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9:01-08 귀환 공동체의 절망적인 타락과 에스라의 통한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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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학사 에스라가 유다 공동체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이방 민족과의 통혼(잡혼)을 통해 스스로를 더럽혔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비통해하는 장면입니다. 이 죄악은 과거 이스라엘의 멸망을 초래했던 언약 파기의 죄의 되풀이와 반복이었으며, 특히 지도자들이 이 죄에 앞장섰음이 보고되었습니다. 에스라는 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극도의 절망감을 표현했으며, 저녁 제사 때까지 넋을 잃고 앉아 있다가, 마침내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는 자신들의 죄악이 하늘에 미쳤음을 고백하면서도, 심판 가운데서도 잠시나마 남겨두어 피하게 하시고 터전을 마련해 주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인정하며 회복의 소망을 바라봅니다. 에스라의 기도는 용서나 구원을 간구하기보다, 이스라엘의 죄를 시인함으로써 백성에게 그 죄로 인한 결과를 심각하게 인식하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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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절 거룩한 연합의 파괴와 지도자의 책임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당신의 백성에게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순수성을 요구하시는 신실한 언약의 주인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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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지도층인 방백들과 두목들이 에스라에게 나아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까지도 이방 민족의 가증한 일을 따르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그들은 이방 사람의 딸을 아내나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핏줄이 주변 족속의 피와 섞이게 하였으며, 특히 지도자와 관리들이 이 죄에 앞장섰다는 사실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방 여인과의 결혼 문제는 당시 공동체의 정체성 상실의 위기를 맞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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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에서 돌아온 공동체가 모세오경에서 금지된(출 34:16; 신 7:1-4) 통혼을 통해 다시금 패망의 길을 자초하는 충격적인 현실을 보여줍니다. 고대 사회에서 통혼은 단순히 개인적인 결합이 아니라, 종교적 가치관을 포함한 문화 전체를 상호 인정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으며, 이는 우상 숭배로 직결되는 언약 파기였습니다. 이 죄악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행동인 '마알'의 범죄에 해당합니다.
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영광을 세상에 나타내도록 구별된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셨습니다. 이 거룩함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행위는 부정함이 쉽게 전염되는 통로가 됩니다. 특히 이 죄악에 종교 지도자들뿐 아니라 일반 지도자들까지 앞장섰다는 사실은 공동체의 영적 상태가 심각하게 타락했음을 반영합니다. 지도자의 타락은 공동체 전체에 가장 파괴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신약 성경의 유사 사례: 신약 성도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이루고,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구별된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교훈했으며, 이는 거룩한 삶은 세속적 가치관과의 타협을 단호히 거절하는 선택과 거절의 결과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거룩한 성화의 길을 걷도록 힘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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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에서 격리되어 살 수는 없지만, 세상의 타락한 가치와 문화에는 단호하게 거룩의 경계를 세워야 합니다.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일은 나만의 작은 순종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작은 타협이나 합리화에서부터 신앙이 무너지는 것을 경계하고, 무뎌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대의 영적인 '잡혼'은 물질주의, 쾌락주의, 이기적인 성공 지향에 무비판적으로 동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서 마음을 새롭게 하고 삶을 정돈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가정에서는 돈이나 편안함을 따르는 신앙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며,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물려줄 수 있도록 가정의 가치관을 말씀에 깊이 뿌리내려야 합니다.
교회는 지도자들이 진리보다 실리를 추구하고, 권력 남용이나 타협으로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죄를 경계해야 합니다. 지도자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교회는 진리와 공의를 말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용기와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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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절 지도자의 통한과 공동체의 각성
하나님은 통곡하며 백성의 죄를 끌어안는 지도자의 진실한 중보를 기뻐하시며, 그 기도를 통해 공동체의 영적 각성을 이끌어내시는 긍휼의 아버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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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는 죄의 보고를 듣자마자 너무나 기가 막혀 겉옷과 속옷을 찢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뜯으면서 땅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는 저녁 제사 때까지 넋을 잃고 앉아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백성이 저지른 이 큰 배신에 두려워 떨며 그에게 모여들었습니다. 에스라는 슬픔 속에 있다가 제사 시간에 일어나 찢어진 옷을 그대로 입고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들어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기도의 자세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복종과 겸비의 표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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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통한과 중보: 옷을 찢고 머리털을 뜯는 에스라의 행동은 가장 극심한 절망과 비통함의 표현이었습니다. 에스라는 자신이 직접 저지르지 않은 죄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죄를 자신의 죄와 동일시하며 운명 공동체적 책임감을 가지고 중보자로 섰습니다. 이는 느헤미야가 백성의 고난을 자신과 가족의 죄로 느끼며 기도한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에배와 기도의 중요성 : 에스라가 '저녁 제사 때'에 기도한 것은, 제사 의식 자체보다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진실한 마음을 담는 것이 하나님께 더 합당한 기도와 예배임을 보여줍니다. 에스라의 기도는 용서나 자비를 구하는 간구 이전에,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려는 철저한 고백 중심의 기도였습니다.
