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9:13-24 창조주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창조와 공의로운 통치를 향한 영원한 길의 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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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머니의 모태에서 내장(內臟)을 지으시며 조직하신 창조주이심을 고백하고, 자신의 존재가 신묘막측하게 지어졌다고 찬양합니다. 그는 자신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에 정한 날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었음을 깨닫고, 주의 생각이 얼마나 보배롭고 광대하신지 경탄합니다. 이어서 시인은 하나님의 원수들을 향한 공의로운 심판을 간구하며 그들로부터 단호한 분리를 선언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을 살피시고 마음을 시험하셔서 혹시 자신 안에 있는 악한 행위(고통스러운 길)가 있는지 보시고 자신을 영원한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하며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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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정경적 배경 : 시편 139편은 다윗의 시로 표기되며, 시편 제5권(107-150편)에 속하는 찬양시입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에 대한 가장 심오한 사색을 담고 있으며, 다윗이 인생의 말년에 자신의 삶의 여정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속성을 찬양하며 지은 것으로 이해됩니다. 본문은 시편 139편의 후반부로서, 앞선 1-12절(전지와 편재)의 교리적 진리를 창조적 섭리와 윤리적 적용으로 연결합니다.
신학적 배경 : 본문은 하나님의 전능성과 창조자적 섭리를 개인의 삶에 적용합니다.
창조와 예정 (13-18절) : 인간의 창조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세밀한 행위이며, 개인의 모든 날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의 계획과 무한한 사랑 안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공의와 심판 (19-22절) : 개인적 원한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는 악(불의)에 대한 의분(義憤)을 표현하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간구합니다.
윤리적 순종 (23-24절) : 앞서 다룬 전지하심(1-6절)의 속성이 개인의 도덕적 삶을 감찰하고 영원한 길로 인도하시는 목적으로 귀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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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8절 하나님은 모태에서 인생을 빚으시고 그 모든 날을 섭리하시는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존재까지도 세밀하게 계획하고 조성하신 경이로운 창조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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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주께서 자신의 내장(장부)을 지으셨고, 모태에서 자신을 조직(엮어 짜다)하셨으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신의 존재가 심히 기묘(경이로움)함을 찬양합니다. 자신이 은밀한 데와 땅의 깊은 곳(모태)에서 형성될 때에도, 자신의 형체는 주님 앞에 숨겨지지 않았습니다.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자신을 위해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습니다. 시인은 주의 생각이 얼마나 보배롭고 그 수가 모래보다 많다고 감탄하며, 깨어날 때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다고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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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6절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시인의 개인적인 생명에 미쳤음을 보여주는 찬양의 절정입니다. '내장'(콩팥, 킬르야)은 인간의 감정과 양심(내면)을 상징하는 기관으로, 하나님께서 시인의 가장 은밀한 생각까지도 알고 계심을 나타냅니다. 모태에서 '조직'(만들다)하셨다는 것은 토기장이가 흙으로 빚거나 여인이 실로 베를 짜듯이 섬세하고 정교하게 만드신 창조 행위를 비유하며, 인간이 하나님의 완전한 피조물임을 강조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창조가 '심히 기묘(奇妙)함'(노라오트, 니플레오트)에 대한 감사(14절)로 응답합니다. 15절의 '은밀한 데'와 '땅의 깊은 곳'은 어머니의 자궁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모든 것을 감추거나 숨길 수 없는 벌거벗은 존재로 보셨습니다. 16절은 예정의 개념을 다루지만, 이것이 인간의 의지를 속박하는 기계적인 예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하여 우리의 모든 삶의 선택과 사건을 미리 알고 계시는 전지성임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정한 날'이 주의 책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가운데 있으며, 그 계획이 '보배롭고'(야카르, 측량하기 어렵거나 존귀함) 그 수가 모래보다 많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광대함과 무한한 사랑을 증거합니다.
이 단락은 모든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근거를 제시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세밀한 창조적 개입과 영원한 계획 아래 놓여 있으므로, 인간의 삶은 가장 존귀한 가치를 지닙니다. 이는 신약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을 지탱하시고 유지하신다고 선포한 것(골 1:17)과 일치하며, 모든 피조물은 그 존재 목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이나 약점 모두 하나님의 창조 의도 안에 있으며, 자신의 본성적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롭고 선한 생각에 따라 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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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이 우연의 산물이 아닌 창조주의 경이로운 걸작임을 깨달을 때, 자존감과 소명 의식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약점이나 미숙한 부분이 있을지라도, 이는 하나님 계획의 일부이며, 교만함 대신 겸손과 감사로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음을 인정하고, 그들의 잠재력과 가치를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보며 양육해야 합니다.
