두십니다. 길을 여는 자가 앞장서서 성문을 부수고 나가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어 그들을 해방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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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자',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목자의 이미지는 시편 23편의 풍요로운 인도를 연상시키며 고난을 통과한 이들에게 주는 위로입니다. '길을 여는 자'(하포레츠)는 장애물을 깨뜨리고 길을 터뜨리는 구원자의 역동성을 나타냅니다. '남은 자'(쉐에리트)는 단순히 혈통적 생존자가 아니라 시련 속에서 정결해진 신앙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 '남은 자'를 정제해 내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양들의 이름을 부르고 앞서 가시는 '선한 목자'로 묘사되며, 히브리어 '파라츠'는 죽음의 문을 깨뜨리신 주님의 승리를 예표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막힌 담을 허물고 앞서 걸어가시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로 성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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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사방이 막혀 성문 안에 갇힌 듯한 절망을 느끼고 있습니까?. '길을 여시는 분'이 우리 선두에 계심을 믿고, 내 힘으로 벽을 뚫으려 애쓰기보다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은 '저는 자'와 '쫓겨난 자'들을 품는 안전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각자도생의 차가운 세상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서로를 돌보며 평화의 행진을 이어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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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의 모든 생각과 계획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살피시는 여호와 하나님,
오늘 미가 선지자의 외침을 통해
우리 안에 도사린 탐욕과 위선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침상에 누워 주님의 영광을 구하기보다
나의 안락과 이익만을 궁리했던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말씀의 날카로운 책망을 나를 향한 사랑의 손길로 받지 못하고,
오히려 듣기 좋은 거짓 위로만을 찾아 헤맸던
우리의 완악함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제는 우리가 세상의 힘이 아닌
주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인생의 막힌 성문을 친히 깨뜨리고
앞서 행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보며,
흩어진 마음을 모아 주님의 뒤를 따르는
신실한 남은 자가 되게 하소서.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건져 빛의 나라로 옮겨 주신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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