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2:1-17 이름, 그 거룩한 기억

by 평화의길벗 posted Nov 0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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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2:1-17 이름, 그 거룩한 기억

하나님은 세상의 화려한 족보가 아니라, 상처 입고 돌아온 '남은 자'들의 이름을 기억하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쓰신다.

*

우리는 종종 성경의 길고 지루한 명단 앞에서 걸음을 멈춥니다. 에스라 2장은 그런 본문입니다. 스룹바벨, 예수아... 바느아 자손 육백사십팔 명이요, 베배 자손은 육백이십팔 명이요... 숫자와 이름의 무미건조한 행렬. 현대의 장부처럼, 공적(功績)을 따지는 이력서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이 명단을 그저 역사의 참고 자료로 여기고 황급히 지나치려 합니다.

그러나 이 명단은, 세상의 장부와는 그 결이 다릅니다. 세상의 명단이 '가진 자'와 '이룬 자'를 기념하고 나머지를 익명의 그늘 속으로 밀어 넣는다면, 하나님의 명단은 '남은 자'와 '돌아온 자'를 기억합니다. 이들은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용광로에서 살아남은 이들, 혹은 그 낯선 땅에서 태어난 이들입니다. 승리자가 아니라 생존자입니다. 화려한 개선 행렬이 아니라, 70년의 트라우마를 안고 폐허가 된 고향으로 돌아오는 아슬아슬한 희망의 행렬입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바벨론을 삽니다. 자본의 논리가 모든 가치를 숫자로 환원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종종 거대한 시스템의 부속품처럼, 혹은 익명의 군중 속 하나의 점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네가 이룬 것이 무엇이냐"는 세상의 냉혹한 반문에 주눅이 듭니다. 에스라 2장 59절의 "그들의 조상의 계보와 혈통을 밝힐 수 없었던" 이들처럼,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영적 뿌리조차 희미해진 채 서성이는 영적 실향민인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하나님은 이 지루해 보이는 명단을 펼쳐 드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군중'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인의 노래처럼, 하나님의 기억 속에서 그들은 비로소 '존재'가 됩니다. 이 명단은 단순한 인구 조사가 아니라, 잊혔던 이들의 존엄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신실한 '호명(呼名)'입니다. 여기에는 제사장, 레위 사람, 노래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이름 모를 성전 막일꾼(느디님 사람들)과 심지어 그들의 종들까지 포함됩니다(65절). 그 누구도 하나님의 기억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신비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자격이나 공로로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억'에 속하는 것입니다. 명단의 마지막, 그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하나님의 성전을... 제자리에 다시 건축하려고 예물을 기쁘게 드렸다"(68-69절)는 기록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의 헌신은 귀환의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이름을 잊지 않으시고 마침내 돌아오게 하신 그 헤아릴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길벗 여러분, 그리고 삶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진 듯한 상실감에 아파하는 이웃 여러분. 당신이 얼마나 연약한지, 당신의 영적 족보가 얼마나 불분명한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알고 계시며, 당신을 그분의 거룩한 기억 속에 품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 위대한 부르심에 대한 작은 응답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 연약한 응답을 기쁘게 받으시고, 그것을 재료 삼아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십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에스라 2:1-70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의 은총

흩어진 우리를 숫자가 아닌 이름으로 불러 모으신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이, 허물어진 시대 속에서 우리가 다시 설 수 있는 유일한 반석입니다.

우리는 지금 역동적이지만 동시에 허청거리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한병철 교수가 말한 대로, 삶의 충만함이 허락되지 않는 '점-시간'(點-時間) 속에 내달리며, 우리는 성찰의 시간을 잃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잠시 궤도에서 벗어난 이들을 놀리는 맥락에서만 발화될 뿐, 진지하게 탐색되지 못합니다. 익숙한 일상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존재를 소유나 지위로 치환하려는 세상의 논리에 길들여질까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삶의 중심입니다.

구약성경 에스라 2장은 그 중심을 향한 오래된 지도를 펼쳐 보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의 심연(深淵)을 통과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고향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목록입니다. 이 명단은 승리를 쟁취한 영웅들의 이름이 아닙니다. 전쟁과 압제 속에 모든 것을 잃고, 고립감공허감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혹은 돌아오기를 주저했을지도 모르는—약하고 불안한 남은 사람들(Remnant)의 기록입니다.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은 제국의 패권이 만들어낸 거대한 비극 속에서 그저 숫자로 환원된 사람들에 불과했습니다. 고통과 절망으로 인해 영문 모를 시련에 피폐해지고, 삶의 터전이 무너진 그들에게 세상은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세상은 추해. 창조 한가운데 혼자 버려진” 것만 같았던 그들에게, 에스라의 기록은 단순히 통계가 아닌 은총의 서사가 됩니다.

하나님은 흩어진 그들을 다시 모으시기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셨습니다. 이 기록은, 그들이 누구에게도 돌봄을 받지 못하는 나그네처럼 취급될지라도, 하나님께는 알려진 존재(야다, yada)라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마음을 쓰고 보살피는 것처럼 그들의 삶을 아셨고, 그들의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식은 인과응보의 엄격한 잣대나, 행위에 대한 보상(우리가 해야 하는 것에 대한 강조)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상처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긍휼로 우리를 다시 찾아오시는 집요한 은총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다”라는 과분한 선언을 하시며, 우리의 가능성을 보시고, 우리를 함께 지어져 가는 공동체로 부르십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지금 삶의 무거움 앞에서 신앙에 회의(懷疑)를 느끼는 모든 이들이여,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삶의 궤적이 실수와 넘어짐의 연속일지라도, 우리의 믿음의 여정은 늘 재시작할 용기를 허락받은 순례입니다.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자기를 온전히 비워 모두를 품으셨던 그 변함없는 사랑과 신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이야말로 오히려 주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유입되는 통로라는 자각 속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자기 욕망을 덜어내는 을 통해 생명과 평화의 태피스트리를 짜는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거창한 대성(大成)이 아니라, 아침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주님의 긍휼과 신실함을 붙들고 한 걸음씩 걷는 참음의 길입니다.

우리가 고통받는 이들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고, 그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려는 연대 의식을 가질 때, 비로소 장벽을 허무시고 우리를 하나로 만드신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삶에서 증언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절망의 심연 속에서도 빛을 끌어들이는 아슬아슬하지만 확실한 희망입니다.

마르틴 부버가 신의 부재를 '일식'(日蝕)으로 표현했듯, 때때로 하나님의 빛이 가려진 듯 느껴져도, 태양이 사라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우리의 지나친 욕심, 미움과 시새움—곧 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의 심연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 속에 머물러 그분의 환한 얼굴빛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시련이라도 이길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상처투성이인 감나무 가지가 귀한 먹감나무 무늬를 만들어내듯, 우리의 연약함과 실패를 통해 더욱 깊고 아름다운 존재로 빚어내시는 신앙의 연금술 덕분입니다.

평화의 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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