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3:1-32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이름들의 연대

by 평화의길벗 posted Nov 2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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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3:1-32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이름들의 연대

폐허의 성벽 재건은 인간의 힘이 아닌, 약한 자들을 통해 기어이 회복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선재적인 은혜에 대한 공동체의 깊은 응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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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느헤미야 3장은 다소 건조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름과 장소의 목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부터 시작하여 여리고 사람, 드고아 사람, 심지어 금장색 말기야와 향품 장사 한 사람의 이름까지, 이들은 마치 벽돌을 쌓듯 각자의 구역을 묵묵히 '중수(重修)'했습니다. 이 긴 명단은 영웅 한 사람의 헌신을 기록한 영웅 서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지극히 평범하고 때로는 미미해 보이는 이들의 연대가 만들어낸, 장엄한 공동체의 서사시입니다.

우리의 질펀한 삶의 현실 속에서, 신앙에 대한 회의를 품거나 자신의 연약함에 좌절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나는 벽을 쌓을 힘도 기술도 없는데, 교회의 거룩한 일에 무슨 보탬이 될 수 있을까?"라는 물음 앞에서 위축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 3장은 그런 우리에게 따뜻한 진실을 속삭여 줍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건축가나 힘센 군인만을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벽을 쌓는 일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향품 장사에게도 그의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맡기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닌, 우리 존재 자체의 존엄고유한 은사를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마치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Simone Weil)가 노동의 숭고함을 역설했듯, 가장 낮은 곳에서 땀 흘리는 일상적인 노동이 곧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가 됨을 보여줍니다. 문학적으로 보아도 이 낯선 이름들의 반복은, 역사의 주류에서 소외된 이들의 삶을 낱낱이 호명하여 기억하는 하나님의 섬세한 기록 방식입니다. 가장 볼품없는 분문(똥문)을 중수한 이들의 이름까지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감당하는 모든 소소한 봉사와 수고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인 한 페이지임을 증언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중수(重修)의 원동력이 '해야 한다'는 율법적 강제나 교훈적 의무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무너진 성벽은 이스라엘의 연약함실패를 상징했습니다. 그 폐허 가운데 다시 성벽을 쌓을 수 있도록 마음을 주시고, 자원하는 마음을 불어넣으시고, 심지어 재료까지 마련해 주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이들의 노동은 선재적 은혜에 대한 감격의 응답이며, "버릴수록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들"을 깨달은 순례자들의 자발적인 헌신이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땀과 시간은 하나님께 갚아야 할 '빚'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 때문에 저절로 흘러나오는 '선물'인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성벽 재건과 같습니다. 우리가 쌓는 것은 눈에 보이는 교회당 건물이 아니라, 사랑과 환대와 연대로 이루어진 영적인 공동체의 울타리입니다. 혹 우리의 삶이 무너진 벽처럼 느껴질지라도,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당신의 걸작품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먼저 우리에게 도달했습니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은..."이라는 무한한 호명 속에서, 우리 각자의 작은 몫이 모여 '삶이 메시지다'라고 외칠 수 있는 희망의 성벽이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세상에 희망을 심으시려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 앞에, 감사함으로 우리의 자리를 지키는 일상의 순례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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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03:01-32 이름들이 엮어낸 성벽, 혹은 삶의 태피스트리

명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이름들의 명단은, 연약하고 평범한 이들의 일상적 헌신을 통해 차별 없이 공동체의 회복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은혜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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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의 시대, 호명된 존재들

느헤미야 3장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건조하고 지루해 보이는 본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수십 명의 이름, 직업, 가문, 그리고 그들이 맡았던 성벽의 구간이 징표처럼 나열되어 있습니다. 멜키야와 핫숩( 3:23) 같은 이들은 ‘자기 집 맞은편’(3:23, 28, 29, 30)을 중수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지극히 구체적인 목록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까요?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익명성과 대량생산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원으로 보며, 구매력에 따라 평가되거나, 혹은 '쓰레기가 된 사람들'처럼 잉여적 존재로 취급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서의 이 길고 긴 이름 목록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서 이름 없는 존재란 아무도 없다는 선언과 같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다른 이들의 삶을 상상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악의 뿌리라고 했지만, 하나님은 이 사소하고 평범해 보이는 이들의 노동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성벽 재건은 이들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작업이었으며, 이름들이 기록되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깊은 경외심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강하고 잘난 영웅을 앞세워 단번에 일을 처리하시기보다는, 오히려 평범하고 연약한 이들을 동원하여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먼저 일어나 양 문을 중수했고(3:1), 그의 옆에는 드고아 사람들이 작업했으며, 심지어 금장색(세공인)과 향품 장사(조향사)들까지 동참했습니다(3:8). 본래는 돌과 나무를 다루지 않았을 법한 이들, 즉 일상의 자리에서 '향기'를 빚던 사람들이 이제는 '벽돌'을 쌓았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대개 우리가 익숙한 삶의 자리, 혹은 "앉은 자리가 꽃자리"라는 깨달음이 있는 그곳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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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존의 윤리, 덧없는 일상의 아름다움

이 목록이 주는 또 하나의 감동은 '협력의 아름다움', 즉 공존의 윤리입니다. 성벽은 어떤 한 명의 천재 건축가나 권력자의 힘으로 쌓아 올려진 것이 아닙니다. 동네마다(3:9, 12) 각기 다른 배경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곁을 내어주며 각자의 몫을 감당했습니다(3:10, 12, 16).

김춘수 시인이 노래했듯,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또한 그 외적 대상과 관계가 시작되었음을 상징'합니다. 느헤미야 3장은 그저 돌멩이와 흙으로 쌓아 올린 벽이 아니라,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고통을 나누고 희망을 공동으로 빚어냈던 공동체의 증언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흔들림 없이는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없고, 우리 믿음의 공동체 또한 홀로 고고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이들이 서로를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될 때 굳건해집니다.

신앙에 회의가 드는 이들이여, 그리고 더 적극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이여,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우리가 완벽하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우리의 부족한 '일상의 조각'들을 재료 삼아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무너진 세상을 향한 회복은 억압과 착취가 없는 평등 공동체를 역사 속에 실현하려는 하나님의 꿈입니다. 이 꿈은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자기 강화의 욕망이 아니라,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심'으로(2:8, 2:18) 우리 각자가 가진 작은 것들을 기꺼이 내어줄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이처럼 "다른 이들과 평화롭게 살 줄 아는 사람을 육성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품격입니다. 오늘,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의 삶의 자리, 즉 '자기 집 맞은편'에서 행하는 작은 성실함과 이웃과의 연대가 바로 무너진 세상의 폐허 위에 하나님의 평화의 태피스트리를 짜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우리는 흔히 건축물의 웅장함에 감탄하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 건축물을 이루는 돌 하나하나의 헌신과, 그 돌을 놓은 이들의 이름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함께 짜는 공동체의 역사는 마치 수많은 실타래가 엮여서 비로소 장엄한 그림을 완성하는 거대한 태피스트리와 같습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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