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10:9-44 비에 젖은 이름들
우리의 죄가 비에 젖은 광장의 떨림처럼 구체적인 현실일지라도, 하나님은 그 아픈 명단 속에서조차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 길을 여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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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종종 안락한 확신이 아니라, 차가운 빗속에 흠뻑 젖어 떠는 실존적 떨림으로 다가옵니다(스 10:9). 예루살렘 광장에 모인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악이라는 무거운 진실과, 살을 에는 듯한 겨울비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질펀한 삶의 현실'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모습입니다. 죄의 고백은 추상적인 교리의 암송이 아니라, 이처럼 비에 젖은 생쥐처럼 초라하고 비참한 나의 실상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일입니다.
에스라가 그들에게 요구한 것은 실로 참혹한 결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그 자녀들을 "내보내라"(스 10:11, 19)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을 도려내는 외과수술과도 같은 고통입니다. 어찌 사랑하고 정을 나누며 살아온 이들을 내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의 이성과 감성은 이토록 비정한 요구 앞에서 망설이고 주저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의 결과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그리고 그것을 끊어내는 일이 얼마나 큰 대가를 요구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거룩한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공동체는 존재의 뿌리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다시 살리는 길은 이 아픈 환부를 도려내는 것뿐이었습니다.
이 본문의 절정은 승리의 찬가가 아니라, 마지막을 장식하는 길고 지루한 '이름들의 목록'(스 10:18-44)입니다. 제사장, 레위 사람, 그리고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죄에 연루된 자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호명됩니다. 이 명단은 죄가 얼마나 보편적이며 구체적인지를 폭로합니다. 죄는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이름이 적힌 현실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숨겨진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명단'으로만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그들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속건제" 곧 죄의 대가를 치르는 제물을 바치며(스 10:19) 응답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부끄러운 이름이 적힌 그 목록 앞에서 우리를 정죄하고 끝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이름을 부르시며, 우리가 흠뻑 젖은 그 절망의 자리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길'을 열어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삶이 실패와 타협으로 얼룩져 차가운 빗속에서 떨고 있을 때,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은 우리에게 완벽한 의로움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의 그 아픔과 부끄러움을 안다"고 말씀하시는 위로입니다. 그 음성 앞에서, 우리는 비록 떨고 있을지라도 다시 일어설 '아슬아슬한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공로가 아닌, 이처럼 비에 젖어 떨고 있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끈질긴 사랑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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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10:9-44 비에 젖은 광장, 이름을 돌려받는 자리
진정한 회심은 눈물을 넘어 고통스러운 결단이라는 순례의 길을 걸을 때 시작되며,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과정은 언약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긍휼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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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은 외화내빈(外華內貧)의 현실로 가득합니다. 겉으로는 풍요와 질서를 자랑하지만, 안으로는 돈과 권력의 논리에 사로잡혀 영혼의 심지가 깊이 박히지 못한 채 허청거립니다. 우리는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려 하기보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자아의 울타리' 안에 갇혀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진실은 자기 안에 있는 약함과 부끄러움을 살필 용기에서 시작되지만, 우리는 늘 그 문턱에서 주저합니다.
에스라 10장의 후반부는 바로 그 문턱을 넘어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온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 앞 광장에 모였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큰 비였습니다(스 10:9).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닌, 이 영적 결단의 순간에 쏟아진 비는 죄를 직면하는 고통과, 새롭게 뿌리내려야 하는 순례의 여정이 결코 쉽지 않음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백성들은 통곡했지만, 이제 그들은 감정적인 토로를 넘어선 실질적인 행동을 요구받습니다.
죄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방식과 관계의 질서를 파괴합니다. 백성들이 이방 민족과의 통혼을 끊고 정결을 회복하겠다는 '고통스러운 결단'(스 10:12)을 내렸을 때, 이는 고통이 따르는 대가를 치르는 일이었습니다. 마치 폭풍우 속에서도 배를 든든히 붙잡아주는 닻처럼, 이 결단은 그들이 다시 혼돈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한 '떠나라'는 명령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그들은 급박하게 처리할 수 없는 이 거룩한 숙제를 체계적인 조직과 시간을 들여 해결하겠다고 요청합니다. 이는 진정한 회심이 ‘순간적인 감격’이 아니라, 끈질기고 지속적인 작업임을 보여줍니다.
이 장의 가장 건조하고도 엄중한 부분은 18절부터 44절까지 이어지는 죄를 지어 언약을 어긴 자들의 긴 명단입니다. 이 명단은 우리의 눈에는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나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름들은 그들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였으며, 그들의 죄악이 결코 추상적으로 처리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름'은 존재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실패가 역사에 새겨진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누구 하나도 망각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다시 언약 공동체로 회복시키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연약하고 흠이 있음을 아시기에, 이 고통스러운 정화의 과정을 허락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때로 비참함으로 짜인 천처럼 느껴진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이 뼈아픈 기록과 그에 따르는 결단 속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마땅히 내려져야 했을 심판보다 덜 징벌하신 하나님의 자비(긍휼)와 인애(헤세드)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이처럼 어렵고 고된 정화의 길을 걷는 것은 우리의 의무나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잃어버린 존재의 의미를 되찾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이 길을 걷게 하는 유일한 동력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