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6:13-22 폐허에 깃드는 기쁨

by 평화의길벗 posted Nov 0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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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6:13-22 폐허에 깃드는 기쁨

신앙은 절망의 폐허 위에서조차 은밀히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하며, 그분이 선물로 주시는 기쁨을 누리는 삶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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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먼지를 뒤집어쓴 채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의 삶은 고단했습니다. 바빌론의 화려함 뒤에 가려진 노예의 설움을 견디고 돌아왔지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장엄한 조상의 도시가 아니라 무너진 성벽과 폐허뿐이었습니다. 삶이란 어쩌면 이처럼 거대한 잔해 더미를 뒤적이며 겨우 쓸모 있는 조각 하나를 찾아내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성전을 다시 짓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희망의 첫 삽은 곧 절망의 벽에 부딪혔습니다. 안팎의 방해와 조롱,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잠식하는 무력감. "과연 이 일이 가능할까?" 신앙에 대한 회의는 그렇게, 거창한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일상의 무게에서 비롯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습니까? 무언가를 다시 세워보려 할 때마다, 거대한 무의미의 바람이 불어와 우리의 연약한 다짐들을 날려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에스라 6장의 풍경은 놀라운 반전입니다. 그토록 멈춰 있던 공사가 "신속히"(13절) 진행되고, 마침내 성전은 완공됩니다. 이들의 수고가 "형통"(14절)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무엇이 이들을 '형통'하게 만들었습니까? 그들의 굳은 의지나 탁월한 능력이었을까요?

성경은 우리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이끕니다. 그들은 "학개와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기"(14절) 때문이요, 이방의 왕 다리오가 "조서를 내려"(13절) 그들을 도왔기 때문입니다. 절망의 순간에 멈추지 않고 희망을 노래한 예언자의 목소리, 그리고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이방 통치자의 마음을 움직이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는 언제나 우리의 계산과 기대를 뛰어넘어, 가장 뜻밖의 방식으로 찾아옵니다.

성전이 완공되자, 그들은 봉헌식을 열고 "즐거이"(16절)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어서 유월절을 지킵니다(19절). 이 유월절에는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이들뿐 아니라,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에서 스스로를 구별하여"(21절) 주님을 찾던 이들도 함께합니다. 폐허 위에 다시 세워진 공동체는, 순수 혈통의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모든 이들을 품어 안는 은혜의 공동체였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절정은 마지막 2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여기에 신앙의 깊은 역설이 있습니다. 기쁨은 성취의 대가가 아니었습니다. 기쁨은 그들 스스로 만들어 낸 감정의 결과물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셨다." 기쁨은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 핀 꽃이요, 우리의 연약함을 뚫고 들어오는 신비한 능력입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의 연약함에 절망합니다. 신앙이 있다 하면서도 쉽게 회의에 빠지고, 사랑을 다짐하면서도 이내 무관심의 그늘에 숨습니다. 스스로가 마치 재건을 포기한 성전 터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문턱에서 서성이는 길벗 여러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의 연약함이 아니라, 그 연약함 속에서도 기어이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우리의 삶이 해야 할 일은 '기쁨을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넘어뜨린 절망의 자리에서, 여전히 우리를 돕기 위해 이방 왕의 마음까지 돌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무너진 삶의 터전 위에서,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성전을 짓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완공의 날에, 우리 모두는 그분이 주시는 참된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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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6:13-22 멈춤과 지연을 넘어선 거룩한 시간의 회복

제국의 포악한 시간 속에서도 기어코 완성된 성전은, 우리의 노력 이전에 이미 승리하신 하나님의 끈질긴 긍휼이 새겨진 거룩한 리듬의 회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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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파시스트적(Fascistic)인 속도로 내달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마음은 허청거리고, 삶의 충만함은 허락되지 않는 '점-시간'(點-時間) 속에서 길을 잃습니다. 돈의 지배 아래서 소유나 지위로 자기 존재를 치환하려는 세상의 논리는, 우리에게 '나는 누구이고, 여기는 어디인가?'라는 진지한 성찰의 질문마저 묻지 못하게 합니다.

구약성경 에스라 6:13-22는 이처럼 중심을 잃고 헤매는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의 근원적인 회복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지연과 방해—대적들의 모함과 왕의 조서로 인한 강제된 멈춤—를 극복하고 마침내 성전 건축을 마쳤습니다 [6:14]. 특히 다리오 왕의 명령이 총독들에 의해 신속하게 준행되었다는 기록은 [6:13]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 건축의 완성이 유다 백성들의 결단이나 능력에만 기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는 하나님의 명령(여호와의 말씀)과 페르시아 왕들(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6:14]. 그들이 해야 하는 것을 강조하기보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주목해야 합니다. 거대한 제국의 권력은 늘 타자를 배척하고 심지어 죽이는 말(폭력적 텍스트)을 생산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제국의 심장부에서 잊혔던 고레스의 조서(기록)를 다시 끄집어내시고, 다리오 왕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6:22].

이것이야말로 은총의 역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강고한 시스템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어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의 주도권은 늘 하나님께 있습니다.

성전이 완공되자 백성들은 즐거움으로 봉헌식을 행하고 [6:16], 곧이어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6:19]. 유월절은 이스라엘에게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 투쟁이었습니다. 광야 같은 세월을 지나왔지만, 그들은 이 절기를 통해 애굽에서의 노예 상태해방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들은 정결하게 되고 [6:20], 기쁨으로 지켰는데, 이는 과거의 죄와 욕망의 쇠항아리를 벗어 던지고 성스러운 단순함을 회복하려는 덜의 삶(Less)으로의 회귀였습니다.

특별히 에스라는 이 기쁨의 근원을 명확히 밝힙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6:22]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일을 돕도록 하셨음이니라" [6:22]. 다리오 왕의 마음이 유다 백성에게 호의적으로 기운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자 **변함없는 사랑(헤세드)**의 증거였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한 현실 앞에서 회의를 품는 이들이여, 우리는 이 성전 재건의 서사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를 읽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고난과 멈춤은 우리를 연단하시고, 우리 속에 영혼의 둔감함을 깨뜨려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갈망하게 하는 통로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을 잃지 않고, 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이웃이 되어 사랑의 태피스트리를 짜는 순례자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우리가 절망의 심연 속에서 바람 한 호흡처럼 유한한 존재임을 깨달을 때, 우리에게 새롭게 다시 시작할 용기를 불어넣는 아슬아슬하지만 확실한 희망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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