이 본문은 낙태와 같은 생명 경시 풍조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제공합니다. 인간의 생명이 모태의 가장 은밀한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아래 정교하게 조직되었으므로, 생명을 임의로 처분하려는 모든 행위는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생명이 유한한 시간에 국한되지 않고 영원한 계획 안에 있음을 선포함으로써, 세상적인 성공이나 권력을 인생의 궁극적인 가치로 두는 허무한 가치관에 대항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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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절 하나님의 원수들과 그들의 행위에 대한 단호한 분리를 선언하다
하나님은 그분의 거룩한 영광을 수호하시기 위해 악을 미워하시고 대적하시는 공의의 심판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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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인은 하나님께서 악인을 반드시 죽이시리라고 확신하며,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에게 자신을 떠날지어다라고 단호히 명합니다. 그들이 악한 생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악하게 말하고, 주의 원수들이 헛되이 주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주를 미워하며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며, 그들을 심히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나의 원수이기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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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절은 시편 139편 전체의 찬양에 이은 탄원적 요소를 포함하며, 시인이 윤리적인 적용의 문제로 옮겨갔음을 보여줍니다. '정녕히... 죽이시리이다'는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에 대한 확신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악인'은 단순히 개인적 대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하고 대적하는 자들, 곧 하나님의 원수들을 지칭합니다. 시인의 '심히 미워함'(타클리트 시느아 세네팀)은 '미움의 끝'을 의미하는 가장 강렬한 증오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증오는 개인적 감정 폭발이나 복수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토라)이 멸시당하고 거룩한 이름이 모독당하는 것에 대한 거룩한 열정이자 의분(義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 편에 서 있으며, 죄악된 세력과 단절하고 분리되는 것이 경건한 삶의 필수임을 선언합니다. 특히 악인들이 '주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20절)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거나 망령되이 일컫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그들의 악한 생각과 계획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반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신뢰를 통해, 악인들의 멸망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증거이자 의인의 승리를 위한 필연적인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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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세속적인 유혹이나 불의한 타협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할 때, 단호한 거절(나를 떠날지어다)의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는 의분은 필요하지만, 이 분노가 개인적 복수심이나 파괴적 감정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모든 심판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맡기는 성숙함이 요구됩니다. 가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지 않고 방자하게 행동하는 불신앙의 태도와 행실에 대해 경계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임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이 정당화하는 조직적인 악(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 강포, 압제)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행위임을 인식하고, 이에 대해 거룩한 분노를 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분노의 표현은 사랑과 회개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쟁은 칼이 아닌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불의를 목도할 때, 스스로 심판자가 되려 하기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순전한 신앙의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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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4절 완벽한 자기 성찰과 영원한 길로의 인도를 간절히 간구하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죄에 넘어지지 않도록 마음의 깊은 곳까지 살피시어 인도하시는 온전한 안내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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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하나님께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무슨 악한 행위'(고통스러운 길)가 있는지 보시고 자신을 영원한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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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지막 간구는 시편 139편의 주제적 결론을 형성하며, 1절에서 사용된 '살피시고'(하카르), '아시나이다'(야다)와 같은 하나님의 전지성을 나타내는 동사들이 명령형으로 반복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지식을 시인을 윤리적으로 심판하고 인도하는 데 사용해 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요청입니다. '시험하사'(바한)라는 동사는 금을 단련하듯 믿음의 순전함을 입증하는 과정을 의미하며, 시인은 자신의 마음(내면, 레바브)과 생각/뜻(사르아파이)까지도 하나님의 완전한 통찰 앞에 내어놓습니다. 24절의 '악한 행위'(데레크 오체브)는 '고통과 슬픔에 이르는 길'을 뜻하며, 시인은 이러한 파멸의 길 대신 '영원한 길'(데레크 올람)로 인도받기를 원합니다. '영원한 길'은 곧 하나님과 동행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생명의 길을 의미하며, 이는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성화된 삶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이 기도는 인간의 연약함을 직시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자만하지 않는 겸손한 자세에서 비롯됩니다.
이 간구는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삶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요약됩니다. 죄의 심판이 인간의 모든 허물을 드러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의 흠 없는 의로움(칭의)이 됩니다. 성도는 자신의 죄악된 본성(내면)이 악의 설계도로 가득 찰 위험이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감찰을 통해 마음을 지키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인도받아야 합니다. 성화의 길은 우리 스스로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에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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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기적인 '자기 성찰'(마음 살핌)의 시간을 통해 내면의 숨겨진 허물과 탐욕(허탄한 것에 대한 집착)을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특히 공의의 심판을 두려워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태도로 살아가야 하며, 악한 생각과 행동을 즉각적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말씀에 기초하여 가족 각자의 길이 영원한 길인지 점검하고, 성령의 조명으로 말씀의 뜻을 '깨달아 알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교회는 거룩함을 잃고 세상의 가치와 혼합된 삶을 살아가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을 경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시대의 조류(허탄한 것, 탐욕)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지도층의 악행이나 불의한 재판(율례를 빙자하고 잔해 도모, 특히 법을 아는 자들의 법치를 빙자한 법정신을 무시하고 행악하면서도 뻔뻔한 오늘의 법조계계)을 무시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서도록 기도와 말씀으로 사회를 향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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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전지(全知)와 전능(全能)의 아버지 하나님,
저희가 저희의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도
당신의 기이한 솜씨로 모태에서 조직하시고,
영원한 계획 가운데 정한 날을 기록하신
당신의 크신 은혜를 찬양합니다.
이 모든 것이 저희의 교만한 마음을 낮추시고
저희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당신의 보배로운 생각임을 고백합니다.
저희가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과
주의 법도를 잊어버린 악인들의 거짓된 길을 미워하며,
그들의 악한 행위와 탐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거룩한 분리의 결단을 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죄의 유혹과 세상의 멸시와 비방 속에서
저희의 발걸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고,
저희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오직 주의 말씀만이 저희의 참된 즐거움이요 소망이 되게 하사,
저희가 주의 은혜 가운데
주의 증거를 사랑하고 지키는 참된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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