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 03:01-18 종말을 사는 교회를 향한 권면 2

by 평화의길벗 posted Sep 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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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후서 03:01-18 종말을 사는 교회를 향한 권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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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후서 3장은 종말론적 긴장감 속에서 살아가는 교회가 어떻게 거룩함과 질서를 지키며 견고하게 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바울 사도의 구체적이고 목회적인 권면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과 동역자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요청하며, 모든 환난과 악한 세력으로부터 교회를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어서 잘못된 종말 신앙에 빠져 무질서하고 게으르게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단호한 경고와 함께, 공동체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권면의 기저에는 원수같이 대하지 않고 형제같이 사랑으로 권면하는 목자의 마음이 흐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평강의 주께서 친히 교회를 지키시고 은혜 베푸시기를 간구하며 서신을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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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절 교회는 부모의 마음과 기도로 함께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을 모든 환난과 악으로부터 지키시고, 친히 교회를 인도하여 당신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이르게 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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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편지를 마무리하며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첫째는 주의 말씀이 그들 가운데서와 같이 힘있게 퍼져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둘째는 자신들이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짐 받기를 위함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며, 오직 주님만이 미쁘사(신실하사) 교회를 굳건하게 하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또한, 교회가 자신들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있음을 신뢰하며,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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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겸손한 기도의 요청(1-2절) :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지만, 자신의 사역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교회의 중보기도를 통해 이루어짐을 깊이 인식했습니다. “기도를 요청한다”는 것은 사역의 성패가 인간의 능력이나 지혜가 아닌, 보이지 않는 영적 전투와 하나님의 도우심에 달려있음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특히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은 단순히 비합리적인 사람들을 넘어, 복음을 적극적으로 대적하고 사역을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이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항상 영적 공격에 노출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따라서 공동체적 중보기도가 얼마나 절실한지를 깨닫게 합니다. 교회사 속에서 수많은 순교자와 신앙의 선조들이 핍박 속에서도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이러한 기도의 연대에 있었습니다.

_미쁘신 주(3절) : ‘미쁘시다’(신실하다)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성품 중 하나입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세상의 불확실성 속에서 성도와 교회가 굳건히 설 수 있는 유일한 반석은 바로 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세상은 약속을 쉽게 저버리고 상황에 따라 변하지만, 하나님은 한 번 택하신 백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악한 자(사탄을 지칭)의 모든 공격으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위로를 넘어,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환난과 유혹 속에서 담대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서 잘 나타나는데, 그는 역사의 모든 혼란과 제국의 흥망성쇠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성은 그분의 신실한 언약 위에 굳건히 서 있음을 역설했습니다.

_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5절) : 바울의 기도는 교회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아가페 사랑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인내’는 십자가의 고난을 끝까지 감내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바로 이 두 기둥 위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신할 때 세상의 어떤 환난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으며,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인내를 본받을 때 우리 또한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내고 끝까지 거룩한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플라톤이 이데아의 세계를 동경했듯,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추구하고 닮아가야 할 완전한 원형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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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개인 : 나의 신앙이 나의 열심과 노력에만 의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영적 지도자들과 공동체를 위해 얼마나 진실하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삶의 문제 앞에서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온전히 의지해야 합니다.

_교회와 공동체 : 우리 공동체는 서로의 연약함을 위해 얼마나 깊이 중보하고 있습니까?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힘있게 역사하도록, 사역자들이 영적인 공격에서 보호받도록 기도하는 일은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사명 중 하나입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_사회 : 불의와 악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담대하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회의 부조리와 구조악 앞에서 좌절하기보다,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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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절 교회는 가르침 대로 행하지 않는 이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무질서와 게으름이 아닌, 거룩한 질서와 성실한 삶의 본을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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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형제들에게 엄히 명령합니다. 그것은 바로 무질서하게 행하고 사도들에게서 받은 전통을 따르지 않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들이 어떻게 교회의 본이 되었는지를 상기시킵니다. 그들은 무질서하게 행하지 않았고, 누구에게서도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하고 애쓰며 주야로 일했습니다. 이는 사도로서 마땅히 받을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오직 교회에 스스로 본을 보여 따르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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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무질서하게 행하는 자(6절) : 헬라어 ‘아탁토스’는 원래 군사 용어로서, 대열을 이탈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는 병사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 용어를 사용하여, 잘못된 종말론에 빠져 일상의 책임을 저버리고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의 행동을 묘사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게으름’의 문제를 넘어, 사도적 가르침(전통)을 거부하고 공동체의 연합과 거룩함을 훼손하는 심각한 신앙적 탈선입니다. 이진섭 교수가 지적하듯, 이들은 임박한 재림을 핑계로 노동의 의무를 저버리고, 다른 성도들의 관용과 사랑에 기생하며 살아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_전통(6절) : 여기서 ‘전통’은 인간적인 유전이나 관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어 사도들을 통해 교회에 전달된 복음의 핵심적인 가르침과 삶의 규범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과 가르침이 바로 이 권위 있는 전통에 근거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신앙이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이나 신비적인 깨달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도적 전승이라는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함을 보여줍니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사도적 전통을 기준으로 영지주의와 같은 각종 이단 사상을 분별하고 교리의 순수성을 지켜나갔습니다.

