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9:01-08 잠깐의 은혜, 견고한 말뚝
우리의 거룩함이 무너진 절망의 자리에서조차,
하나님은 ‘잠깐의 은혜’라는 견고한 말뚝을 박아 우리를 소생시키십니다.
*
우리는 때로 견고한 성을 쌓았다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오랜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고향,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고 율법을 다시 세우며, 이제는 제법 거룩한 공동체가 되었다고 안도합니다. 그럭저럭 신앙의 뼈대를 갖추었고, 예배의 형식도 회복했으니, 어둠의 시간은 끝났다고 선언하고 싶어 합니다.
바로 그 안도의 순간, 에스라의 귀에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옵니다. 백성들은 물론, 거룩함을 지켜야 할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마저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스 9:1) 그들의 가증한 일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자손'이 '이방 자손'과 뒤섞여(스 9:2) 정체성의 근간이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애써 쌓아 올린 성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윤리적 타락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별됨'이라는 존재의 핵심을 잃어버린 사건입니다. 세상의 소금으로 부름받았으나, 세상의 맛에 동화되어 짠맛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삶의 가치관, 일상의 선택, 관계의 방식에 있어서 하나님 백성다운 고유한 향기를 포기하고, 그저 편하고 익숙한 세상의 방식을 따른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에스라는 겉옷과 속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주저앉습니다(스 9:3). 이것은 연출된 슬픔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념 체계가 무너져 내리는 실존적 고통입니다. 그는 저녁 제사 때가 되어서야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손을 폅니다. 그러나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스 9:6).
이 부끄러움, 이 '낯붉힘'이야말로 거룩함의 시작입니다. 그는 "그들이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발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스 9:6)라며 '우리'의 죄를 고백합니다. 이 죄악이 과거 우리 조상들을 칼과 포로 생활과 "오늘날과 같이" 부끄러운 수치로 내몰았던 바로 그 죄임을(스 9:7) 통렬하게 자각합니다. 역사는 반복되고, 인간은 이토록 쉽게 망각하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낯붉힘 앞에 서 있습니다. 거룩한 자손이라 불리면서도 세상의 가치관과 뒤섞여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사랑을 말하지만 이기심을 따르고, 공의를 외치지만 불의에 침묵하는 우리의 이중성. 우리는 모두 "하늘에 미치는 허물"을 지닌 채, 감히 주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할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에스라의 기도는 절망의 탄식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짙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잠깐 은혜를 베푸사..."(스 9:8, 현대인의 성경).
신앙의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죄악이 하늘을 덮을 만큼 거대할지라도, 그것을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은혜는 '잠깐'으로도 충분합니다. 그 '잠깐의 은혜'는 "종노릇하는 중에도 우리를 약간 소생하게" 하십니다(스 9:8). 하나님은 우리가 여전히 "종노릇하는"(in our bondage) 현실 속에 있음을 아십니다. 완벽한 자유, 완전한 성화에 이르지 못했음을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그 속박의 한가운데 '견고한 말뚝'을 박으십니다. 우리가 완전히 떠내려가지 않도록, 우리의 존재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붙드시는 은혜의 닻입니다. 그리고 그 말뚝을 의지하여 우리의 눈을 밝히사(스 9:8), 비록 연약할지라도 다시 '소생'할 힘을 주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견고함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절망적인 낯붉힘 속에서도 '잠깐의 은혜'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습니다. 그 은혜가 우리가 여전히 '종노릇하는' 이 세상 속에서 거룩한 자손으로 살아갈 유일한 힘이며, 우리를 소생케 하는 견고한 말뚝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
에스라 9:1-8 값없는 은혜, 거룩한 푯대
부끄러움과 죄의 무게 앞에 무너지는 연약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미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거룩한 터전이라는 값없는 은혜를 베푸시고 계십니다.
*
우리의 삶은 종종 질주의 연속입니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공급받고 내달리지만, 정작 내 영혼의 심지는 깊이 박혀 있는지, 세상의 거친 파도 앞에서 허청거리지 않는지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돈과 욕망이 지배하는 거대한 체제, 곧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종종 무엇이 참된 삶의 가치인지 망각한 채 표류합니다.
이 시대의 영적인 빈곤은 어쩌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성찰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그림자를 살필 용기가 부족하기에, 우리는 때로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찾아내려 두리번거리는 가련한 시도를 합니다. 신앙 공동체마저도 세속의 가치에 편승하여, 스스로 ‘애국적’이라 칭하며 타자를 배척하는(혐오하는) 모순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났다는, "네가 어디에 있느냐?"는 하나님의 책망일 수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에스라 9장 1-2절을 보면, 고토로 돌아와 정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또다시 이방 민족들과의 통혼(通婚)이라는 죄악에 깊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이 일 후에’ 그들이 직면한 현실은 부끄러움 그 자체였습니다.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함께 거룩함을 상실한 이 현실 앞에서, 에스라는 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혼돈과 절망을 표현합니다(스 9:3). 이 모습은 마치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 속에서 복음의 노래를 부르려는 이들의 참담함과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외화내빈(外華內貧)의 길을 걸을 때, 그 죄의 무게는 너무나 커서 얼굴을 들 수 없는 수치(羞恥)가 됩니다(스 9:6).
인간의 죄와 수치는 이토록 깊고 참담하지만, 에스라의 탄식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인애(仁愛), 곧 헤세드’를 발견하게 됩니다. 8절은 이스라엘이 “잠깐 동안 은혜를 베푸사” 남은 자를 두셨으며, “우리 하나님 성전 안에 박힌 못”을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박힌 못’, 곧 거룩한 푯대의 은혜입니다. 남겨진 자들,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과 신실하심 때문에(헤세드), 그들에게 든든하게 뿌리를 내릴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자랑(지혜, 힘, 재산)이 허망하고,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로는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성전 안에 굳건한 못을 박아 두셨습니다.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광야에서 만나는 싯딤나무나 에셀나무의 고마운 그늘처럼, 이 못은 우리가 잠시라도 기댈 수 있는 ‘쉼’의 시작이자, 우리를 지탱해 주는 든든한 반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고 흠 없는 존재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연약하고 흠이 있음을 아시기에, 우리에게 도피할 수 없는 진실과 대면할 용기를 주시고, 그 진실 위에 뿌리내릴 거처를 선물하십니다. 이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나 홀로"의 생각에서 벗어나, 세상의 아픔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랑의 연대를 이루게 할 힘이 됩니다.
우리의 구원은 값비싼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이미 우리를 향해 부어진 하나님 사랑의 확신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향한 “내가 아직도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주님의 다정한 음성입니다. 이 음성을 듣고, 이미 박혀 있는 그 거룩한 못에 우리의 삶을 굳게 묶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여기, 이 모호하고 비참함으로 짜인 천과 같은 세상에서 희망을 살아내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그 못에 묶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