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1:01-11 잠든 영혼을 깨우시는 손길

by 평화의길벗 posted Nov 01, 202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에스라 1:01-11 잠든 영혼을 깨우시는 손길

절망의 바벨론에서 우리를 깨우시는 것은 우리의 결단이 아니라,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이다.

*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때로 무심하게만 보입니다. 70년. 한 세대가 태어나고 스러지는 긴 시간입니다. 유다 백성에게 바벨론의 시간은 어쩌면 망각의 시간이었습니다. 고향 예루살렘은 아련한 추억이 되었고, 질펀한 포로 생활의 현실은 그들의 영혼을 무디게 만들었습니다. 신앙이란 그저 조상들의 유산일 뿐, 이 이방의 땅에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렇게 절망이 일상이 되고, 냉소가 지성이 되어버린 땅. 우리 역시 저마다의 바벨론에 갇혀 살아갑니다. 의미를 상실한 노동, 깨어진 관계, 식어버린 마음의 성전. 그 잿더미 속에서 우리는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는, 아니 구원은, 언제나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찾아옵니다. 에스라 1장은 놀라운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스 1:1) 역사의 무대 전면에 등장한 이는 신실한 유다의 선지자가 아니라, 이방의 왕 고레스입니다. 하나님은 그 ‘타자’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얼어붙은 강이 풀리는 소리처럼, 하나님의 말씀(예레미야를 통한)이 성취되기 위해 가장 뜻밖의 인물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은혜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무언가를 결단하고, 뜨겁게 기도하고, 애써야만 하나님이 응답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잿더미 속에 앉아 신음하고 있을 때, 우리가 구원의 가능성을 상상조차 못 하고 있을 때, 이미 저편에서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냉소, 우리의 회의조차도 그분의 거대한 구원 계획을 막아서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가장 차가운 현실(고레스)을 사용하여 당신의 따뜻한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감동'은 고레스에게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칙령이 전해졌을 때, 백성 중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스 1:5) 일어선 이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감동'은 억지나 강요가 아닙니다. 그것은 잠자던 영혼의 소생입니다. 무감각해진 가슴에 다시 피가 도는 느낌입니다. "그래, 돌아가야지. 성전을 다시 세워야지." 이 마음은 그들 스스로 짜낸 용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밖에서부터, 그러나 가장 깊은 내면을 울리며 찾아온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의 귀환이 빈손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고레스는 느부갓네살이 약탈했던 성전 그릇들을 돌려주고, 심지어 돌아가지 않는 이웃들조차 "은 그릇과 금과… 물품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스 1:4, 6) 그들을 후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제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라" 명하시고는 빈손으로 떠밀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돌아갈 길, 다시 일어설 힘, 재건할 모든 재료를 친히 마련하십니다. 우리의 과업은 '무엇을 할까'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흔들어 깨우시는 그분의 음성에 '어떻게 응답할까'를 결단하는 것뿐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어쩌면 지금 삶의 한가운데서 깊은 회의와 영적 추위를 느끼고 있을 길벗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열심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열심에 기대어 있습니다. 내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린 것 같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것처럼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껴지십니까?

바로 그때, 하나님은 당신의 '고레스'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마음을 '감동'시킬 그 순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아슬아슬하지만 분명한 희망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연약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우리의 절망보다 한 걸음 앞서 있습니다. 그분은 이미 우리를 집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잿더미 위에서 다시 쓰이는 역사 : 철회되지 않는 부르심

칠십 년 포로의 무력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이방 왕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의 약속을 이루게 하시니, 이는 인간의 실패와 상관없이 새 역사를 시작하시는 주권적인 은총의 선언이다.

*

우리는 숨 가쁘게 내달리는 '점-시간' 속에서 살아가며 마음이 자꾸 허청거립니다. 성찰의 시간을 갖기란 언감생심(焉敢生心)인 이 시대에, 구약성경 에스라 1장의 첫 장을 펼치면, 멸망과 포로라는 역사의 심연을 관통하는 예기치 않은 은총의 방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 본문은 유다 백성의 70년 포로 생활이 끝나는 결정적 순간을 그립니다. 남유다가 멸망했던 까닭은 지도자들의 끝없는 불순종과 패역함, 그리고 돈과 권력에 대한 욕망에 영혼이 길들여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전 대화 본문 내용 참고). 인간의 욕망이 과도할 때 우리는 자기 삶의 주체로 살 수 없고 노예로 전락하며, 결국 공동체는 황폐해지게 마련입니다.

# 하나님의 주권과 철회되지 않는 은총

그러나 이야기는 포로들의 행위나 자발적인 회개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이방의 왕 고레스(Cyrus)의 조서(칙령)를 통해 해방의 문이 열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라는 경이로운 역설에 직면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유다의 왕이 아닌 페르시아의 황제를 사용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장소 규정적 존재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이심을 웅변합니다. 구원의 역사는 연약한 우리의 의지나 노력 혹은 '잘 했는지'에 대한 주판알 튕기기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행하시고 베푸시는 가없는 은총, 곧 히브리어로 헤세드(인애) 위에 기초합니다.

우리가 신앙에 대해 회의를 가질 때라도,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라는 든든한 방패를 제공합니다. 우리의 삶은 때로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무너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선한 일을 우리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이기에,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확신해야 합니다.

# 성전 그릇, 본질의 회복을 향한 순례

이 놀라운 은혜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에스라 1:5). 그들은 안주하려는 마음(애집하는 것)과 작별하고, 낯선 곳으로 향하는 순례자의 길을 떠납니다.

이들이 고향으로 가져간 가장 중요한 물품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갔던 여호와의 성전 그릇들이었습니다(에스라 1:7-11). 이는 단순한 물품의 귀환을 넘어 신앙의 본질(本質)을 회복하라는 깊은 요청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돈과 권력과 명성에 대한 동경(同傾)이 정상을 구가하는 곳입니다. 교회 역시 화려한 건물이나 잘 짜인 제도를 추구하며 외화내빈(外華內貧)의 길을 걸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황금으로 세워진 성전이 아니라 인간이며, 창부의 눈물 한 방울을 랍비의 말보다 훨씬 더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때로는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매며, 삶이 고단하여 우울감과 무의미성에 사로잡힐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의 소명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실현하는 헌신의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큰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다만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만이라도 비추기 위해 인간의 등불 하나를 밝혀 드리는 성실한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보답하고, 연약한 이웃의 삶에 사랑과 평화의 온기를 전하는 살림꾼의 손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몸을 굽히시는 분이시며, 우리를 통해 세상의 아픔의 자리에 다가가기를 원하십니다. 이 숭고한 사랑에 눈뜬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Articles

1 2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