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8:1-18 눈물 비친 얼굴로 기쁨의 밥을 먹다

by 평화의길벗 posted Nov 2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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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8:1-18 눈물 비친 얼굴로 기쁨의 밥을 먹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비참함 속에 가두는 심판의 선언이 아니라, 눈물을 닦아주며 삶을 지탱할 힘을 건네는 기쁨의 초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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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이 완연합니다. 들판의 곡식들이 고개를 숙이고, 서늘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계절입니다.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도 우리네 삶은 여전히 고단합니다. 먹고사는 일의 분주함, 관계에서 오는 피로, 그리고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때로 우리를 잠식합니다.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느라 손바닥이 갈라지고 어깨가 짓눌렸던 느헤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도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벽은 쌓았으되, 마음은 허물어져 있던 그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율법책을 펴들었을 때, 그들은 일제히 일어섰습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이어진 낭독, 그 말씀이 귓가에 닿자 백성들은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울음은 단순한 후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거울 앞에서 자신의 ‘비루한 민낯’을 마주한 자의 통곡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버린 자신의 삶에 대한 자각, 그리고 사무치는 그리움이 눈물이 되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던져진 존재’라 했지만, 말씀 앞에 선 그들은 자신이 ‘길 잃은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을 ‘무거운 짐’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더 열심히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율법의 조항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이 신앙의 본질인 양 착각합니다. 말씀이 거울이 되어 우리의 허물을 비출 때, 우리는 그 앞에서 작아지고 위축됩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는 발걸음이 때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무거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울고 있는 백성들을 향해 뜻밖의 말을 건넸습니다.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그리고 덧붙입니다.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이것은 놀라운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책감의 감옥에 갇혀 웅크리고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진정한 거룩함(Holy)은 우울함이 아니라, 생명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물 흘리는 자들에게 ‘더 울어라’ 하지 않으시고, ‘밥을 먹으라’ 하십니다. 그것도 살진 것과 단 것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식탁으로의 초대입니다. 시인 정호승은 “밥은 먹었느냐”라는 말이 사랑의 인사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상한 영혼들에게 밥을 먹이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십니다.

신앙은 나의 부족함을 쥐어짜는 고통의 시간이 아니라,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환대(hospitality)를 경험하는 축제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는 말은, 내가 무엇을 이루어내서 기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라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를 살게 하는 동력이 된다는 뜻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교우 여러분, 혹시 신앙생활이 버겁게 느껴지십니까? 내 삶의 무게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조차 희미하게 느껴지십니까? 기억하십시오. 말씀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우리 눈물을 닦아주고 배고픈 영혼을 채우기 위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벽한 도덕’을 요구하기 전에 ‘기쁨의 축제’를 먼저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 초대에 응하는 것입니다. 눈물 젖은 얼굴을 들어 하나님이 차려주신 은혜의 밥을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잉여를 아직 준비하지 못한 이웃, 삶의 그늘진 곳에 있는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 나눔 속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비애와 우울을 넘어, 하나님이 주시는 벅찬 기쁨이 여러분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기를 빕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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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8:1-18 율법이 터진 자리에서 피어난 기쁨

율법의 말씀을 듣고 죄를 깨달아 흘린 눈물은, 우리의 완벽함이 아니라 오직 나누고 기뻐할 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와 사랑을 깨닫는 거룩한 경탄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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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사랑의교회 교우 여러분, 주님의 깊은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성벽을 재건하는 고된 노동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무언가 결핍되어 있음을, 무너진 성벽보다 더 근원적인 무엇인가가 상실되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학자 겸 제사장인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율법책을 읽어 달라고 간곡히 청했습니다. 마치 굶주린 영혼이 양식을 구하듯, 이 거룩한 집회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은 모두" 함께한,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모임이었습니다.

성경은 에스라가 새벽부터 정오까지 율법책을 낭독했고, 백성들은 그 책에 귀를 기울였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은 그들의 반응은 놀랍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왜 울었을까요? 말씀의 거울 앞에 서자, 그동안 세속의 욕망에 길들여져 자신의 삶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멀어져 있었는지를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늘 누군가와 접속하며 성찰의 시간을 견딜 수 없어하던 우리의 모습처럼, 그들도 역사의 고난 속에서 자기중심성과 허영투성이에 빠져 있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우리를 읽어내기 시작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눈물은 회복의 첫 단추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언자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던진 메시지는 우리의 예상과 다릅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울지 말라, 슬퍼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대신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며, 준비하지 못한 이들에게 먹을 몫을 나누어 주십시오"라고 명령합니다. 이 놀라운 선언 뒤에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 신앙의 심지에 불을 붙입니다. “주님 앞에서 기뻐하면 힘이 생기는 법이니, 슬퍼하지들 마십시오".

우리는 흔히 우리의 힘과 구원이 우리의 윤리적인 성실성이나 엄격한 금식 혹은 경건한 행위에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하는 순간에도, 다시금 "이 힘든 삶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이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우리의 힘은 우리가 쥐고 있는 완고한 자아(自我)나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혜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으로 이 세상에 왔듯이, 그분을 찬탄하고 기뻐하며, 그 기쁨을 이웃과 나누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경배입니다.

느헤미야의 축제는 고독하고 단자화된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공동체적 환희, 곧 ‘더불어 웃고 우는 삶’을 회복하라는 초청입니다. 이 기쁨은 자기 혼자만 누리는 배타적인 안일이 아니라, "아무것도 차리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먹을 몫을 보내 주십시다"라는 나눔의 정신을 통해 완성됩니다. 이 축제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곧 사회적 약자를 향한 자비와 연민으로 이어져야 함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삶의 곤경 속에서 넘어지고, 신앙에 회의가 들 때가 많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억눌린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베푸신 선물인 삶의 자리에서 기뻐하며, 그분의 은총을 확신하는 가운데 뚜벅뚜벅 우리 앞의 생을 향해 걸어갈 수 있습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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