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5:1-9 성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 은혜의 미학, 자기 비움
우리를 짓누르는 탐욕의 쇠사슬을 끊어내는 것은 율법의 명령이 아닌, 스스로 특권을 버린 지도자의 삶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자기 비움(Kenosis)이라는 은혜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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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성벽이 다시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무너진 벽돌이 재건되는 그 땀과 흙먼지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마침내 황폐한 역사에 희망의 문패를 달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들려주는 느헤미야 5장의 이야기는 이 거대한 재건의 열기 뒤에 감춰진 섬뜩한 진실을 폭로합니다. 외적인 경건과 성취의 서사 이면에는, 형제들의 울부짖음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벽돌을 쌓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던 가난한 백성들은 기근과 세금, 그리고 빚의 굴레 속에서 자신의 밭과 포도원, 심지어 자녀들까지 담보로 팔아야 했습니다(느 5:3-5).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이들이 다시금 ‘형제애’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탐욕의 쇠사슬에 묶여 버린 것입니다. 율법은 분명 이웃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 했건만(레 25:36-37), 공동체 내부의 가진 자들은 '생존'이라는 명분 아래 법을 교묘히 비틀어 가난한 자들을 착취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고통은 '한 시대의 온도계'와 같습니다. 재건 중이던 유다 공동체는 이미 내부로부터 곪아 터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벽은 높이 쌓였을지 몰라도, 공동체의 영혼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총독 느헤미야는 '다른 논리', 곧 하나님의 논리를 역사의 무대 위에 세웁니다. 그는 지도자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총독의 녹과 식사 비용)을 단호히 거부합니다(느 5:14-15). 그의 선임자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며 호사스러운 식탁을 차렸지만, 느헤미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 결단은 단지 윤리적인 의무나 도덕적인 모범을 넘어선 은혜의 행위였습니다.
그의 자기 비움, 곧 케노시스(Kenosis)의 동기는 명료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느 5:15).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Justice)와 긍휼(Compassion)의 가치를 삶으로 옮겨내는 깊은 경외를 의미합니다. 탐욕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낮아지는 그의 행위는 짓눌린 백성들에게 구약의 희년(Jubilee) 사상이 현실로 구현되는 감동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기 전에, 스스로 '나에게 주어진 특권을 내려놓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어쩌면 우리 신앙의 회의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얼마나 더 해야 하는가'라는 무거운 의무감에서 비롯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 이야기는 우리에게 해야 할 일(Duty)보다 이미 베풀어진 은혜(Grace)가 더 크고 강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고, 회복시키고, 궁핍함에서 일으키는 것은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스스로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우리의 고통 한가운데에 서신 하나님의 자기 비움이라는 사랑의 미학입니다.
신앙은 이 놀라운 은혜에 감격하여, 우리 안에 있는 탐욕의 '자아'를 기꺼이 비우고, 느헤미야처럼 낮은 자리에서 이웃의 고통에 응답하는 삶의 번역을 시작할 때 비로소 진정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성벽을 쌓는 일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특권을 거부하는 사랑, 자기 비움을 통해 이웃의 생명을 회복하는 정의가 우리의 심장과 공동체 안에 견고히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시대를 밝히는 진정한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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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5:1-9 내부의 성벽, 공존의 윤리를 묻다
외적인 성벽 재건의 환호 뒤에 숨겨진 내부의 착취와 신음 소리는, 물질의 지배를 거부하고 연약한 이들과의 공존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은혜에 대한 공동체의 가장 근원적인 배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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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통의 파열음, 성벽 안의 전쟁
느헤미야서 4장에서 우리는 외부의 조롱과 위협에 맞서 한 손에는 연장을, 다른 한 손에는 무기를 들었던 공동체의 끈질긴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벽이 절반쯤 완성되었을 때, 이스라엘 공동체 내부에서 더 심각하고 참혹한 균열이 터져 나옵니다(1절). 가난한 백성들이 기근과 빚 때문에 자녀들을 종으로 팔아 넘기고, 땅과 포도원을 고관들에게 저당 잡히는, 곧 형제들 간의 폭력적인 착취가 만연하고 있었습니다(3-5절).
이 고통의 파열음은, 단지 경제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공동체의 영혼이 썩어 문드러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참담한 징표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와 하나님의 언약을 회복하고자 했던 이들이, 이제 와서는 돈과 탐욕이라는 또 다른 '우상' 앞에 스스로 무릎을 꿇고 있는 형국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 포획되어 돈과 욕망이 삶의 유일한 가치가 되는 순간, 이웃은 고단한 인생길의 동반자가 아니라 경쟁 상대가 되고, 이해관계가 무너지는 순간 관계는 속절없이 해체됩니다.
성벽을 높이 쌓아 올리는 물리적인 노동은 경건해 보일지 몰라도, 그 성벽 아래에서 형제의 피와 눈물을 착취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예레미야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멸망을 선언하신 이유가 폭력과 탈취가 일상이었기 때문이듯, 느헤미야 시대의 내부적 부패는 토라의 핵심 원리인 가난한 이들을 향한 우선적 관심이 실종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당을 짓는다 해도, 그 주변에 주거지 없는 가족이 단 한 가족도 없다는 사실에 교회의 아름다움이 달려 있다는 통찰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 분노와 회복, 길을 여시는 은혜
느헤미야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합니다(6절). 그의 분노는 단순한 개인적인 감정 폭발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훼손된 현실에 대한 예언자적인 탄식과 직결됩니다. 세상은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짓밟는 것이 당연하다는 제국주의적인 논리를 펴지만,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억압받는 이들의 신음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분노하시고, 무너진 공의를 회복하기 위해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시는 분이십니다.
느헤미야는 고관들과 민장들을 불러 이 착취를 당장 멈추라고 질책하며, "우리가 이방인의 손에 팔렸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대로 속량하였거늘 너희는 또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고 묻습니다(7-8절). 그의 요구는 단순히 도덕적 윤리적 실천을 넘어서, 희년(Jubilee)의 정신, 즉 빚과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모두가 자유와 평등을 누리도록 하라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명령으로 돌아가라는 요청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신앙이란 자기 집 맞은편에서 일어나는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고, 스스로를 의로운 사람이라 착각하며 안일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완벽하게 윤리적인 삶을 살겠다는 자기 강화의 욕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넘어지고 실패할 때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게 정의를 실현하기를 요구하기 전에, 먼저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헤세드)으로 우리를 붙들어주십니다.
느헤미야 공동체가 고관들의 재산을 반환하고 빚을 탕감해주는 회복의 길(9절)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탐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소명)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기 삶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조율하며, 버려야 할 것을 버릴 때 비로소 공동체의 생명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홀로 이 거대한 부조리를 짊어지기를 명령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분께 간구할 때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의 삶은 마치 복잡하게 엮인 태피스트리(tapestry)와 같습니다. 외부의 실타래뿐 아니라, 내부의 실타래까지도 서로 얽혀 아름다운 무늬를 이루어야 합니다. 만약 내부의 실타래(공동체의 연대)가 이익과 탐욕으로 인해 끊어지거나 썩어버린다면, 아무리 외부적으로 화려해 보여도 그 태피스트리 전체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 끊어진 실타래를 이어 붙여 다시금 공존의 아름다운 무늬를 짜도록 우리를 격려하는 힘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