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5:01-17 멈춘 손, 보시는 눈
멈춤과 망설임의 자리에 선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우리의 결단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보시는 눈’(grac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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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때로 멈춰버린 건축 현장과 같습니다. 첫 열정은 사그라지고, 현실의 먼지만 자욱합니다. 우리 모두는 삶 속에 저마다의 거룩한 성전을 짓고자 했지만, 세상의 비웃음과 내면의 두려움에 부딪혀 손을 놓아버린 경험이 있습니다. 에스라 시대의 귀환 공동체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1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멈춰 서 있었습니다. 위대한 재건의 꿈은 잿더미가 되었고, 놓다 만 성전의 기초석은 그들의 좌절을 증명하는 기념비처럼 보였습니다.
무엇이 이 기나긴 침묵을 깨뜨립니까?(에스라 5:1-2) 정치적인 타협이나 경제적인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말씀'이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 두 예언자가 일어섭니다. 그들은 영혼의 시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멈춰 있던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영을 '일으켰습니다'. 그 말씀은 16년의 나태를 질책하는 교훈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를 일깨우는 '기억의 초대'였습니다. 말씀은 그들 안에 잠자고 있던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불붙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용기를 내어 다시 망치를 잡는 순간, 어김없이 '현실'이 찾아옵니다(5:3). 총독 닷드내와 그의 관리들이 즉시 달려와 묻습니다.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너희 이름이 무엇이냐?" 이것은 언제나 현상 유지를 원하는 세상이 싹트는 희망을 향해 던지는 차가운 질문입니다. 그들은 작고, 연약하고, 공식적인 허가조차 불분명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멈춰야 할 모든 이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성경은 단 하나의, 그러나 숨 막히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보살피셨으므로[원어 직역 : 그들의 하나님의 눈이 유다의 장로들 위에 있었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5:5)
이것은 미셸 푸코가 말한 감시와 통제의 '판옵티콘(감시자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피감시자가 자신이 감시될 수 있다는 가능성 아래 스스로 통제하게 되는 구조)'의 눈이 아닙니다. 그것은 심판하고 억압하는 시선이 아닙니다. 이 시선은, 걸음마를 떼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보살피는 눈'입니다. 넘어질까 조마조마하면서도 그 걸음을 지켜주는 사랑의 시선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고 계셨기에', 대적들의 손이 머뭇거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격을 의심받는 바로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시선 아래서 공사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력만으로 거룩한 성전을 완공하는 영웅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멈춰 섰던 자들이며, 스스로를 변호할 힘조차 없는 연약한 이들입니다.
하지만 은혜는 바로 그 멈춘 자리에 찾아옵니다. 잠든 영혼을 깨우는 '말씀'으로 찾아오고,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우리를 지키시는 '보시는 눈'으로 임합니다. 자신의 삶이 실패한 건축 현장처럼 느껴지는 이들에게, 신앙의 길 위에서 지친 이들에게, 에스라 5장의 이야기는 조용히 속삭입니다. 당신은 홀로 일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눈이 지금, 당신 위에 머물러 있다고 말입니다.
그분의 시선이 우리로 하여금 다시 벽돌 한 장을 쌓아 올릴 용기를 줍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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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5:1-17 예언자의 음성, 멈춤을 뚫고 흐르다
멈춤의 시간에 갇혀 허청거리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예언자의 입을 통해 신실한 동행의 약속을 상기시키며 무너진 재건의 현장을 다시 깨우십니다.
우리는 지금 삶의 속도가 가히 파시스트적이어서 그 변화를 따라잡기 어려워 허청거리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마음은 조화와 균형을 잃고, '나는 누구이고, 여기는 어디인가?'라는 진지한 성찰의 질문은 늘 뒤로 밀립니다. 익숙한 질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오직 돈이나 지위로 자기 존재를 치환하려는 세상의 논리에 길들여질까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섣부른 교훈적 압박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입니다.
구약성경 에스라 5:1-17은 바로 그 강제된 멈춤을 뚫고 나오는 은총의 서사를 담고 있습니다. 앞서 바벨론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성전 기초를 놓았지만, 대적들의 모함과 정치적 술수로 인해 공사는 멈추고 무력감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발적인 헌신을 유발할 권능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때, 학개와 스가랴 두 예언자가 일어납니다(에스라 5:1). 예언자들은 단순히 미래를 예언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과 역사를 보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무너진 예루살렘의 초라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백성들에게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라고 선포합니다 (에스라 5:1-2). 이 선포는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강조하기보다, 하나님이 여전히 당신의 일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변함없는 신뢰의 약속이었습니다.
역사 변혁은 먹장 구름 너머에 있는 푸른 하늘을 볼 눈이 열린 사람을 통해 시작됩니다. 예언자의 음성을 듣고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다시 시작할 용기를 냈을 때, 이는 절망의 나락 속에 누워있던 자기 자신들의 존재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처럼, 개인의 변화가 역사 변혁의 초석이 되는 순간입니다.
재개된 공사는 곧바로 제국의 눈을 끌어당깁니다. 유브라데 건너편 총독 닷드나이(Tattenai)가 나타나 “누가 너희에게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라고 명령하였느냐”고 묻습니다(에스라 5:3).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제국의 맨 얼굴이 충돌하는 장면입니다.
이때 유다 백성들이 내놓은 답변은 가장 위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종들입니다"(에스라 5:11). 그들의 정체성은 자신들의 초라한 현실이나, 강력한 경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만물의 근원(arche)이시자, 만물을 지으신 분에게 소속되어 있다는 확고한 신뢰에 근거합니다.
이들은 이어지는 답변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죄와, 그 결과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에스라 5:12), 그리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성전 재건을 명령했던 역사적 사건을 상세히 설명합니다(에스라 5:13-16). 이는 그들의 고난의 역사가 무의미한 혼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행되었고, 그들을 향한 헤세드(인애)가 끊어지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영혼의 버팀목이 됩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한 현실 앞에서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모든 이들이여,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고통을 아십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은혜는 우리가 더 열심히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족함 속에서도 주님은 예언자의 음성을 보내시어, 멈추지 않는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의 삶을 상상하지 못하는 무능함에서 벗어나, 고난의 자리를 향해 나아가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투박한 정신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처럼 작고 보잘것없을지라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통해 덜의 삶을 살아낼 때, 그 작음은 생명과 평화의 태피스트리를 짜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연약함과 실패는, 마치 상처를 입은 감나무 가지가 오히려 귀한 먹감나무 무늬를 만들어내듯,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은총이 유입되는 통로로 사용하시려는 신앙의 연금술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