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10:1-39 아름다운 구속, 다시 시작할 용기
언약은 우리의 완벽함이 아니라, 비루한 일상 속에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에 접속하기 위한 가장 구체적인 몸부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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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교우 여러분, 그리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신앙의 자리가 때로는 버겁게 느껴지는 모든 길벗들에게 평화를 빕니다.
바람이 차갑습니다. 계절이 바뀌면 옷깃을 여미듯, 우리의 마음도 시린 세상의 풍파 앞에서 자주 여며지곤 합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입니다. 은혜의 감격은 아침 안개처럼 쉬이 사라지고, 현실의 고단함은 바위처럼 우리 가슴을 짓누릅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느헤미야 10장의 장면은 바로 그 망각의 비탈길에서 멈춰 서서, 다시금 하늘을 우러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봉(印封)’했다고 기록합니다. 도장을 찍어 확정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땔감과 맏물, 십일조를 드리기로 구체적인 목록을 작성합니다. 얼핏 보면 이것은 지켜야 할 의무의 목록, 혹은 종교적 규율의 나열처럼 보입니다.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분들에게는 이 장면이 또다시 무거운 짐을 지우는 청구서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 목록의 이면을 들여다봅시다. 지금 서명을 하는 이들은 영웅이 아닙니다. 그들은 포로 생활의 굴욕을 겪었고, 무너진 성벽을 보며 절망했던, 상처 입은 생존자들입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율법의 조항들로 묶어두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두면 저절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죄의 중력’을 뼈저리게 알기에, 그들은 스스로를 ‘거룩한 구속’ 안에 가두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오디세우스가 사이렌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돛대 기둥에 묶었듯, 느헤미야 시대의 백성들은 구체적인 헌신과 규례라는 끈으로 자신들을 하나님께 묶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것은 ‘무엇을 바쳐야 하는가’라는 의무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하나님 곁에 머물고 싶어 하는’ 인간의 간절한 몸부림과, 그런 우리를 외면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져오는 나무 한 단, 곡식 한 줌이 부족하여 달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온 우주가 그분의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그 작은 정성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왜냐하면 그 행위 속에 “나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요구는 우리를 옭아매는 족쇄가 아니라, 자꾸만 비틀거리는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거룩한 난간’입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한없이 약하지만, 우주를 품을 수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강철 같은 존재가 되어 완벽한 도덕을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갈대처럼 흔들리지만, 꺾이지 않고 끝내 하늘을 향해 다시 고개를 드는 과정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완벽해지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기억하라”고 속삭입니다. 땔감을 나르고 맏물을 드리는 그 반복적인 일상을 통해, 내 생명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한 서약을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당신의 옷자락을 붙드는 그 손길을 기다리십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때로는 신앙이 버겁고, 교회라는 제도가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나의 연약함 때문에 좌절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맺는 언약은 내가 하나님을 붙드는 약속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절대 놓지 않으시겠다는 ‘사랑의 이중 안전장치’입니다.
우리의 작은 헌신, 예배의 자리를 지키려는 노력, 이웃을 향해 내미는 투박한 손길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연애편지입니다. 비록 맞춤법이 틀리고 문장이 서툴러도, 하나님은 그 중심을 읽으시고 우리를 안아주십니다. 부디 이 계절, 율법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우리를 얽어매는 세상의 헛된 욕망 대신 하나님의 자비하신 품에 스스로를 기쁘게 묶어두는 은총을 누리시길 빕니다. 은혜는 결심한 대로 살지 못한 자들의 탄식 속에 더 깊이 스며듭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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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10:1-39 성실한 삶이라는 서약 : 펜 끝에 담긴 은총의 약속
죄의 고백 끝에 서명된 언약은, 우리의 힘이 아닌 일상의 성실성을 통해 그분의 백성을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향한 소박한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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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사랑의교회 교우 여러분, 주님의 깊은 평안을 기원합니다.
느헤미야 10장에 이르러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엄한 집회의 정점에 다다릅니다. 율법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죄와 역사의 완악함을 처절하게 깨달은 후에(느 9장 참고), 그들은 이제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공표합니다. 그 방식은 바로 언약 문서에 공식적으로 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시드기야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문서에 인봉하고, 이어 레위 사람,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이 줄줄이 이름을 올렸습니다(10:1-27). 이 서명자들의 명단은 단지 이름을 나열한 목록이 아니라, 과거의 실패를 딛고 새로운 삶의 길을 선택하겠다는 한 공동체의 엄숙한 결단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공적인 서명을 보며 '이제부터 제대로 살아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 언약을 체결한 궁극적인 동기는, 그들 자신의 의지가 강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인애(헤세드) 덕분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자신들이 거듭하여 반역하고 돌아설 때에도(느 9:16-17 참고), 하나님께서는 크신 긍휼을 따라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음을 고백했습니다. 이 서약은,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존재적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서약의 내용은 놀랍도록 현실적이고 소박합니다. 그들은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하고(10:30), 안식일에는 장사하지 않고(10:31), 성전 봉사를 위해 해마다 일정액을 내고, 십일조와 헌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10:32-39). 이처럼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실천들 속에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유지하겠다는 결의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경쟁과 효율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영혼의 심지가 깊이 박힌 사람이 되기 어렵습니다. 많은 이들이 신앙을 특별하고 짜릿한 체험이나, 세상의 성공을 위한 도구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거룩한 삶은, 화려한 종교적 퍼포먼스가 아니라, 바로 일상적으로 늘 하는 일들을 마음을 담아 제대로 해내는 것에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겠다는 약속은, 끊임없이 우리를 몰아붙이는 돈(맘몬)의 지배와 세상의 가속화된 시간으로부터 잠시 멈추어 서서, 삶의 근본을 성찰하겠다는 용기 있는 결단입니다.
우리가 바쳐야 할 십일조와 헌물 역시, 하나님께 ‘거래’를 거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로움을 인정하고, 공동체와 성전을 유지함으로써 하나님의 꿈이 세상에서 구현되도록 돕는 사랑의 노동입니다. 우리가 약해지고 넘어질지라도, 하나님은 이처럼 소박한 일상의 성실성을 통해 우리를 붙들어 세우시고, 우리 삶을 당신의 아름다운 이야기(포이에마)로 빚어 가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며, 삶을 비틀거리고 방황하게 만드는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내려놓고, 이웃과 더불어 생명의 보람을 찾을 때 진정한 힘을 얻습니다. 느헤미야의 서약은, 우리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신뢰하며, 매일의 삶이라는 순례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라는 초청입니다. 우리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뒷사람의 길이 된다는 마음으로, 그분의 은총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