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3:1-13 폐허 위에 울려 퍼진 노래
하나님은 우리의 상실의 눈물과 소박한 희망의 환호를 한데 엮어 구원의 역사를 세워 가신다.
*
70년 만의 귀환이었습니다. 바벨론의 흙먼지를 털고 돌아온 예루살렘은 영광스러운 개선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유민의 귀환’에 가까웠습니다. 화려했던 솔로몬의 성전은 불탔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잿더미와 스산한 바람, 그리고 여전히 그들을 위협하는 이방 민족들을 향한 공포였습니다(에스라 3:3).
삶이 이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오랜 절망의 시간을 견디고 돌아온 일상이지만, 여전히 삶은 위태롭고 두려움은 실재합니다.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 두려움의 면죄부가 되지는 못합니다. 삶의 폐허 앞에서 망설이는 이들이여, 우리는 이 두려움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귀환한 백성들은 성벽이나 집을 먼저 짓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위 백성을 두려워"하면서도, 바로 그 폐허의 터 위에 제단을 쌓았습니다(에스라 3:3). 이것은 눈에 보이는 안전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근원을 먼저 붙드는 행위였습니다. 거창한 성전이 아니라, 단지 일상의 제물을 드릴 수 있는 소박한 제단. 그것은 연약한 인간이 두려움 속에서 드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응답이었고, 세상의 논리를 거스르는 고요하지만 급진적인 저항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강인함이 아니라, 이렇듯 연약함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믿음의 몸짓을 기뻐하십니다.
마침내 성전의 기초(지대)가 놓이던 날, 기이한 풍경이 펼쳐집니다(에스라 3:10-11).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예복을 입고 찬양을 시작합니다.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그러나 그 순간, 백성들의 반응은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대성통곡’입니다(에스라 3:12). 옛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기억하던 노인들입니다. 그들의 눈에 이 새로운 기초는 너무나 초라했을 것입니다. 역사의 비극과 상실의 고통을 온몸으로 통과한 이들에게, 이 작은 시작은 기쁨이기 이전에 서러움이었습니다. 그들의 눈물은 불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상실한 것들에 대한 거룩한 애도이며 ‘기억의 전례’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환호’입니다(에스라 3:12). 바벨론에서 태어나 옛 영광을 본 적이 없는 젊은이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비교할 과거가 없었습니다. 이 잿더미 위에 놓인 첫 돌이야말로 그들이 본 첫 번째 기적이었습니다. 그들의 환호는 미래를 향한 순전한 희망의 외침이었습니다.
에스라는 이 두 소리가 한데 뒤엉켜 "분간하지 못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에스라 3:13).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깊은 울림입니다. 상실의 슬픔과 새로운 시작의 기쁨, 과거를 향한 눈물과 미래를 향한 환호. 이 모순적인 두 소리가 뒤엉킨 불협화음. 이것이야말로 '삶의 진실한 소리'입니다.
하나님은 노인들을 꾸짖어 "왜 기뻐하지 못하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젊은이들을 나무라며 "어른들 앞에서 조용히 하라"고 명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거대한 슬픔과 그 순진한 기쁨을, 그 대성통곡과 그 큰 환호를 모두 받으셨습니다.
신앙은 무균질의 완벽한 기쁨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우리의 이 양가적인 마음, 삶의 고단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품는 아슬아슬한 희망을 끌어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교리가 아니라, 질펀한 삶의 현실 속에서 터져 나오는 정직한 소리를 듣기 원하십니다.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이여, 우리의 연약함은 실패가 아닙니다. 더 적극적인 헌신을 바라는 이들이여, 우리의 열심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과 환호가 뒤섞인 그 자리에, 바로 그 폐허 위에 당신의 역사를 세우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열심이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상처마저도 그분의 성전을 짓는 거룩한 재료가 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에스라 3:1-13 무너진 터 위에 새겨진 은총의 리듬
눈물과 기쁨이 뒤섞인 재건의 터전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한 시작을 당신의 긍휼과 신실함으로 받으십니다.
*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삶의 중심(中心)을 잃고 허청거리는 시간간의 연속입니다. 마치 끝없이 내달리면서도 삶의 충만함을 느끼지 못하고, '나는 누구이고, 여기는 어디인가?'라는 진지한 성찰의 질문마저 놀림의 맥락에서만 발화될 뿐입니다. 익숙한 질서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고, 돈의 지배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자기 속에 있는 약함, 상처, 그림자를 살필 용기가 필요합니다.
구약성경 에스라 3:1-13은 절망의 심연(深淵)을 통과한 이들이 이 허청거리는 삶에 다시 중심을 부여하는 드라마를 보여줍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먼저 자신들의 거주지에 정착한 후, 일곱째 달에 한마음으로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1절). 그들이 가장 먼저 행한 일은 웅장한 성전을 짓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번제를 드렸습니다(2-3절).
놀랍게도 이 재건의 시작은 강한 신념이나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방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취한 나약한 반응이었습니다(3절). 그들은 외적인 위협 앞에서 자신들의 유한함과 무력함을 절감했고, 가장 근본적인 행위, 곧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제사)을 통해 삶의 토대를 다지고자 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은총의 역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웅대한 계획이나 완벽한 능력에 기초하여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이야말로 주님의 은총이 유입되는 통로가 됩니다.
이어지는 기록은 그들이 율법대로 초막절을 지키고(4절), 성전의 기초를 놓는(정초, 定礎) 과정입니다(6,10절). 성전의 기초가 놓일 때(10절), 백성들은 환호하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11절). 이는 절망의 심연을 거친 후, 마침내 희망의 불꽃이 다시 피어오르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의 현장에는 씁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이전 성전(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보았던 늙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족장들은 새 성전의 기초를 보고 대성통곡했습니다(12절). 그들의 눈물은 단순히 과거의 상실에 대한 애통이 아니라, 현재의 초라한 현실과 회복의 불확실성을 직시하는 고통스러운 성찰이었습니다. 이처럼 한 공동체 안에서 기쁨의 함성과 슬픔의 통곡이 뒤섞여 터져 나왔습니다(13절).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한 현실 앞에서 신앙에 회의(懷疑)를 품는 이들이여,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삶은 선과 악으로 명쾌하게 갈리지 않고, 기쁨과 슬픔, 확신과 회의 사이에 걸린 외줄을 타는 것과 같습니다. 욥의 친구들처럼 옳고 그름의 잣대만을 들이대며, 우리의 고통을 쉽게 해석하려 들 때, 우리는 오히려 상처를 덧나게 할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처럼 불완전하고 혼돈스러운 우리의 모습 자체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헤세드(인애, 변함없는 사랑)로 우리를 다시 싸매어 주시고, 상처를 아물게 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시작—두려움 때문에 서둘러 쌓은 제단, 혹은 과거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는 초라한 기초—그것이야말로 주님의 은총이 당도하는 자리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의 삶을 추구하며 욕망의 잔뿌리에 의지하려는 태도 대신, 겸손과 온유를 옷 입고, 현재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내보일 용기입니다.
결국 에스라의 기록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교훈적 압박 대신, "내가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라는 주님의 변함없는 신뢰와 사랑 속에 우리 삶의 진정한 기초가 놓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을 잃지 않고, 재건의 터전인 이 세상에서 생명과 평화의 태피스트리를 짜는 덜의 삶(less)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언약에서 계속 벗어나는 백성 때문에 분노하면서도 끝내 그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이듯, 우리의 구원은 완벽한 성취가 아니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힘을 주시는 그 끈질긴 은총에 있습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