지도자의 모범 : 에스라의 눈물과 진실한 고통은 공동체 전체를 움직이는 힘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기도하며 실행하는 모습은 성도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좋은 공동체는 풀어야 할 문제를 인식하고 고치려고 노력하는 무리의 자세를 나타내며, 에스라는 이러한 공동체를 이끌어갈 자격이 있는 리더였습니다. 진정한 개혁은 억지가 아니라 백성 스스로 그것을 결정하도록 이끄는 과정에서 엄청난 추진력을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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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이의 죄를 ‘우리의 죄’로 여기고 참회하는 공동체적 연대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힘들 때 감정적 분노나 세상적인 방법 대신, 먼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에스라의 자세를 본받아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역사에 참여하는 행위입니다. 또한 기도하며 실행하는 삶이 필요하며, 우리의 진정한 개혁은 억지가 아니라 스스로 시작하는 일에서 엄청난 추진력을 얻습니다.
교회 리더들은 기도의 사람으로서 공동체의 영적 상태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져야 합니다. 지도자가 낮은 모습으로 섬길 때, 공동체 전체가 마음을 하나로 모아 하나님의 일에 동참합니다. 세상 속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인은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섭리 아래 이해하고, 무너진 곳을 재건하는 시대적 사명을 발견하고 힘을 다해 감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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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절 절망적인 고백 속에서 발견된 은혜
하나님은 우리의 죄의 무게와 크기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언약에 근거하여 용서와 회복의 터전을 마련해 주시는 무한한 자비와 긍휼의 근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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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는 부끄러움과 낯 뜨거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들의 죄악이 하늘에까지 닿았다고 인정하며, 조상 때부터 오늘까지 죄의 결과로 왕들과 백성들이 칼에 죽고 포로로 잡혀 온갖 수모를 겪었음을 시인합니다. 그러나 이어서 “이제” 주 하나님께서 잠깐 은혜를 베푸사 얼마쯤을 살아남게 하셨고(이는 신적 수동으로 남겨졌다는 의미입니다), 페르시아 왕들에게 사랑을 받아 성전을 다시 짓고 예루살렘과 유다에 든든한 터전(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을 마련해 주셨음(소성케 하셨음)을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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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심판의 철저한 인식 : 에스라의 기도는 이스라엘 역사를 죄악의 역사로 고백하며, 멸망은 국력 부족이 아닌 불순종의 대가였음을 강조합니다. 에스라는 철저한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문제는 항상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했음을 드러냅니다.
긍휼과 소망의 근거 : 죄의 심판이 마땅한 상황에서, 에스라는 하나님의 긍휼만이 그들이 살아남은 유일한 이유임을 붙듭니다. '잠깐 은혜를 베푸시어' 터전을 마련해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는 신실한 언약의 증거입니다. '박힌 못' (히브리어: 야테드)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확고부동한 정착 상태를 강조하는 문학적 표현이며, 하나님께서 회복을 위한 구원의 섭리를 진행하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에스라가 고백한 희망의 유일한 근거인 하나님의 긍휼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값없는 구원으로 완성됩니다. 우리의 구원과 회복은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느헤미야 역시 백성들이 하나님의 긍휼의 약속을 따라 포로에서 돌아왔음을 고백하며, 구원은 온전히 주의 것임을 탄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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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그 은혜를 방종의 기회로 삼지 않고 회복의 동력으로 삼아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삶이 유지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자비(긍휼)가 일상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성전 건축이 돈이나 설비가 아닌 사람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깨달아, 말씀 중심의 공동체를 견고히 세우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관점은, 외적 조건에 좌절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주님과의 동행을 믿으며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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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는 오늘 에스라의 통한의 기도를 통해 저희 공동체의 죄악을 바라봅니다.
저희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가증한 행위에 쉽게 물들어,
거룩한 언약을 저버리는 영적 잡혼의 죄를 반복했음을 고백합니다.
저희의 죄악이 하늘에 미쳐 마땅히 심판받아야 할 존재이나,
주님께서는 저희를 잠깐 버리지 않으시고 긍휼을 베푸사 살아남게 하셨음을 감사합니다.
주님, 저희의 무뎌진 양심과 타협하려는 마음을 용서하여 주시옵고,
에스라처럼 공동체의 아픔을 내 책임으로 끌어안고 통곡하며 중보하는 지도력을 주시옵소서.
저희의 가정과 교회, 학교와 직장에서 거룩의 경계를 분명히 세우고,
눈앞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말씀을 진리로 삼는 신앙을 왜곡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세상을 향한 저희의 시선이 비난이 아닌 사랑이 되게 하시고,
저희가 가진 권위와 영향력이 특권이 아닌 섬김의 도구가 되게 하옵니다.
주님께서 저희에게 허락하신 작은 순종을 사용하여 놀라운 일을 이루실 줄 믿으며,
주님의 은혜를 방종의 기회로 쓰지 않고 회복의 동력으로 삼아 나아가겠습니다.
저희가 왕으로 모시는 주님, 오직 주님의 신실하신 긍휼만을 의지하오니,
저희를 이끄셔서 거룩한 백성으로서 합당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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