_노동의 신성과 사도의 본(7-9절) :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육체노동은 노예나 하층민의 일로 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 안에서 노동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합니다. 그는 ‘주야로 일하며 수고하고 애썼다’고 말하며, 노동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참여하는 신성한 행위임을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재정적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었음에도(고전 9:1-14 참조), 그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 것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당시 물질적 이득을 위해 가르침을 팔았던 순회 철학자나 엉터리 종교가들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 ‘스스로 본을 보여’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성실한 삶을 살도록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리더십이 말이 아닌 삶의 본을 통해 발휘됨을 보여주는 강력한 사례입니다. 칼뱅주의 직업 소명론은 바로 이러한 바울의 신학을 계승하여, 모든 정직한 노동이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예배가 될 수 있음을 가르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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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개인 : 나는 나의 일상과 직업을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부르심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신앙을 핑계로 마땅히 감당해야 할 가정과 사회에서의 책임을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삶이 다른 이들에게 신앙의 ‘본’이 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_교회와 공동체 : 우리 교회는 성도들에게 성경적인 노동관과 직업윤리를 잘 가르치고 있습니까? 공동체 안에 신앙을 핑계로 무질서와 게으름을 조장하는 잘못된 가르침은 없는지 분별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의 리더들은 바울처럼 삶의 본을 통해 성도들을 이끌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_사회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일과 삶의 균형을 잃고 극단적인 워커홀리즘에 빠지거나, 반대로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고 불로소득을 추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실한 노동의 가치를 회복하고, 정직한 땀의 대가를 존중하며, 일터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는 삶을 통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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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2절 교회는 조용히 일하고 자기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여 성실하게 일하고, 그 정당한 대가로 살아가는 책임감 있는 삶을 기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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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가르쳤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는 교인들 가운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도리어 일을 만들기만 하는 무질서한 자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강력히 권면하고 명령합니다. 그것은 바로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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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10절) : 이 구절은 종종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무정한 명령으로 오해되기도 하지만, 문맥을 살펴보면 전혀 다른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명령은 ‘일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일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고대 유대 랍비들도 “자녀에게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강도질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정도로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의 이 명령은 개인의 윤리적 권면을 넘어, 공동체의 건강성을 지키기 위한 원칙입니다. 공동체의 사랑과 자원을 악용하여 자신의 게으름을 정당화하는 행위는 사랑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현대 사회의 복지 시스템 논쟁에도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복지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건강한 노동 의욕을 꺾지 않는 지혜로운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함을 시사합니다.

_일을 만드는 자들(11절) : 바울은 이들이 단순히 ‘일하지 않는 것’(meden ergazomenous)을 넘어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periergazomenous)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헬라어의 언어유희(paronomasia)를 사용한 표현으로, 이들이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며 다른 사람들의 일에 참견하고, 공동체에 불필요한 소문과 갈등을 일으켰음을 암시합니다. 이는 노동이 단순히 생계 수단을 넘어 인간의 삶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고, 공동체에 유익을 끼치는 중요한 활동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분석했듯이, 청교도들에게 노동은 금욕적인 삶의 훈련이자, 구원의 확신을 확인하는 통로였습니다.

_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12절) : 이 권면은 로마서 12장 18절의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조용히’는 내면의 평온함과 외적인 평화로움을 모두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성실하게 자기 일에 집중하는 삶은 개인의 인격을 성숙하게 할 뿐 아니라, 쓸데없는 갈등을 줄이고 공동체의 평화를 가져옵니다. ‘자기 양식을 먹으라’는 것은 경제적 자립을 의미하며, 이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당당한 인격체로 서는 기초가 됩니다. 또한, 에베소서 4장 28절 말씀처럼, 성실한 노동의 목적은 단순히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을 넘어,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나누고 베푸는 데까지 확장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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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개인 : 나는 나의 삶에 주어진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있습니까? 혹시 다른 사람의 선의나 공동체의 자원에 무임승차하려는 마음은 없습니까? 시간을 낭비하며 다른 사람의 일에 불필요하게 참견하고 비판하는 데 에너지를 쏟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야 합니다.

