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9:1-12 나를 떠나지 않는 그 집요한 사랑
우리가 숨고 싶은 삶의 가장 어두운 자리까지도 이미 와 계시는 하나님의 시선은, 우리를 감시하는 눈초리가 아니라 존재의 밑바닥을 떠받치는 사랑의 손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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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옷깃을 여밉니다. 하물며 나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내면의 깊은 생각과 혀끝에 맴도는 말까지 다 아는 존재가 있다면 어떨까요? 두려움일 것입니다. 영국의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은 죄수들을 효과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판옵티콘(Panopticon)’이라는 원형 감옥을 고안했습니다. 중앙의 감시탑에서 모든 죄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볼 수 있는 구조입니다. 시선을 권력으로, 봄(seeing)을 통제로 이해한 까닭입니다.
오늘 시편 139편의 시인은 고백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1절) 언뜻 보면 이 고백은 ‘하나님이라는 거대한 감시자’ 앞에 발가벗겨진 인간의 공포처럼 들립니다. 내가 앉고 서는 것, 나의 길과 눕는 것, 심지어 내 혀의 말까지 다 아신다니, 숨 쉴 틈조차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도망치려 합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7절).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으로, 혹은 땅 깊은 곳 스올(Sheol)로 숨어들려 합니다.
그러나 이 시의 반전은 바로 여기서 일어납니다. 시인이 깨달은 하나님의 시선은 ‘감시’가 아니라 ‘동행’이었습니다. 우리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여기가 지옥(스올)이다”라고 비명을 지르는 그 절망의 밑바닥, 아무도 내 곁에 없다고 느끼는 고독의 심연, 바로 그곳에 주님은 이미 와 계십니다.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10절).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때로 우리는 신앙생활조차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번듯한 모습을 보여드려야 한다는 강박 때문입니다. 나의 초라함, 나의 의심, 나의 실패를 감추고 싶어 우리는 어둠 속으로 숨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말합니다. “주님에게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며, 밤도 대낮처럼 훤합니다.”(12절)
우리가 어둠이라 부르는 것들이 하나님께는 장애물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함’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십니다. 내가 나에게 실망하여 고개를 떨구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기대를 거두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아심(knowing)’은 차가운 지적 동의가 아니라, 아픈 자식을 품에 안은 어미의 심정처럼 뼛속 깊은 ‘공감’입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숨으십시오. 억지로 괜찮은 척 꾸미지 않아도 됩니다.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사랑한다는 것은 ‘당신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해주는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새벽 날개를 치며 도망친 그 바다 끝에서도, 주님의 손은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그 집요한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 복잡한 내면의 실타래를 그저 내어드리십시오. 나의 비루함까지도 껴안으시는 그분의 넉넉한 품이, 흔들리는 우리 삶의 유일한 피난처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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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9:1-12 영혼의 깊은 밤, 하나님의 헤세드에 눈뜨다
우리가 어디로 도망치든 (시 139:7) 우리를 샅샅이 아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긍휼(헤세드) 은, 연약하고 모호한 인간 실존을 향한 경이로운 창조 선언이자 변치 않는 부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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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9편의 기자는 섬뜩할 정도로 정직한 고백을 토해냅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피시고, 나를 아십니다"(시 139:1). 이 인식은 단순한 지적 깨달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우리의 생각을 멀리서도 꿰뚫어 보시고(시 139:2), 우리의 모든 행위를 면밀히 살피십니다(시 139:3). 이 지극한 앎 앞에서, 인간은 숨을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속의 파도에 휩쓸려 허청거리며, 자기만의 욕망과 고집의 길을 걷는다 해도, 우리는 결국 길 잃고 방황하는 존재(놋 땅의 주민)일 뿐입니다.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이여, 때로 우리는 스스로의 나약함과 죄책감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합니다.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하여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시 139:7) 이 질문은 절망의 심연에서 터져 나옵니다.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든, 죽음의 세계인 스올에 자리를 펴든, "거기에도 주님은 계십니다"(시 139:8).
그러나 이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현존은 우리를 심판하기 위한 감시의 시선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버림받지 않겠다는 사랑의 확약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과 슬픔, 모순된 감정의 뒤엉킨 실타래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손길은 "동녘 너머" (세상의 가장 먼 곳)와 "바다 끝 서쪽" (죽음의 경계)까지 미치며, 그곳에서조차 우리를 인도하시고 붙들어 주십니다(시 139:9-10). 우리가 죄의 유혹에 넘어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임을 아시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 때문에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분의 은혜(긍휼)가 흘러 들어오는 통로가 되게 하십니다.
이 놀라운 섭리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경탄(驚歎) 뿐입니다. 시인은 우리의 존재를 향해 "내가 이렇게 빚어진 것이 오묘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놀라워, 이 모든 일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시 139:14)라고 찬양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없지 않고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주의 기적이며 하늘의 선물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세상의 흐름에 길들여져 끊임없이 다른 이를 복사하며 살아가려는 유혹에 빠지지만, 하나님의 오묘하신 창조는 우리 각자가 유일무이한 존재(원본) 임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힘을 길러 완벽해지기를 기다리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도 당신의 변치 않는 사랑(헤세드) 을 쏟아 부으시는 분입니다. 이 사랑의 품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움이나 자기 증명의 강박에 시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광대한 은총에 감사로 응답하는 정직하고 경이로운 순례가 될 뿐입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등불을 켠 후 뒤돌아보면, 빛이 있는 곳 어디든 이미 그분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걷는 모든 길의 빛이요,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십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