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12:27-47 울음 끝에 찾아온 노래, 그 거룩한 파동
참된 기쁨은 성취의 트로피가 아니라, 비루한 삶의 폐허 속에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할 때 터져 나오는 영혼의 전율입니다.
*
주님의 평화가 광양사랑의교회 교우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그리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인생의 숙제들을 안고 고뇌하는 모든 길벗들의 가슴에 깊이 스며들기를 빕니다.
겨울의 한복판입니다. 세상은 화려한 연말의 불빛으로 반짝이지만, 정작 우리의 내면은 시린 바람이 드나드는 창문처럼 덜컹거릴 때가 많습니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위해 보지만, 문득문득 찾아오는 공허함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느헤미야 12장의 풍경은 바로 그 공허의 틈을 메우는, 아주 낯설고도 경이로운 ‘소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완공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토목 공사의 종료가 아니었습니다. 산적한 방해와 내부의 분열, 그리고 조롱을 견뎌낸 눈물겨운 인내의 결실이었습니다. 드디어 봉헌식 날,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성벽 위로 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두 무리로 나누어 행진하게 합니다. 한 무리는 에스라가 이끌고, 다른 한 무리는 느헤미야가 뒤따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무너졌던 돌무더기가 단단한 성벽이 되었습니다. 그 위를 걷는 사람들의 감회가 어떠했겠습니까? 그들은 성벽 위를 걸으며 발밑의 견고함을 느꼈을 것이고, 성벽 너머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위협도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행진은 두려움을 확인하는 정찰이 아니라, 이 땅이 하나님의 것임을 선포하는 ‘거룩한 걷기’였습니다.
니체는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의 내면은 오랫동안 패배감과 절망이라는 혼돈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벽 봉헌식 날, 그 혼돈은 ‘즐거움’이라는 별이 되어 타올랐습니다. 본문 43절은 이 장면의 핵심을 이렇게 전합니다.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으므로.”
주목해야 할 것은 주어입니다. 그들이 즐거워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즐거워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기쁨은 조건적입니다. 성적이 오르거나, 사업이 잘되거나, 건강해질 때 웃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쁨은 상황이 바뀌면 금세 증발해 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상황을 관통합니다. 폐허 위에서도 노래하게 하고, 눈물 자국이 마르기도 전에 춤추게 합니다.
그날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 소리는 단순한 환호성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망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셨다”라는 영혼의 외침이자, 죽음과 절망의 세력을 향한 거룩한 시위였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사랑한다는 것은 ‘당신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날의 기쁨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죽지 않는다, 내가 너희를 붙들고 있다”라고 사랑을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생활이 의무감으로 다가와 지치신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더 많이 헌신하라”고 채찍질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너희 삶에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성벽 봉헌식에 앞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몸을 정결하게 했습니다. 정결함이란 무엇입니까? 도덕적 완벽함이 아닙니다. 내 안에 덕지덕지 붙은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털어내고, 하나님이 주실 은혜를 담을 빈 그릇을 준비하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공사 중인 성벽과 같습니다. 때로는 무너지고, 때로는 금이 갑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완성된 자들만이 아니라, 공사판의 먼지를 뒤집어쓴 채 울고 있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기어이 노래하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우리의 일상이 의무를 넘어선 축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에서 터져 나오는 은근한 기쁨의 파동이 이 삭막한 세상에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신호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
느헤미야 12:27-47 기쁨의 강물, 폐허를 넘어 흐르다
무너진 성벽의 폐허 위에서 터져 나온 예루살렘의 큰 기쁨(느 12:43)은, 연약한 인간의 행위를 뛰어넘어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헤세드) 에 대한 전심의 응답 이자 영원의 선물 이다.
*
느헤미야 12장 27절 이하의 본문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고단한 노작(勞作) 끝에 펼쳐진 장엄한 기쁨의 드라마를 담고 있습니다. 성벽은 단순히 외세의 침입을 막는 물리적 구조물을 넘어, 공동체의 존재 자체를 다시 세우는 일이었으며, 그들의 영적·도덕적 타락의 역사를 읽어내는 거울과도 같았습니다. 이 서사에서 특히 우리의 마음을 붙잡는 것은, 그 모든 수고를 마치고 난 후 터져 나온 백성들의 "큰 기쁨" 입니다(12:43).
이 기쁨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을 과시하여 쟁취한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명료하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으므로"(느 12:43). 참된 기쁨은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자기 강화의 욕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 곧 헤세드(인애와 긍휼) 가 우리 연약함 속에 유입될 때 피어나는 꽃입니다.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이여, 혹은 자기의 부족함 앞에서 쉽게 좌절하는 이들이여,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때로 우리의 힘과 의지로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 길을 잃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분산되기 쉽고, 소명(vocation), 즉 들어야 할 내면의 목소리를 잃고 세상의 소음에 반응하느라 공허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멍에에 익숙하지 않은 송아지 같을지라도 우리의 고통과 아픔 속에 화육(化育)하시며, 우리 때문에 함께 웃고 우시는 정념(pathos) 을 지니신 분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은 그분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그 은혜가 흘러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성벽 봉헌식 이후의 백성들의 태도는 이 은혜에 대한 가장 진실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위해 넘치도록 바쳤습니다(12:44, 47). 이 헌물은 의무감이나 율법적 강요가 아니라, 회복된 관계 속에서 터져 나온 자발적이고 폭발적인 감사와 축제 였습니다. 마치 초대교회 성도들이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던 것처럼, 참된 신앙은 세상에 매력을 감염시키고,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달아 절제와 나눔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끊임없이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는 성벽과 같습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때로는 가시밭길 같고, 우리의 눈에 세상이 무정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우리 손바닥에 새기시고 우리를 굳게 붙들어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완벽한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당신의 변치 않는 사랑 에 마음을 열고, 그 사랑을 힘입어 옳고 바르게 삶의 걸음을 지속하는 용기입니다. 우리 모두 이 은총의 힘으로 절망의 시간을 넘어 희망을 잉태하는 이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