_교회와 공동체 : 우리 공동체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무책임과 의존성을 조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도움이 정말 필요한 이들과 의도적으로 게으름을 피우는 이들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또한, 성도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하며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_사회 : 우리 사회는 ‘일하지 않고 버는 돈’을 최고로 여기는 황금만능주의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부동산 투기, 코인 열풍, 각종 사행성 산업이 만연한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정직한 노동의 가치를 다시금 선포하고 삶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또한,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일에 목소리를 내고 참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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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8절 교회는 선을 행하되 낙심치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잘못을 바로잡는 징계를 행할 때에도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형제를 품어 권면하기를 원하시는 평강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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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무질서한 자들에 대한 권면을 마친 후, 다른 형제들에게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만일 누가 이 편지에 쓴 바울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를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와 같이 권면하라고 덧붙입니다. 마지막으로,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모든 성도에게 평강을 주시고,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바울은 친필 문안으로 이 편지가 자신의 것임을 확인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모든 이에게 있을 것을 축원하며 서신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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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13절) : ‘선’은 단순히 착한 일을 하는 것을 넘어,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 질서 있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든 삶의 태도를 포함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대다수 성도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삶의 자리를 지키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 내의 무질서한 자들의 행동은 이들의 마음에 실망감과 회의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이 격려는 갈라디아서 6장 9절의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는 말씀과 동일한 맥락입니다. 신앙의 길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이기에, 외부의 핍박뿐만 아니라 내부의 문제로 인해 지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포기하지 않는 인내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소망입니다.

_사랑의 징계(14-15절) : 바울이 제시하는 징계의 방법은 ‘지목하여 사귀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공동체에서 완전히 추방하거나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교제를 중단함으로써 그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려는 목회적 조치입니다. 징계의 목적은 처벌이나 보복이 아니라, ‘회복’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곧바로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같이 권면하라”고 강조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징계의 원리(마 18:15-17)와 일치하며, 고린도교회에 음행한 자를 징계한 후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권면한 것(고후 2:5-8)과도 같은 정신입니다. 이처럼 성경적인 징계는 공의와 사랑, 단호함과 긍휼 사이의 균형을 필요로 하는 매우 섬세하고 지혜로운 영적 과정입니다. 이는 마치 외과의사가 암세포를 도려낼 때, 정상 세포를 최대한 살리려는 정교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과 같습니다.

_평강의 주, 임마누엘의 축복(16-18절) : 바울은 모든 권면을 마치며 ‘평강의 주’께 교회를 맡깁니다. 공동체의 모든 문제와 갈등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고 참된 평화를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때마다 일마다’ 평강을 주신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 모든 상황 속에서 주님의 샬롬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라는 임마누엘의 축복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간구하는 것은, 결국 교회의 거룩함과 질서, 평강이 인간의 노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의 친필 사인은 이 모든 약속과 권면이 사도적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임을 보증하는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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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개인 : 나는 선을 행하다가 쉽게 지치고 낙심하는 편입니까?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공동체의 문제 때문에 신앙생활 전체에 회의를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며 묵묵히 나의 길을 걸어가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_교회와 공동체 : 우리 교회는 죄와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무관심으로 방치하거나, 반대로 사랑 없이 비난하고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성경적인 권징의 원리를 배우고, 이를 지혜롭고 신중하게 적용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그것을 공동체의 성숙을 위한 기회로 삼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_사회 :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불의와 죄악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정죄와 혐오의 방식이 아닌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돕고 선을 행하는 일에 지치지 말아야 하며, 모든 사람에게 참된 평강을 주시는 주님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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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살로니가전후서의 교훈과 메시지

  1. 교회 입장 : 환난에서 승리하려는 교회

    • (1) 열매 맺는 교회 : 믿음, 사랑, 소망의 열매를 맺으며 삶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2) 하나님 말씀에 순전히 반응 :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 일상적인 삶에서의 실천을 강조한다.

    • (3) 환난을 이기려 하는 모습 : 더 나아가 넘어지지 않고, 어린 교회지만 이겨내는 모습을 보며 감사하며 기도한다.

  2. 사역자 입장 : 교회를 돕는 사역자들

    • (1) 부모의 마음 : 사역을 행함에 있어서, 불난 집에 아이를 두고 온 것처럼 바울은 생각하며 부모의 마음으로 서신을 쓰고 돌보고 있다.

    • (2) 예방 목회 : 문제가 일어난 다음에 가면 늦는다. 미리 해야 한다. 그러나 미리 예방해도 결국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또 문제가 계속 생긴다. 다른 문제는 줄었지만(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풍성해짐), 환난이 지속되기 때문에 신학적 질문에 답을 하고(주의 강림과 믿음에 대해서) 발생한 일들에 대한 목회적 예방을 위한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 (3) 상황 목회, 대안 목회 : 상황은 변한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변하는 만큼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교회는 보수적이어서 이전의 방식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 시대의 이슈(무신론, IT 기술, AI,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인문, 공공성 등)에 대해서 성경적인 답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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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알고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며, 

서로 위로하며 중보하는 일을 잊지 않게 하소서.

잘못된 신앙에 빠져 헤매는 이들을 

긍휼한 마음과 인내로 바라보면서 균형 있게 처신할 수 있는 지혜도 주소서.

서로 사랑하되 책임 있는 사랑,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는 사랑을 행하게 하소서.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고 

또 그런 이들을 향한 대우를 잘 치리하게 하옵소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아니하면서 

형제를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며, 

주의 평강과 은혜 가운데 행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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